3화. 돌아온 탕아 (2)
“그래?”
“예.”
상의를 탈의한 채, 왼손으론 뒷짐을 지고 오른손에는 검을 들어 중단을 겨누었다. 그 자세 그대로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연위의 상반신은 온통 땀으로 흥건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그의 몸에서 반투명한 아지랑이를 만들었다. 호흡은 다소 거칠었지만, 숨소리가 크진 않았다.
“어때 보이던가.”
“예?”
“둘 사이가 어때 보였는가 물었네.”
강윤은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하게 말했다.
“아주 잠깐이었던지라 자세히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분위기가 나쁜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런가.”
“예.”
한 시진째 검 끝을 주시하던 연위가 드디어 자세를 풀었다.
스르릉.
검이 검갑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한 줄기 노래처럼 매끄러웠다.
‘본인이 시킨 거라고?’
강윤의 보고를 듣고 연위는 내심 의아했다.
첫째는 둘째를 싫어하다 못해 증오했다. 어느 정도냐면, 아예 없는 사람 취급까지 할 정도였다.
그리고 연위는 첫째가 왜 둘째를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다.
한데 본인이 시켰다고 자백했다? 굳이?
“그 외에 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알겠네.”
강윤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법인각주(法刃閣主)를 부르겠습니다.”
“됐네.”
“예?”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네.”
목각인형처럼 딱딱했던 강윤의 얼굴에 솔직한 의문이 어렸다.
“이공자에게는 따로 죄를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연위가 말없이 강윤을 주시했다.
강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가주님과 시선을 마주하자 수백 자루의 검이 몸을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강 대주.”
“예, 예!”
“직분을 망각하지 말게.”
“죄송합니다!”
“이만 가게.”
꾸벅 고개를 숙인 강윤이 공손한 자세로 물러났다.
연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이 없었다. 바람은 선선했고, 햇빛은 적당했다.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닌가.’
제사 때, 첫째가 느닷없이 둘째를 껴안는 것을 보고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람의 혀는 거짓에 젖기 쉽지만, 행동은 거짓에 물들기 힘든 법이다. 둘째를 안고 감격에 젖은 첫째의 모습은 분명 진한 감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지금껏 아비에게 한 번도 그리 다가와 본 적 없던 첫째의 모습에, 연위는 알 수 없는 당혹감을 느꼈다.
‘뭔가 엉뚱한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열여덟이면 다 컸다. 무림의 자제가 아니었다면 혼인을 하고도 남았을 나이다.
그러나 첫째는 아직 성인(成人)다운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첫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아비인 자신도 몰랐다.
연위가 요대에 찬 검을 빼서 병기 진열대에 던졌다.
쿵!
진열대가 크게 흔들렸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장검 같지만, 특수하게 제작된 그 검은 무게가 스무 근에 달하는 중검(重劍)이었던 것이다.
“왕전(王典).”
“예, 가주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가(南宮家)에서 언제쯤 도착한다 하였지?”
“대략 나흘쯤 걸린다고 합니다.”
“남궁가의 자제도 온다 하였던가?”
“예, 남궁가주의 막내딸입니다. 이공자가 수학하는 학당에 잠시 청강을 하러 왔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 이미 당도하였습니다.”
“그래?”
가주의 딸에게는 관심이 없다. 다만 남궁가의 수뇌 중 하나가 연가를 방문한다고 했다. 오래간만에 큰 손님을 받는 셈이었다.
“빈객당주에게 말해 두게. 이틀 안에 손님 받을 준비를 끝내 두라고.”
“알겠습니다.”
무뚝뚝한 연위의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피로감이 감돌았다.
적어도 두 아들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 * *
사흘이란 시간은 무척 빨리 지나갔다.
생각할 것도 많았고, 정리할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벌을 받은 것이지만 연호정에게는 무척 소중한 시간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연호정은 생각을 정리했다.
“결국, 내가 할 일은 이것이로군. 대비하고, 막는 것.”
연가는 일 년 오 개월 뒤에 멸문한다.
