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피해자>
하늘이 너무 맑고 깊어서 뛰어들고 싶은 맑은 날 찬란한 걸 넘어서 눈이 부신 햇살을 가르며 걷고 있는 늘씬한 여성이 지나가고 있었다.
주차장에 늘어선 차들을 가로질러 나타난 건물 로비로 들어서자 익숙한 듯 인사를 건네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1층, 2층, 그리고 3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표시되어 있는 문구가 이 여성의 직업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정신의학과.
간호사가 다가와 진료실로 들어가려는 여성을 따라오면서 말했다.
“선생님 오늘 환자분이 갑작스럽게 시간을 바꿔서 오전에는 진료예약이 없어요.”
“그럼 긴급상황 발생하면 호출해요.”
여성은 진료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진료실에서 나서서 아직 3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기다렸다는 듯 간호사들이 모여있는 접수대에서 말이 나왔다.
“심은수 선생이 진료하는 환자들은 한 번씩 예약을 펑크내더라.”
“은수 선생 평가를 설문하면 전부 좋은 말만 쓰면서 왜 예약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거지?”
“그냥 노쇼 인 거 아냐?”
“그렇다기에는···.”
“왜?”
“아니야. 그냥 내가 너무 예민한 것 같아서.”
“말하다가 마니까 더 궁금하잖아. 왜 뭔가 느낀 거야?”
“객관적으로 은수 선생 대단하잖아. 젊은 나이에 전문의가 된 것도 놀라운데 상담하는 내담자마다 전부 은수 선생이 아니면 진료도 거부하고.”
“원래 처음 만난 의사 선생하고 라포 형성돼서 그런 거 아니야?”
“아니야. 현미숙 과장이 육아휴직으로 쉬기 전에 왔던 내담자도 은수 선생이 더 좋다고 현미숙 과장이 복귀해도 은수 선생하고 상담하고 싶다고 예약시간 조정하고 갔는걸?”
“그럼 미국에서 배운 심리상담기술이 더 좋아서 그런 거 아니야? 솔직히 한국은 정신과라고 하면 다들 거부감 느끼잖아.”
“그건 그렇지만···.”
“병원 밥만 10년 넘게 먹고 있는데 뭔가 걸리는 게 있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뭐가 마음에 걸리는데??”
“어제도 그···.”
“미친×?”
“···그래도 우리 병원 환자인데 미친×이 뭐냐?”
“솔직히 내가 간호사만 아니었어도 비명 지르면서 도망갔을걸?”
“흠흠···미친···흠 아니 그 내담자가···.”
“정신과에서는 환자를 내담자라고 하나보네?”
“아무래도 정신과 환자라고 하면 거부감 느끼니까.”
“그게 중요해? 그래서 그 미친× 아니 내담자가 왜?”
“처음에는 날카로운 경계성 성격장애 정도로 봤거든···그러니까. 드라마에서 악다구니 쓰는 사모님정도?”
“멀리서도 알법한 성격이네. 그런데 왜?”
“상담평가는 좋은데···내담자 상태가 갈수록 크게 변화한다고 할까···뭐 내가 전문의는 아니니까. 그런데 현미숙 과장이 담당일 때는 상담 전후를 봤을 때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거든.”
“그럼 현미숙 과장이 실력이 없어서 그런 것 아냐?”
“그냥 현상 유지···악화되지 않게끔 그 정도 효과?”
“그게 무슨 치료야.”
“내가 내과에서도 심장 전문의 선생 예약 담당하는 거 알지?”
“우리나라에서 심장 전문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선생이잖아.”
“그런데 수술해서 나아진다 보기보다는 현 상황에서 악화되지 않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정도 만 치료를 해.”
“왜? 기능이 더 좋아져야 치료인 거 아니야?”
“더 좋아지면 물론 좋지만···이미 아파서 온 사람을 치료한다는 게 더 악화가 안되게 유지하는 것도 벅찰 경우가 있거든.”
“그럼 현미숙 과장은 그 미친×이 더 악화가 안 될 정도만 유지하고 있었다는 거네?”
“내가 옆에서 볼 때는 그랬거든···.”
“그런데 지금은 눈에 띄게 바뀐 거야?”
“심은수 선생한테 진료받기 시작하면서 웃기도 하고 친절하게 말도 걸기는 하는데···.”
“그럼 은수 선생이 현미숙 과장보다 실력이 더 좋아서 그런 거 아니야?”
“그게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
“분명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친절하게 비타민 음료를 건네주는데···.”
“비타민 음료?”
“그런데 그 비타민 음료 버렸어.”
“왜? 아깝게 안 먹을 거면 간호사 휴게실에 가져다 놓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왜?”
“무서워서···.”
“무섭다고?”
“그전에 현미숙 과장에게 진료를 받을 때는 그저 저 사람 성격이 날카롭구나···좀 우울해 보인다는 인상이다···그렇게 생각했는데···.”
“···.”
“비타민 음료를 건네면서 입은 웃고 있는데···눈은···.”
“눈은?”
“뭐라고 표현은 못 하겠는데 너무 무섭더라고···.”
“그러니까. 은수 선생한테 진료받은 미친×이 진짜 미친×이 된 것 같다는 거야?”
“아니···그렇다기보다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태가 좋아진 것 같은데···. 현미숙 과장이 그런 적 있거든 내담자들이 상담 중에 갑자기 상태가 호전되어 보이는 증상을 보이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고···.”
“호전되면 좋은 거 아니야?”
“아···응급실에서도 긴급상황인데 환자 상태가 안정화돼서 이송했다가 뒤통수 맞는 경우가 있지.”
