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사형>
정의의 저울은 죄의 무게만을 판단한다. 무고하지 않는 사랑하는 엄마와 살기 위해 발버둥 친 어린 소녀에게조차 단호한 심판을 내리는 정의의 저울.
“너는 엄정한 법적 심판만이 지금의 상황을 지금의 엉망진창인 법적 잣대를 올바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가냘프고 작기만 했던 소녀가 갑자기 어른의 목소리를 낸다. 당당하게 큰 목소리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한다. 키가 커지고 어른스러운 이목구비를 갖췄지만 여전히 어린 소녀로 보이는 그녀가 말한다.
“엄정한 법적 심판만이 지금의 세상을 제대로 정화 시킬 거야. 지금은 권력이나 금력의 앞에서 제대로 법적 제재를 가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억울한 사람만 매번 억울하지.”
“그런가···.”
작았던 소녀는 어느새 단단한 자신의 신념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채를 쌓은 채 자라났다.
정의의 저울이 심판한 내용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엄정한 칼날을 나를 향할 것이다. 붉게 빛나는 메시지를 한쪽으로 치우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가라.”
“뭐?”
“너라면 지금과 달리 너희 어머니가 바라는 평범한 삶을 연기하면서 살 수 있겠지.”
“넌 심판자잖아. 잔혹하지만 엄정한 냉혹하지만 평등하게 심판하는!”
“나는···처음부터 그런 심판자가 아니었던 거겠지.”
“뭐?”
“그저 한 명의 인간이었지. 나약하고 상황에 휘둘리는···. 네 어머니는 현명하시다. 평범한 삶이 쉽지 않지만···거기에 행복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
“나는 심판자로 살아왔지만···행복했냐면 글쎄. 오히려 심판자가 되기 전 혼란스럽고 고민하던 시절이 더 행복했던 것 같군.”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야 대백공이 나에게 정해준 운명을 걷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그저 복수자였다. 복수가 하고 싶은데 화가 나는데 그저 보복살인이나 하는 그런 지질한 놈으로 보이기 싫어서 죄를 짓는 자들을 정당하게 심판한다는 그런 허울을 둘러쓴 거지.”
“아니야! 심판자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심판자는 나다. 내가 말하지 않나. 나는 평범해지지 못한 그저 어리석은 이라고.”
“그럴 리 없어. 심판자는···.”
“그러니. 가라. 가서 어머니가 바라는 평범한 삶 행복한 삶을 느껴보고 내가 했던 바보 같은 일에 다시는 관여하지 마. 머리가 좋은 너라면 유리하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겠지.”
“그러지마···. 도대체 왜. 어째서···.”
“너를 사랑하는 안나와 네 어머니를 실망 시키지마.”
“···.”
정작 그녀에게 가라고 했지만 괴롭고 혼란스러운 표정의 그녀를 뒤로하고 나간 건 나였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두고 나는 발걸음을 서두른다.
정의의 저울에서 투사하는 붉은 선이 그녀와 나를 잇고 있었지만 시야에서 멀어지자 경고메시지처럼 붉은 선이 나에게 달라붙었다. 나는 애써 그 붉은 선을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목표한 곳으로 향한다.
금고는 사용을 못 하고 있었지만 강화된 육체는 아직도 제대로 활용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내가 정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심은수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한 후 나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다행히 목표물은 혼자 있었다.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인기척은 한 명뿐이었다.
‘당연한가? 이곳만큼은 안전하고 또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하겠지.’
익숙하게 너른 소파에 몸을 눕힌 상태에서 이명준 의원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하하하. 내가 말했잖아. 심판자라니 애들이나 관심 가지는 주제가 아닌가. 정말 그런 존재가 있었다면 자네하고 나는 벌써 이 세상에 없어야 할 텐데?”
“그래. 알겠어. 이런 이야기는 직접 보면서 말해야지. 알겠네. 내일 보지.”
통화가 끝났는데도 웃음기가 가시지 않는 얼굴을 보면서 나는 이명준 의원 앞에 모습을 들어냈다.
