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화 (1/963)

1화. 서(序)

“이제 뒈졌나…….”

강시도 목이 날아가면 죽는다.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랴.

쿵!

피범벅이 된 손에서 빠져나온 풍뢰부(風雷斧)가 땅에 떨어졌다. 평소에는 회초리처럼 가볍게 휘둘러 대던 도끼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연호정(燕豪定)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쇠사슬에 친친 감긴 손은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이런 손으로 어떻게 사람 몸뚱이만 한 도끼를 쥐고 휘둘렀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치리링!

부서진 쇠사슬이 떨어져 내렸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씁쓸함에 고통도 잊었다. 이 손으로는 도끼는커녕 젓가락도 못 들게 생겼다.

그래도 삼교(三敎)에서 가장 악랄하다던 사음교(邪淫敎) 교주의 목과 바꿨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물론 자신이나 놈이나 밥술 못 뜨는 신세가 된 건 똑같지만.

“그놈은 죽었나?”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작은 바위에 기대 앉은 한 노인이 보였다. 당대 정파의 수장인 무림맹주(武林盟主) 모용군이었다.

“목 날아간 거 안 보이시오?”

“안 보이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자세히 보니 모용군의 두 눈은 무척 탁했다. 지나친 내공 소모와 극심한 내상으로 눈이 멀어 버린 것이다.

모용군 앞으로 걸어간 그가 풀썩 주저앉았다.

“다 끝났소.”

“고생했네.”

그래, 고생 많았지.

사음교 하나 작살내려고 정파와 흑도가 손을 잡았다. 수백 년 동안 앙숙으로 지내 오던 두 집단의 뿌리 깊은 증오와 불신마저 불식시킬 만큼 사음교의 행태는 악랄했다.

그 악랄함도, 사상 초유의 연수 관계도 오늘부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도.

“자네는 괜찮나?”

“……뭐, 그런대로.”

“하기야, 사상 최초로 흑도대종사(黑道大宗師)라 불리던 거인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 정도라…….

연호정은 사음교주의 마지막 일격이 자신의 심맥을 끊어 놓았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쥐꼬리만 한 내공으로 어떻게든 생을 이어 가고 있지만, 조만간 죽을 거라는 것도.

“세상 놀랄 일이네. 웬일로 날 치켜세워 줘?”

“사실을 말했을 뿐일세. 자네만 아니었으면 십 년 전에 흑도 연맹을 반파시킬 수 있었어.”

“그랬으면 오늘이 오기 전에 당신들도 개작살 났겠지.”

“맞는 말이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설마 자네들 덕을 볼 줄이야.”

연호정은 피식 웃었다.

잠시 침음하던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나?”

“뭔 소리요?”

“자네 본래 흑도 출신이 아니지 않나? 우리 쪽으로 왔으면 천하의 고수로 명성을 떨쳤을 걸, 왜 흑도로 넘어가 그쪽의 총수가 되었냐는 걸세.”

“그 얘기는 뭣 하러 꺼내는 거요?”

“죽기 전에 궁금증은 풀고 가고 싶어서.”

모용군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공허했다.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소?”

“반 각도 못 버티겠네.”

빌어먹을.

평소라면 타인의 몸 상태 정도야 대번에 꿰뚫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심맥이 끊어지고 진기(眞氣)가 쇠하여 기감까지 무뎌진 것이다.

‘이 양반도 끝난 건가.’

이거 왠지 씁쓸하군.

“유언은 없소?”

“내가 살아온 인생이 곧 유언일세.”

“무림맹주답군.”

“그래서 대답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소.”

물론 이유는 있었다. 하지만 다 죽어 가는 사람 앞에서 과거사 따위 주절대고 싶진 않았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눈이 먼 사람의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애잔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자네답네.”

“마지막 가는 길은 봐 주겠소.”

“고맙네.”

확실히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나도, 이 양반도.

“그리고.”

“음?”

“미안하네.”

“뭐가 말이오?”

“…….”

“거 싱거운…….”

푹.