“미친 아니 내담자가 난동부리면서 들어왔던거 기억하지?”
“완전···정신과가 기피되는 이유를 알겠더라.”
“심은수 선생이 나타나니까. 난동부리던 내담자가 정지 버튼이 눌린 로봇처럼 멍하니 서 있는데 소름이 돋더라고.”
“뭐? 정신과 의사는 그런 것도 가능해?”
“그런 게 가능하면 내가 이렇게 놀랐겠어?”
“의사가 환자를 잘 다루면 좋은 거 아니야?”
“너희도 진상 환자 몇 번이나 경험해보면서 느꼈잖아.”
“마음처럼 안된다?”
“그래. 폐암으로 들어온 환자가 몰래 담배 피우는 걸 봤을 때는 정말 눈앞이 노랗더라.”
“그런 간호사 말을 듣지 않는 환자···그러니까. 어쨌든 신체는 멀쩡한 정신과 내담자가 심은수 선생 한마디에 멈추는데···.”
“실력이 대단해서?”
“아무리 실력이 대단해도···.”
“미국에서 배웠다니까. 우리가 모르는 기술이 있는 거겠지.”
“그렇지만 한 시간씩 상담받는 내담자도 그러는데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는 나도 저렇게 되는 건 아닌지 공포스러울 정도였어.”
“은수 선생하고 상담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기는 한데···.”
“그런데 은수 선생 출근하는 것 같더니 바로 나가던데?”
“아···오전 예약한 내담자가 오늘 못 온다고 일정이 바뀌었거든.”
“정신과는 이게 좋네. 예약했던 사람이 없다고 하면 담당의가 자리를 비워도 되고.”
“다른 전문의들은 긴급상황 발생할까 봐. 다들 멀리 가지도 못하잖아?”
대화를 나누는 간호사들은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예약이 아닌 첫 진료를 위해서 방문하는 방문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사고를 할 수 있는 경로가 막힌 것처럼 긴급 상황에 대해서만 대화를 나누다가 익숙하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성이 탄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간호사들의 대화가 끝나고 여성은 자신이 주차한 이중주차된 차를 타고 익숙하게 지하주차장에서 병원 입구로 운전하기 시작했다.
이중주차된 차는 금방 이 자리를 벗어날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주차되어 있었다.
한참을 주행한 차가 도착한 곳은 평범한 곳이 아니었다.
용수 여자교도소
끼릭―.
여성은 익숙하다는 듯 냉랭한 철창 사이를 걷더니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가 놓인 곳에 도착했다. 이미 상대는 자리에 나와 있었는지 멀리서 걸어오는 여성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성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주름지고 비쩍 마른 손으로 여성의 하얀 그렇지만 따뜻한 손을 꽉 쥐면서 말했다.
“은수야···.”
여성은 한참 말이 없다고 입을 열었다.
“엄마.”
“이렇게 자주 안 와도 된다니까.”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얼굴도 못 봤잖아. 언니는 왔다 갔어?”
“한국에 올 때마다 들려서 영치금도 넉넉하게 주고 가.”
그렇게 두 모녀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은영이 미워 하지마. 전부 내 부탁이었어.”
“···.”
“그리고 여기 있지 말고 미국으로 가···. 한국은···.”
“엄마 죽었다고 했을 때···.”
“···.”
“은영 언니가 엄마라고 생각하고 언니가 하는 말은 전부 그대로 따랐어. 공부하라면 하고 친구 만들라면 만들고 밝게 웃으라면 웃고···.”
“은수야···.”
“그런데 엄마가 죽었다고 자살했다고 거짓말 한 사실을 알게 되니까.”
“은영이는···.”
“엄마하고 언니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는 짐작이 가지만 만약 내가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엄마의 항소 기회를 날리지 않았을 거야.”
“···.”
“언니가 말한 의사가 아닌 변호사가 돼서 엄마 편에서 엄마를 위해서 싸웠을 거야.”
“···.”
“그런데 난 의사가 되고 엄마는 다시 사법적 판단을 받을 기회조차 없어졌어···그런데!”
“은수야···.”
“난 아무것도 모르고 미국에서 잘먹고 잘살고 엄마는!”
“엄마는 은수가 잘 지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그래서 엄마가 은영이한테 부탁한 거야. 아무것도 모르게 해달라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어떻게 엄마가 나 때문에.”
이제까지 한없이 자애롭기만 했던 은수 엄마, 조춘희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어지더니 큰 소리를 쳤다.
“너 때문이 아니야.”
얼마나 힘을 주어 손을 잡고 있었는지 은수의 손등에 할퀸 자국이 남았지만 이제까지 딸을 자애롭게 보던 어머니가 아닌 상처 입은 짐승처럼 거칠게 외쳤다.
“너 때문이 아니야. 이건 엄마···엄마가 잘못한 거야.”
“엄마···.”
“엄마는 은수만 행복하다면 다 괜찮아.”
“··나는···.”
“은수야. 엄마하고 약속했잖아.”
“···.”
“엄마는···.”
“왜···. 나한테 죽었다고 한 거야?”
“사실 은영이도 내가 자살한 걸로 알고 있었어. 자살시도한 게 거짓말도 아니고···. 다만 죽기 전에 내 딸이 예쁘게 자라서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한 신부가 되는 거···내 딸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는거···그걸 한번···멀리서라도 아니 소식이라도 듣고 싶은 욕심에···. 산 거야.”
“그게 어떻게 욕심이야. 그건···.”
“은수야. 엄마는 피해자기도 하지만 결국 가해자기도 했던 거야.”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