나아가 이십 년 뒤, 사음교(邪淫敎)가 중원 땅을 지옥으로 만든다.
둘 중 무엇도 가벼이 볼 수 없는 문제였다. 연가는 그의 가문이었고, 사음교의 난은 중원 전체를 불살랐다. 사음교를 막지 못하면 결국 가문도 위험해지는 것이다.
심지어 사음교가 중원에 첫 칼질을 시작한 곳이 연가가 있었던 강소성(江蘇省)이었다.
‘사음교 말고도 그에 필적하는 대적이 둘이나 더 있다. 놈들의 공세를 사전에 차단하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해도 모자라.’
머리가 과열되는 것 같았다.
심호흡 몇 번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연호정은 이내 판단을 내렸다.
‘됐어. 사음교고 뭐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한 건 본가다.’
과거로 돌아왔으니, 예전에는 못했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연호정은 쓸데없이 많은 목표를 잡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현재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목표를 위해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에 대한 판단이 빨랐다.
지금 중요한 건 가문이다.
가문을 지키려면?
연호정이 자신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몸부터 볼까.”
침상 아래에서 가부좌를 튼 그는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역시.’
조사당에서도 몇 번 점검해 봤지만, 여전히 실망스럽다.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모르겠군.’
또래에 비하면 내공량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연호정을 압도하는 연지평조차 내공만큼은 연호정보다 아래였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양보다 중요한 것은 질이었다.
‘비연심법(飛燕心法)이 칠 성(七成)의 경지라?’
비연심법은 벽산연가의 기본심법이었다. 수준이 높지도 않고, 내력을 발출하는 힘이 강하지도 않다.
말 그대로 기본이거늘, 열여덟 먹어서도 칠 성밖에 못 깨우친 것이다.
연호정은 내심 씁쓸했다.
‘확실히 좋은 재능은 아니었어.’
다음 무공으로 갈아타기 위해선 비연심법이 최소한 구 성(九成)의 경지에는 도달해야 했다.
연호정은 가문이 멸문하기 며칠 전에야 겨우 구성을 터득했다. 그러나 연지평은 열여섯 나이로 비연심법을 대성(大成)했다.
두 사람의 재능 차이는 그렇게나 컸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지금이라면 비연심법 정도야 금방이야. 아예 지금 해치워 버리는 게 낫겠지.’
이십육 년이 지난 지금도 심법의 구결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심법의 구결을 암송했다.
스스스.
가부좌를 튼 몸에서 은은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아직은 진기(眞氣)가 가시 영역으로 구현되기 전이었다. 내공은 충분했지만, 발경(發勁)에 익숙하지 않은 몸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그도 잠시.
위잉.
단전에서 신호가 왔다.
흑암제 시절에 비하면 단전, 혈도, 혈맥, 근골 모든 것이 어설픈 상태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비연심법을 완전히 분해해 놓은 상태였다. 어떻게든 몸에 붙이는 게 가능할 것이다.
잠시 후.
위이잉! 위이잉!
어깨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은은한 연녹색 광휘가 묻어 나왔다.
아직은 그리 밝지 않은, 명멸을 반복하는 흐릿한 색이었다.
연호정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쉽진 않군.’
그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픽!
어깨가 움찔거렸다.
툭! 투둑!
상박에서 하박으로, 양팔 전체가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그것은 가부좌를 튼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진기가 사지(四肢)로 뻗어나가며 막힌 혈도들을 차근차근 뚫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반 시진이 흘렀다.
땀으로 흠뻑 젖은 연호정의 코에서 투둑! 하는 소리가 났다.
주륵.
코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수많은 혈(穴)이 집중된 두부(頭部)까지 진기가 올라간 것이다.
‘됐다.’
연호정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마지막으로 일주천을 하면.’
지잉! 지이잉!
이전보다 조금 더 밝아진 연녹색 아지랑이가 전신에서 새어 나왔다.
“후우.”
숨을 깊게 내쉬고 눈을 뜬 연호정이 가부좌를 풀었다.
“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렵구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먹을 쥐고 펴길 반복한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봐 줄 만하군.”
