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썩은 뿌리에서 탄생한 일그러진 영웅>
문명이 발달하고 자연의 위대함을 극복해나가고 개발하고 발전하고자 한다.
거대한 태풍과 무서운 지진 해일을 관측해서 진료와 위험성을 예측한다고 해서 그걸 극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인류는 지구 그리고 자연에게 경외감을 가지고 도전하고 있는 위치이다.
숨겨진 법칙들이 위대한 과학자 연구자의 노고로 밝혀졌지만
밝혀진 만큼 아니 밝혀질수록 더 숨겨진 비밀이 인류는 진리를 탐구하며 신비에 빠지게 된다.
그처럼 극복했다고 여겼던 자연현상은 시간이 지나면 더욱 놀라운 변화로 인류에게 경외감과 두려움 그리고 그런 자연을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의지를 새기게 해준다.
우리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강력한 태풍이 한반도를 지나갈 때 우리는 폭우와 바람으로 인한 피해에 대비한다. 대비하지 못하면 인명피해가 생길 수 있다.
이처럼
태풍이라는 재해가 지나가도 우리의 삶에 큰 상처를 남기는데 멸망이 다가온다면 인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세상이 지금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태풍보다 더 무서운 모든 생명이 사라진다는 멸종은 더욱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멸종의 징조는 무엇일까?
‘이따위 나라 망해버리라지.’
인류라는 종 스스로가 멸종 아니 멸망을 바라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인류 스스로 자신의 삶에 자조하며 비웃고
기성세대는 스스로 가진 걸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신세대는 기성세대의 세태에 반발하면서
젊음과 늙음 인종과 성별에 따라 서로 미워하고 차별하고 결국 죽이고자 하게 되는 때가 아닐까?
질서가 사라지고 혼란스러운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
나라가 망하고 세계가 망하는 걸 오히려 바라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
인류가 처절하게 쌓아 올린 문명 중 찬란한 도전의식을 깎아내리는 추악한 욕망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가는 게 인류 멸종 즉, 인간의 입장에서는 멸망의 징조가 아닐까?
누군가 잘못되었다고 앞서서 변화를 하고자 하면 그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층의 반발로 탄핵당하고 온갖 잡스러운 오욕을 뒤집어쓰게 되는 세상이 아닐까?
그런 변화가 잘못된 거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진실과 사실은 거짓에 묻혀서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세상이 멸망의 징조가 아닐까?
질식할 것 같은 거짓 속에서 그런 삶을 감내하며 수긍하고 분노하면서도 참고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이 점차 많아진다는 게 멸망의 징조가 아닐까?
지구가 인간을 배제하기 위해서 끝없이 바이러스와 이상 기온 현상이 세계 이곳저곳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게 그 전조 현상이 아닐까?
기득권층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대로 앞으로도 살아가려고 한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향성을 바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도 제대로 교육받은 평범한 이들도 느끼고 있다.
‘지구가 아파한다.’
지구가 인간을 배제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의식적이진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에 출산율이 바닥인 게 아닐까?
멸종세대의 부모가 되고 싶지 않다는 그런 생물학적 무의식의 발현이 아닐까?
축복받은 나의 아이가 불구덩이 홍수 매캐한 매연과 미세먼지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곳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자만이 모든 것을 가지는 승자독식의 세계.
멸종의 전조로 정의나 법치 따위의 질서는 사라진 고단하고 외로운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은 생물학적 무의식의 발현이 출산율을 낮추는 것이 아닐까?
기득권층의 삶의 방향성이 바뀌는 것보다는 지구가 인간을 배제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평범한 사람들이 열심히 발버둥 치지만 권력자의 거짓말 한마디에 미쳐가는 세상.
독재자의 면면이 더 위대하게 여겨지고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개혁을 입에 담는 이들은 명예를 갈취당하고 짓밟히고 비웃음 당하는 세상.
법질서라고 포장하지만 같은 법률 위의 삶이라고 해도 권력자와 평범한 이들의 동등하게 판결받을 수 없는 세상.
멸종이나 멸망 이전에
이런 세상의 풍파에 휩쓸려도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결국···필멸자의 삶은 죽음을 향해 달리는 마라톤이나 다름없다.
언젠가 죽을 거라는 확실한 진리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사람답게 살고 싶다.’
죽음을 앞에 두고 누군가는 삶에 미련을 놓지만···누군가는 당장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도 사과나무를 심는 것처럼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달린다고 방종 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짐승도 배를 채우기 위해서 사냥을 하지만 사냥감의 새끼는 놓아준다.
내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정의와 법치가 무너진 인간 세계는 어떨까?
인륜과 도덕이 무너지는 것보다 선이 사라져 서로를 향해 더욱 가혹해지는 짐승보다 못한 삶.
차라리 그런 삶을 원하게 되는 젊은 세대에게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기득권층 아니 권력자의 삶.
하나의 권력을 위해서 짓밟혀야 하는 수많은 평범한 이들의 삶.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분노하고 슬퍼하는 게 아닐까?
권력자 아니 이름 높은 공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법률의 위에서 평범한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최소한의 선조차 무시하고 거짓과 기만 속에서 사는 이들을 지지하는 다수라는 이름의 이들에게 짓밟혀야 하는 것 인가?
거짓과 기만 그것이 이렇게 큰 권력을 쥐고 나라를 뒤흔들 줄 알았다면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침잠한다.
심판자에 대해서 확인되지 않은 소문조차 흘려듣지 않고 사람들이 귀 기울이는 건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단 하나의 숨통이자 출구처럼 느껴져서가 아닐까?
심판자를 지지하고 또는 거부하는 이들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것조차
모두 인정하는 하나는 법으로 제대로 심판받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 대한 불만이 형상화된 게 아닐까?