연호정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쿠웨엑!”

연호정이 피를 토했다. 토해 낸 피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가 자신의 명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미세한 침 하나가 박혀 있었다.

‘우모침(牛毛針)?!’

떨리는 고개를 들어 올린 연호정의 눈에 피투성이가 된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노인의 얼굴은 유독 시커멓게 보였다.

연호정의 눈에 핏발이 섰다.

“다, 당관(唐款)……!”

사천당가(四川唐家)의 가주이자 무림맹의 부맹주인 거물급 인사.

연호정은 사음교주의 음황지(陰荒指)에 당관의 가슴이 뚫린 것을 똑똑히 보았다. 심장을 비켜 갔다 하더라도 지풍(指風)의 경력으로 심맥이 파열되었을 텐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아니, 대체 왜 날 공격한 거지?

“이해해 달란 말은 않겠네.”

연호정이 모용군을 노려보았다.

모용군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죽으면 누가 있어 자네를 막겠는가. 지금의 정파 무림은…… 흑제성(黑帝城)을 막을 수 없어.”

“쿨럭!”

“저승에서 사죄하겠네. 함께 가세.”

빌어먹을, 가만히 뒀어도 죽어 줬을 텐데.

기어이 이어 놓은 심맥이 툭툭 끊어졌다. 당가의 극독 단장산(斷腸散)에 내력이 증발하고 오장육부가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 고통이 어찌나 심한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개자식, 독을 써도 이리 독한 걸 써?

풀썩!

연호정이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당관이 고꾸라졌다. 마지막 임무를 완수한 후 긴장이 풀린 그가 가장 먼저 죽은 것이다.

“왜…….”

저도 모르게 나온 말.

모용군의 얼굴에 죄책감이 일었다.

“정말 미안하네.”

연호정의 눈이 점점 탁하게 물들었다.

‘왜 마지막은 항상 거지 같지?’

차악도 있는데 최악이 되고, 최선이 될라치면 차선의 순간을 맞이한다.

언제나 그랬다. 운이 좋은 듯하면서도 기가 막히게 나쁜 이놈의 운명은 마지막까지 이 난리를 치고 있었다.

전설적인 무공을 익혔음에도 천하제일인은 되지 못했고, 출세했나 싶었더니만 그게 흑도 사파의 우두머리였다.

최고가 되지도 못하면서 책임질 건 한 보따리인 피곤한 인생이었다.

그래도 뭐…… 열심히는 살았으니까.

‘맹주. 저승 가서 제대로 사과해야 된다, 당신.’

* * *

“매상궁구(每常窮究) 충위우가(忠爲虞家) 지득천세(知得千歲) 망화제신(望和諸神)…….”

일정한 음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맑고 청아했다.

‘음?’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음색 너머 무거운 향내가 맡아졌다.

‘뭐야? 절간이라도 왔나?’

근데 불경 읊는 소리가 아닌데?

“앞으로도 저희를 굽어살피시어 가문의 영광이 천 년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주변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연호정이 눈을 떴다.

‘엉?’

전후좌우, 무릎 꿇고 누운 사람들 모두가 절을 올렸다.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뭔 상황이야?’

그런데 왜일까?

이 장소가 어쩐지 낯이 익다. 사람들의 복식도, 저 고풍스럽고도 담백한 제단도 어디서 한 번 봤던 것 같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툭툭 건드렸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

절을 한 채 고개만 빼쭉 든 소년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소년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도.

소년이 다급하게 손짓했다. 어서 절을 하라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러나 연호정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지평?!”

순간 엄숙했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공기가 급속도로 냉각된다. 하지만 연호정은 이곳의 분위기를 느낄 정신이 아니었다.

눈앞의 이 소년.

재기 넘치는 얼굴에 별빛 같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이 소년은 바로 자신의 동생이었다. 이십육 년 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가문과 함께 생을 마감한 동생이 버젓이 나타난 것이다.

‘꿈인가? 환상?’