술을 한잔 따라 컵에 들고 다시 자리로 향하기 위해서 뒤돈 순간 나를 그제야 발견했는지 깜짝 놀란 반응이었지만 정치인답게 표정을 정리하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초대하지 않는 손님이 와 있었군. 누구더라.”
“한 번도 제대로 통성명 한 적 없는 사이야.”
“하하하. 내가 유명해지긴 했나 보군. 처음 보는 사람이 나에게 편하게 말하고 말이야.”
“듣기 거북하면 너도 편하게 말해.”
무언가 나를 구속하던 모든 걸 내던진 듯 편하게 말했다.
붉은 메시지가 시야를 괴롭혔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하듯 깊은 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편하게 말하지. 그런데 자네는 누군가?”
“너를 죽일 사람.”
“하하핫···.”
“···.”
이명준 의원은 마치 엄청난 농담을 들은 것처럼 크게 웃었지만···그저 담담한 나의 표정을 보더니 이내 진중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하하···농담이 아니군.”
“농담을 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야. 나도 나름 큰 결심을 한 상태여서.”
“정말인가? 거물 정치인인 나를 그냥 죽인다고? 여당에서 시킨 건가? 아니 그쪽은 자기네들끼리 분열되어서 싸우느라 나한테는 관심도 없을 텐데?”
“···.”
“아니면 대통령이? 자기 부인을 총알받이로 내 사건을 무마시켜서?”
“···뭐가 궁금한 거지?”
“정말 아무런 반응이 없군. 내 적들이 보낸 게 아니라면 도대체 자네는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건가?”
“아무도 죽이라고 하지 않았어.”
“뭐?”
“하지만 너는 죽어야 해.”
“무슨···.”
그제야 두려움을 느낀 듯 이명준 의원이 뒷걸음질을 쳤지만···그가 편하게 쉴 수 있게 준비한 안가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바란다는 건 그가 직접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런 외딴 저택에 조용히 침입하는 건 익숙하지.’
소파 옆에 내려놓은 휴대폰을 바라보며 몸을 날렸지만 나의 속도를 이기지는 못했다.
“흡.”
나의 손에 목이 붙잡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뿐이다.
‘너무 쉽다. 느려. 이제까지 범죄자들과 다른 느리고 둔한 아저씨 그뿐인데···.’
내가 생각이 깊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목이 붙잡힌 상태에서 양손으로 내 팔뚝을 할퀴면서 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에 손아귀의 힘을 조금 풀었다.
“살려···살려주면 돈···아니 권력 여자 뭐든지···다 주겠다.”
“···.”
“내가 거짓말한 게 유감이었나? 바로 자수하지. 이제까지 했던 모든 잘못을···.”
“그런 건 상관없어.”
“어째서 나를···.”
“정의의 저울이 죽이지 말라고 한 존재니까.”
“뭐?”
“넌 이미 충분히 죽을 죄를 지었어. 사소한 거짓말 따위나 돈 먹은 걸 빼더라도 이미 사람을 죽였잖아?”
“그게 무슨···.”
“하지만 □□□□□□이라는 이유로···.”
거짓된 모든 것에 대해서 말했지만 내 입 밖으로 나온 건 가청음을 벗어난 소음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는 나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이제까지 목을 붙잡혀서 붉어진 눈가가 크게 떠지더니 앞서보다 더 심하게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알아들었겠지? 네 죄를 네 존재의 특수성 때문에 심판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넌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을 정도의 죄를 여러 번 지었지.”
“아···아니야···.”
“그런 거짓말을 믿어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게 놀랍지만 나 한테는 안 통해. 정의의 저울은 너를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오늘 깨달았어. 이 저울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기 위해서 다시 돌아온 게 아니란 걸.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거지.”
“무···무슨···.”
사내의 놀라운 표정을 뒤로하고 나는 회귀 후 나의 삶을 돌아봤다.