‘법치로 제대로 된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세상···억울한 이들이 만들어 낸 불타오르는 화살.’
사적보복을 대신해주는···
권력자인가와 상관없이 죄의 경중에 따라 심판하는···
썩은 뿌리에서 태어난 일그러진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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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관계자들로 보이는 이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마주한 사회자가 익숙하다는 듯 붉게 들어온 카메라에 집중하면서 이번 이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자신이 심판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고 느낀 듯 사회자가 다른 방향의 카메라를 등지더니 화면이 전환되었다.
“피의자가 인터뷰 영상을 보고 다시 패널 여러분의 말씀 듣겠습니다.”
이지민이 이송 도중에 찍힌 영상이 나오고 화면이 나오고 자막으로 ‘나는 심판자가 되고 싶었지만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도 또 다른 심판자가 세상을 심판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굵은 글씨로 화면을 차지했다.
패널들이 너도나도 발언권을 얻고자 했지만 사회자는 그중 가장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패널을 선택해 질문을 했다.
“피의자의 발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피의자는 처음에 심판자라고 주장했다고 했습니다.”
“그럼 피의자의 발언이 전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것보다는 피의자가 언급한 심판자에 대한 여론의 방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론의 방향이요?”
“심판자는 분명 사적 보복을 하는 범죄자와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심판자가 존재하고 진짜 심판자는 정의로운 응징자라고 지지하는 의견을 가진 여론 조사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게 진짜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심판자에 대한 긍정여론이 더 큰 문제라고 보시는 겁니까?”
“네. 이건 법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아주 큰 문제입니다. 실제로 이번 식중독 테러의 피의자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습니다. 피의자는 자신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라면 거짓 진술이나 침묵 등 자기방어적 행동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전문가입장에서 피의자가 이런 행동을 한 이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피의자는 자신의 범행을 부정한 게 아니라 자신의 범행을 정당화 한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심판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끝에 화면 보시면 웃으면서 호송되고 있죠?”
“그렇군요.”
“이번 식중독 테러를 당한 이들은 대부분 일반 시민이었습니다.”
“그럼 테러를 당한 사람 중에 실제로 범죄자도 있었다는 겁니까?”
“강력범죄는 아니고 경범죄 정도였죠.”
“경범죄라면···.”
“벌금이나 과태료 처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자라고 주장하기에는···.”
다른 패널이 발언권을 요청하나 사회자는 그 패널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이건 범죄자들이 자신의 범죄행위를 미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식중독 테러의 피의자는 거짓말로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그렇게 판단합니다.”
사회자가 인이어를 꾹 누르더니 패널들을 돌아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폭탄을 터트렸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심판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심판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고요?”
방금 이지민의 거짓말로 자신의 죄를 미화하려고 한다고 주장했던 패널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심판자에 대한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다 발언권을 넘겼던 패널은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전 국회의원이자 변호사인 홍지훈 패널에게 다시 발언권 드리겠습니다.”
“심판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발언은 확인해봐야겠지만 이번 피의자의 발언이 방송을 타면서 심판자에 대한 여론이 점차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수면 위로 올라온다고요?”
“누구나 지금의 법률 구조적인 문제점을 느끼는 분들은 많지만 당장 이런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없기 때문에 그저 지켜만 보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지켜본 다라. 사실 다르게 말하면 방치인 것 아닙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작게 보면 법률 구조적인 문제점이지만 단순히 법률만 수정한다고 해서 당장 바로잡을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아 잠시만요. 네···네···.”
사회자가 인이어를 누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패널의 발언을 막고 잠시 특보를 연결하듯 음성연결이 되었다.
“원활한 진행 상황을 보여드리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심판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방금 특보로 전해드렸죠? 그 사람과 지금 전화통화가 연결되었다고 합니다.”
사회자가 매끄러운 멘트 뒤에 심판자라고 주장한 사람과 통화를 연결되었다.
“본인이 심판자라고 주장하신다고요.”
“주장이 아닙니다. 제가 심판자입니다.”
“그럼 이제까지 사라졌다고 소문이 도는 범죄자들의 신병을 구속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심판자라고 주장하시는 거죠?”
“그럼 반대로 묻겠습니다. 제가 심판자가 아니라는 건 어떻게 증명하실 건가요?”
“그럼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심판자라는 아직 사실확인조차 되지 않은 존재에 대해서 주장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심판자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다만 약자라는 입장 상 그걸 표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그 말씀은···.”
“누구나 마음속에서 범죄자들이 법적으로 제대로 심판받지 못한 사건이 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영유아를 납치해서 성적 자기 결정권을 빼앗고 거기서 더 나아가 미래를 빼앗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10년 형을 채우고 나면 아무런 제지 없이 사회를 돌아다니는 이들···음주를 해서 심신미약이라는 주장으로 사람을 죽이고도 집행유예를 받은 범죄자···언론에서 주목하는 사건이 아니라서···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지만 실제로 피해자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남기는 범죄들이 있습니다. 그에 법적 처벌이 과연 제대로 처벌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인 사건이 수도 없이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
“그런 피해자가 되었을 때···마음속에 심판자가 그들을 처단해주길 바라지 않을까요?”
“그럼···사적 보복을 하기 시작하면 지금의 사회질서는 누가 지키겠습니까?”
“사적 보복을 하고 싶어질 정도의 사회질서가 의미가 있을까요?”
“그건 심판자라고 주장하시는 분의 의견인 것 같은데···. 그럼 저 말고 다른 패널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뚜뚜뚜―.
“여보세요?”
사회자는 갑작스러운 통화단절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수습하듯 멘트를 이어나갔다.
“심판자라고 주장하던 분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잠시 광고 보고 그에 대한 패널분들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