그럴 리가 없다. 그는 현실을 꿈이나 환상 따위로 혼동할 만큼 만만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현실이 아니더라도.

비록 관계가 파탄 나 버렸지만 꿈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었던 가족이 나타났다. 연호정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고 오르는 격렬한 감정을 느꼈다.

“펴, 평아!”

연호정이 소년을 와락 끌어안았다.

소년, 연지평(燕智評)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이 양반이 미쳤나 싶었던 것이다.

소년이 작고 빠르게 속삭였다.

“혀, 형님! 이러지 마세요! 이러다 혼나요!”

“이 자식!”

이 온기와 은근히 떨리는 반응.

분명 자신의 동생이 맞았다. 연호정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형님! 형님! 아, 진짜 왜 이러세…….”

그때였다.

“호정.”

연호정의 몸이 덜컥 굳었다.

동생의 얼굴과 목소리는 기억 그대로였다. 그리고 지금 들리는 이 목소리도.

연지평을 놓아준 연호정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제단 앞에 선 중년 사내가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호된 질책도, 질문도 아니었다. 그냥 평이한 목소리에 감당키 힘든 무게감이 실렸다.

어릴 적에는 그리 무서워하고 싫어했던 목소리였다. 저 목소리를 듣기 싫어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던 가족이었다.

“아버지?”

중년 사내, 연위(燕偉)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멍하니 일어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아들의 모습은 평소와 너무 달랐다. 허망함과 불신, 놀라움과 감격이 깃든 눈빛이었다.

꽤 인상적인 순간임은 분명했다. 그의 큰아들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짓눌린 억압에 어깨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했던 녀석이었다.

“아, 아버지!”

연호정이 연위를 향해 달렸다. 당장이라도 끌어안을 기세였다.

연위의 손이 움직였다.

단숨에 연호정의 손목을 잡아챈 그가 그대로 힘을 주었다.

쿵!

‘컥!’

연호정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손목을 타고 흐르는 기가 다리에 힘을 빼 놓았기 때문이다.

“제사 중에 소란을 피우다니, 네놈이 정녕 제정신이란 말이냐?”

등골이 오싹한 이 목소리도 지금은 정겹게만 들려왔다.

연호정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들을 내려다보던 연위의 얼굴에 한 줄기 당혹감이 어렸다. 자신을 보는 연호정의 얼굴에 서글픔이 가득했던 것이다.

어째 오늘 큰애가 좀 이상하다.

“제사를 어지럽힌 죄는 끝난 후에 묻겠다. 집무실로 가서 기다리거라.”

평소와 같은 냉담한 말투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평소와 달랐다.

“예!”

너무 당찬 대답 아닌가, 이거?

드물게 당황한 연위가 애써 몸을 돌리고, 연호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사에 참여한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혼란을 담고 있었다.

웃으며 그들을 둘러보던 연호정의 얼굴에 순간 바싹 굳어졌다.

‘잠깐.’

너무 감격해서 이게 이상한 일이라는 걸 지금에야 깨달았다.

그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우모침이 없었다.

‘내가 안 죽은 건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니지. 안 죽은 걸 넘어서…….’

다시 한번 주변을 훑어보는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이건 내 과거잖아?’

손을 살피고 몸을 더듬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보고, 옷을 살펴보았다.

그렇다. 이것은 자신의 몸이되,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전투로 단련된 그의 몸엔 상처가 가득했고, 손 여기저기엔 굳은살도 한가득 박여 있지 않나.

호리호리한 체구에 깨끗한 손은 분명 어린 시절 자신이 갖고 있던 몸이었다.

“이럴 수가.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

“뭘 중얼거리고 있느냐!”

연위는 기어이 역정을 냈다. 연호정은 머쓱한 듯 고개를 숙이곤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자리에서 빠져나온 그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짜 내 집이다!”

강호 무림 최고의 명가라 불리는 칠대세가(七大世家)의 하나.

오십 년 역사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은 다른 육대세가 못지않다는 강철의 가문.

벽산연가(碧山燕家)의 대공자 연호정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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