몸은 그대로였지만, 내공의 성질이 바뀌었고 혈도도 훨씬 많이 뚫렸다. 이제야 제대로 된 내공을 익힐 기반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무시무시한 연성 속도였다.
“이제부터가 중요한데.”
잠시 고민한 연호정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판단은 내렸는데 뭘 더 고민하고 있는 거냐. 시간 낭비하지 말자.”
깨끗하게 수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그는 곧바로 가주실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연호정을 보며 인사했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대공자님.”
예의가 절대 부족하지 않은, 격식 있는 인사들.
다만 그들의 인사에 존경이나 윗사람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다. 물론 우습게 보는 시선도 없었다.
일견 차갑다 느껴질 정도로 딱딱하고 무뚝뚝하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겉으로 보기에 그들의 언행은 반듯한 틀에 맞춰져 있는 것 같았다.
‘유연함을 찾아볼 수 없는 법치(法治)라.’
새삼 가문의 분위기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흑제성의 분위기와 비교를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흑제성보다는 낫겠지.’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연가의 분위기가 더 나을 것 같았다. 정(情)에 인색해 보일 수 있지만 최소한 상명하복에 철저하니까.
하지만 딱딱해도 지나치게 딱딱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훗날 어떤 형태로든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했다.
‘내가 걱정할 바는 아닌가.’
잠시 후, 그가 가주실 건물 앞에 섰다.
건물 입구는 두 명의 수문위(守門衛)가 지키고 있었다. 제각기 검(劍)과 도(刀)를 멘 중년의 무사들이었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아버지를 뵈러.”
수문검위(守門劍衛)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껏 대공자는 한 번도 먼저 가주님을 찾아온 적이 없었다.
“혹, 가주님께서 저희 모르게 따로 언질을 주셨는지요?”
“그런 건 아냐.”
“하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좀 급한 일이야. 안에 알리도록 해.”
“죄송합니다. 가주님께서 정오 전까지는 누구도 들이지 말라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엄명까지?
“시간을 잘못 잡았군. 그럼 내가 한 말을 나중에 전해 드리는 것 정도는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내 말만 전해 드려.”
“말씀하십시오.”
“벽라진결(碧羅眞訣)을 미리 익혀 두겠다고 전해.”
순간 수문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못 들었나? 벽라진결 미리 익힐 테니 그리 아시라고 전하면 돼.”
연호정이 등을 돌렸다.
“그럼 수고들 해.”
“자, 잠깐!”
“응?”
“지금 벽라진결이라 하셨습니까?”
“그런데?”
수문위들은 입을 뻐끔거렸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진짜로 귀가 어두운 건 아니겠지?”
“…….”
“꼭 전해 드리게. 나중에 딴소리 안 나오도록.”
충격을 받은 수문위들을 뒤로한 채 걷던 연호정의 눈에 순간 한 소년이 보였다.
“지평?”
“앗? 형님, 여기 계셨어요?!”
“어, 아버지 좀 뵈러.”
연지평이 놀란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모두가 딱딱한 가면을 쓴 가문에서 연지평은 가장 솔직하고 인간적인 반응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 어쩐 일로요?”
“그냥 이런저런 일로. 한데 너는 여기서 뭐 하느냐? 너도 아버지 뵈러 왔냐?”
연지평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형님이 거처에 안 계시길래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었죠.”
“나? 나는 왜?”
“제가 밥 사 드린다고 했잖아요. 좋은 객잔도 물색해 놨다고요.”
“아?”
연호정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그거 뭐, 굳이 밖에서 먹을 필요 있나? 안에서도 충분히…….”
연호정은 말을 다 끝낼 수 없었다. 연지평의 소 같은 눈망울이 젖어 드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괜스레 입 안이 텁텁해졌다.
“그럼 바람도 쐴 겸, 밖에서 식사나 할까?”
연지평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네!”
신이 난 연지평이 대문 쪽으로 연호정을 안내했다. 위풍당당한 팔자걸음이 개선장군을 방불케 했다.
연호정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기다려라, 벽라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