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피해자 2>
“은수야. 엄마는 피해자기도 하지만 결국 가해자기도 했던 거야.”
“엄마···.”
“내가 좀 더 빨리 그 인간한테서 벗어났다면···.”
“···.”
“착하고 똑똑한 우리 딸···엄마가 미안해.”
“···.”
“우리 딸이 어떤 생각과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지 모르고···그때는 그저 버티는 것만 능사라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엄마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런 파탄이 나고···그런 일을 겪게 만든 거지. 엄마가 분명 그 인간한테 폭력을 당한 것도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휩싸인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내 딸을 구하지 못하고 내 인생이 나락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한 엄마도 결국 가해자였던 거야.”
“엄마···.”
“엄마가 미안해. 은수의 괴로움을 알아채지 못해서. 그 인간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도.”
“···.”
“은수가 그 일 때문에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하지만···.”
“은수 잘못이 아니야. 엄마···엄마가 잘못한 거야. 은수야. 행복하게 살아줘. 그게 엄마 평생의 소원이야.”
이제까지 똑 부러지는 의사 선생으로만 보였던 은수는 어깨를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 모습에 조춘희는 자신의 딸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녀가 운다면 그녀의 딸은 더 슬퍼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깨를 떨면서 울다가 고개를 번쩍 든 심은수의 표정을 본 조춘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무슨 수를 쓰던지 엄마를 이곳에서 꺼내고 말겠어.”
“은수야···그러지마···제발···. 엄마는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아. 나를 보듬고 안아주고 싶다고 내가 걸어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계속 생각하고 있었잖아.”
“그건···.”
“지금 같은 모습이 아닌 자유롭게 내 바로 옆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줄게.”
“···.”
“엄마도 욕심이 나잖아. 내 옆에서 내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고 싶은 거잖아.”
“하지만 엄마는···.”
“아니야. 걱정하지마.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거야.”
“은수야?”
조춘희는 은수의 표정이 온몸이 굳는 것 같았다. 그날의 표정과 똑같은 은수는 더 이상 자신이 품에 안고 지켜줘야 하는 어린 새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미의 품에서 벗어난 새가 어디로 날아갈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조춘희는 그날과 같은 표정의 은수를 불안하게 바라만 봤다.
“면회시간 끝났습니다.”
간수의 말에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벗어난다는 듯 뒤를 돌아 다시 한번 조춘희를 바라본 은수는 다시 익숙하게 차갑게 펼쳐져 있는 금속 울타리를 지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조춘희의 모습은 더 이상 떠밀려갈 곳이 없는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다음날 조춘희는 은영에게 연락했다.
이제는 최 씨에서 심 씨로 그리고 은영에서 안나로 이름을 바꾼 은영이었지만 조춘희에게는 여전히 최은영인 안나가 면회를 왔다.
“마침 한국에 있어서 바로 왔어요.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먼저 면접 요청한 적은 한 번도 없잖아요.”
“은영아···.”
“참···안나라고 부르라니까요.”
“어제 은수가 다녀갔어.”
“결국 은수가 알아챌 거라고 했잖아요. 나도 금방 아는 걸 똑똑한 은수가···.”
“은영아···은수···.”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왜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건지 몰랐는데 엄마 소식 듣고 한국에 온 건가 보네요.”
“은수···아무것도 못하게···아니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줘.”
“은수는 엄마 보려고 모든 걸 제쳐 놓고 한국에 온 것 같은데 제가 말한다고···.”
“위험해···위험하다고···.”
“그게 무슨···.”
“은수가···. 은수 표정이···.”
“은수가 평소에는 맹하다가 가끔 필 받으면 무섭긴 하죠. 그래서 난 더 대단한 것 같은···.”
“아니야. 이건···이건 안돼. 은영아 은수 데리고 제발 미국으로 가.”
“하지만 미국에서 한국으로 간다고 갑자기 말했을 때도 말렸는데 듣지 않았어요. 그것도 엄마때문이라면 이제야 이해가 가는데요. 엄마가 한국에 있는걸 알았으니까. 제가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을 텐데···.”
“이건···이건 위험해···.”
“은수가요?”
“한국은 은수한테 위험해. 그러니까. 빠른 시일 내에 빨리···.”
“그렇지만···.”
“그때 내···내가 역시 죽어야 했어. 실패하면 안 됐는데···.”
“그게 무슨···.”
“그게 아니면 방법이 없어. 은수···은수를 말려야 해.”
“은수를 말린다고요?”
“은수가 위험한 일이라도 계획한다고 말한 거예요?”
“차라리 전처럼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어.”
“···?”
“이번에는 나한테 말하지 않을 거야. 저번처럼 방해받고 싶지 않을 테니까.”