‘처음에는 분명 평범하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 순간 복수를 심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쉽게 벌고 쉽게 살고 있는 내 모습을 외면하다가 심판자를 자처하는 은수를 보고 깨달았다.
“결국···내 욕심이었던 거지.”
“···무···뭐?”
“세상에 정의와 질서를 바로잡겠다고 말했지만···그 기준이 나라면 그게 정말 바로잡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스탈린 같은 또 하나의 학살자이자 독재자가 된 게 아닐까?”
“무슨 바보 같은 말이냐.”
“당신은 그저 갑작스럽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덮었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수면 위로 다 지웠다고 생각했던 증인이나 증거가 갑작스럽게 나타날 때가 있지 않았어?”
“···크···설마···.”
“나는 최소한 반성하고 자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점점 안하무인이 되더라. 그런 상황을 나는 지켜보기만 했어. 저울의 기울기가 충분하지 않았으니까.”
“저울이라니···.”
“네가 쌓는 업의 기울기 말이야. 한 방울만 한 방울만 넘치면 될 것 같은데 그 순간마다 □□□□□□라는 이유로 넘어간 거지.”
“크···무슨 헛소리냐?”
“뭐···너도 느끼는 게 있을 텐데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저 도구에 휘둘린 나 스스로가 미련하고 바보 같을 뿐이지.”
“나···날 죽이면 너도 형편 좋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심판자.”
내 말에 명이준도 무언갈 느낀 듯 나에게 심판자라고 호칭했다.
“심판자라···내가 정말 심판자일까?”
“그게 무슨 헛소리냐?”
“나도 안 그런척하면서 심판자라는 말에 취해 있었는지도 몰라. 다른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 스스로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질서를 어지럽히고 다른 이들을 어리석은 존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크···윽···.”
힘을 풀었어도 목이 졸린 시간이 길어지자 혀를 길게 빼면서 괴로워하는 명이준이 시야에 잡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휘둘리고 있는 건 나였던 거지.”
“··으···윽···.”
명이준의 숨이 넘어가는 광경을 담담하게 바라봤다.
금고 사용이 어려운 지금 혈흔이나 시체와 같은 물증을 치우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몸 안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것처럼 그저 멍하니 명이준이 앉아 있던 소파에 앉았다.
진수형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명이준이라는 범죄자를 내가 끝까지 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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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내 덕에 월급 아쉽지 않게 됐으니까. 밥 한 끼 사요.”
“고맙다. 덕분에 승진은 못 해도 월급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삼겹살 특유의 치직거리는 기름 튀기는 소리와 알싸한 연탄 내음 그리고 독한 소주 향이 어우러진 곳.
“일은 힘들고 알아주지도 않는데 형사로 계속 일할 거에요? 내근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내가 수사하고 싶은 사건이 있어서.”
“···?”
“내가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너 형사 되길 바랐잖아?"
“노골적이 아니긴 완전 노골적이었거든요?”
“하핫···그랬나?”
“제가 경찰 되면 뭐···같이 조사하고 싶은 사건이라도 있었어요?”
“그래.”
“진짜요?”
“비밀엄수가 되어야 하는데 사실 한 조직의 구성원이 위선에서 지시하면 거부하기 힘들잖아. 위에서 몰아붙이면 휩쓸려가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전 안 그럴 것 같았다는 건가요?”
“그렇다기보다는···.”
“···.”
궁금하지만 진수형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자 연탄불이 꺼지고 쌀쌀하다고 느껴질 무렵 어렵게 입이 열렸다.
“네 아버지 사고하고도 연관되어 있으니까.”
내가 놀라서 자리에서 들고 있던 잔을 떨어트렸다.
쨍―.
소주잔 깨지는 특유의 소리가 가게 안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그제야 술기운이 조금 가셨는지 손사래를 치면서 헛소리를 했다고 했지만 나는 누구보다 허진수라는 사람이 경찰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강한지 알았기 때문에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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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어이없지? 내가 잡아야 할 아버지 원수를 네가 처리해줬는데···오히려 난 너를 죽였으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