“무슨 말이에요?”
무언가를 간절하게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이내 주변을 바라보더니 간수와 CCTV가 달린 면회실을 보더니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은수···지금 말려야 돼. 은영이 너라면 진짜 엄마보다 더 엄마같이 키운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
은영이 심상치 않은 조춘희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면회시간이 다 되었는지 간수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CCTV 때문에 못 하는 거라면 고개만 끄덕이세요.”
조춘희는 은영의 말에 놀란듯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후···오늘은 면회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까. 가볼게요.”
은영은 교도소를 나서면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용수 여자교도소에서 긴밀한 대화를 나눌 방법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용수 여자교도소?”
“갑작스러운 건 아는데 급한 일인 것 같아.”
“급한 일이면 급한 일이지 급한 것 같다는 뭔데?”
“나도 그게 궁금하니까. 알아봐달라는 거야.”
“알겠어. 전화해보고 연락 줄게.”
“고마워.”
“고마우면 이번 거래 성사 기대할게.”
은영은 전화가 끝나고 화려하게 노을 지는 붉어진 하늘을 보면서 입 밖으로 퍼지는 입김처럼 흐릿해진 기억을 꺼내본다.
“저 표정···분명···.”
떠오를 듯 말 듯 신경을 거스르는 기억을 뒤로한 채 거칠게 차를 몰고 도로 사이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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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흥신소입니다.”
“나야 의뢰할 게 있는데···.”
“어이구 이건 또 무슨 번호? 도대체 네 앞으로 된 번호가 몇 개인 거야?”
“필요해서 자주 바꾸는 것뿐이지.”
“그래···그렇다고 하자고 의뢰가 뭔데?”
“용수 여자교도소에서 긴밀하게 재소자하고 대화를 나눴으면 하는데 가능한가?”
“알아보기는 할 건데 기대는 하지 말라고.”
“···?”
“용수 여자교도소 소장이 아주 까다롭기로 유명하니까.”
“그렇게나?”
“거기는 영치금이 많아도 외부 물품 넣기가 힘들 정도로···.”
“그럼 개인적인 대화도 불가능한 건가?”
“변호사 접견이라면 가능하겠지.”
“변호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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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용수 여자교도소의 간수며 죄수들이 전부 한 곳만 바라보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변호사 접견 신청했는데요.”
“아···여기 서명해 주시면 돼요."
“아···네.”
간단한 이름과 주소지 연락처를 적는데 뒤에서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자 개인연락처가 아닌 사무실 연락처를 적어넣었다.
뭔가 아쉽다는 듯 실망한 표정의 간수가 면회실을 비워주면서 주의를 주었다.
“살인죄로 구속된 재소자인 점 주지하시고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큰 소음을 만들어서 구조요청해 주세요. 제가 바람같이 뛰어올게요.”
“아···감사합니다?”
남자는 당혹스럽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차가운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 문이 열리면서 초췌한 얼굴을 한 재소자가 변호사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당황했다는 듯 당혹감 섞인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변호사 문종혁이라고 합니다.”
“어···저는···.”
“알고 있습니다. 항소절차가 끝난 상태라는 걸요.”
“···.”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사건이지만 사실 저도 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웃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 성함은 문 진자 명자 입니다.”
“설마···그 교수···댁 아드님?”
“기억하고 있으시군요.”
“그때 정말 작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컸네요.”
“···.”
“그런데 전 변호사 요청한 적 없는데···.”
“전 안나 씨의 요청으로···”
“저는···억울하지 않아요.”
“네?”
“저는 유죄입니다.”
“하지만 피의자인 최제인씨에게 가혹한 구타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제가 남편에게 맞고 산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제가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남편을 살해한 건 접니다. 제 죄입니다.”
“아···그러니까. 유죄를 인정하신다는 거죠?”
“네.”
“그렇지만 피의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당시의 판결이 너무 가혹했다면···.”
“저는 제 사건이 다시 언론에서 거론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습니다.”
“···?”
“제 딸들···그 당시에도 언론에서 보도된 사건에 대한 선정적인 기사 때문에 고통받았습니다. 다시 죄를 지은 저 때문에 딸들이 고통받는 걸 다시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
“아이들 제 딸은 죄가 없습니다. 그저 부모를 잘못 만나서 고생한 것밖에 없죠. 그런데도 훌륭하게 커서 각자 이제 행복한 삶을 살 기회를 잡았는데 제 알량한 욕심에 시끄럽게 해서 아이들에게 불똥을 튀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따님들도 어머니가 곁에 있는걸 원할 텐데요?”
“전 아이들 곁에 설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죄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