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심판자>
수항원 원장를 만나러 간 날 이후로 금고가 열리지 않고 있다.
‘혹시···.’
답답한 마음에 올려다본 하늘 위로 구름이 자로 잰 듯 늘어서 있다.
고민이 길어지는 나와는 다르게 하늘을 가르며 지나가는 항공기들의 꼬리 끝에서 시작되는 것 같은 구름이 늘어지듯 수놓아진 하늘은 어제와 다른 날의 시작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인천공항 주차장으로 짐가방을 밀며 들어오는 익숙한 인영에 반갑게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인사를 건넨다.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
“오랜만이네. 이번에는 얼마나 있을 예정이야?”
처음의 어색했던 만남이 무색할 정도로 긴 시간만큼 우리의 대화도 익숙함이 묻어났다.
“한 달 정도?”
“이번에는 꽤 오래 있네?”
“동생이 일하는 병원 근처로 숙소를 옮긴다고 하더라고···집 구하고 이사할 때까지는 옆에 있을 계획이야.”
“동생이면···.”
“은수는 나하고는 다르게 이름 안 바꿨어. 국적도 한국국적이야.”
“미국 국적으로 안 바꾸고?”
“나야 사업 때문에···은수는 한국에 계속 돌아가고 싶어했으니까. 결국 혼자만의 힘으로 해낸거고···.”
“동생이 한국에 있으면 안나도 이제 한국에 들어오는 건 어떻게 생각해?”
“한국이 나를 받아줄 수 있을까?”
‘아직도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이 발목을 잡는 걸까?’
나는 안나의 대답에서 내가 미쳐 알아차리지 못한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할 말을 고르는 사이에 안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은수 일하는 병원으로 바로 가줄래? 깜짝 방문하고 싶어서.”
나는 안나의 생각이 깊어지는 옆모습을 보면서 은수가 일한다는 시내 중심의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깜짝 방문을 한다는 안나가 먼저 차에서 내리고 번잡한 주차공간에서 주차자리를 찾아 주차장을 한 바퀴 돌 때였다. 한군데 난 주차자리를 보고 차를 그쪽으로 향하는데···반대 방향에서 무서운 속도로 치고 들어오는 차를 피해 급정거를 해야 했다.
‘뭐지? 단순한 난폭운전인가?’
주차도 대각선에 가깝게 한 사람이 급박하게 차 문을 열고 나가자 나도 이중주차를 하고 운전석에서 내려서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여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운전 미숙이라기보다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혹시라도 부축해야 할지 걱정되는 마음에 뒤따라서 걷기 시작한지 몇 분 뒤에서 따라오는 발걸음에 놀랐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달리기 시작하는 여자를 쫓아가다가 오히려 상황이 악화가 될 것 같아서 난 발걸음을 멈췄다.
‘오해한 건가?’
생각이 깊어지기도 전에 안나에게서 전화가 와서 주차했던 차를 타고 병원 밖으로 향해야 했다. 중간에 픽업한 안나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지만 생각이 많아 보여서 질문하지 않고 익숙한 호텔로 향했다. 도착하고서도 말이 없자 짐을 내리면서 말을 건넸다.
“깜짝 방문으로 놀래주겠다더니 표정이 왜 그래?”
“난 동생이 그런 심각한 환자까지 보고 있는지 몰랐어.”
“심각한 환자라고?”
“미국에서처럼 개인상담실에 환자라고 하지만 사실상 상담인 하고 마주하고 대화하면서 치료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오늘 본 건···.”
“붉은 원피스 입은 환자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붉은 원피스? 선글라스 낀?”
“어떻게 알아?”
“주차하다가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난 응급실로 향하는 줄 알았는데.”
“상담실로 거의 뛰어들 듯이 왔어. 내가 깜짝 놀라니까. 은수가 예약된 환자라면서 나중에 보자고 하는데 은수가 원래 속이 깊고 침착한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왜?”
“그 여자 좀 미친 것 같았거든···.”
“미친 것 같았다고?”
“자기가 살인을 했다고···결국 해냈다고 하면서 웃는데 정말···. 난 은수가 하는 일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거든? 같은 의사라고 해도 정신과 의사는 피를 보는 일이 아니라고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사라고?”
“미국에서···그런데 갑자기 한국에 가겠다고 해서 나도 놀랐어.”
“여기서 좋은 기억이 없지 않나?”
“그런데 가고 싶다는데 막을 이유도 없으니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미국에서 차별 받았던 게 아닐까 걱정도 되고···.”
“차별?”
“인종 차별···.”
“···한국이 같은 인종이 사는 나라지만···차별이 미국이나 다른 나라보다 적다고 할 수는 없는데?”
“은수는 나보다 더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왔으니까. 향수병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크게 만류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하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지금은 안나라고 익숙하게 부르지만···
모든 게 어색하고 처음이던 은영 누나이던 시절···
나에게 투자금을 받았다고 하지만 안나가 굳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은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라면 돈도 많이 벌고 젊은 나이에 주변에 자신을 만류하는 어른도 없는 상태라면 약물이나 술 아니면 화려한 파티에서 스스로 중심을 잡고 버틸 수 있었을까?’
은수라는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은영 누나는 안나로서 삶을 훌륭하게 버틸 수 있었고 동시에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인데?”
“이제 1년쯤. 나한테는 10년 같은 기간이지만 은수는 아무렇지 않아 해서 가끔 서운하기도 하고.”
안나가 자주 이용하는 호텔을 예약해 놨기 때문에 바로 방으로 올라올 수 있게 체크인까지 마친 상태였다.
짐을 올려두고 나온 후 익숙하게 목적지를 정했다.
안나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곳···오래된 가게 특유의 묵직한 음식 내음과 함께 새롭게 자리한 의자와 탁자는 가게의 외관과 다르게 새것으로 보였다.
“뭐야. 이제 여기도 좌식이 아니라 입식 자리가 생겼네?”
“그러게. 여기에 앉을까?”
자리를 잡고 익숙하게 곰탕을 주문한 안나가 나를 보면 무척 그리웠다는 표정으로 가게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여기 담백한 곰탕이 그렇게 생각나더라.”
“그렇다고 이번에도 한 달 동안 내내 곰탕만 먹지는 말고 그러다가 은수 또 도망간다.”
“은수는 음식 투정도 한번 안 하고 미국에서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한식을 아무리 좋아하는 경수라도 한 달 동안 곰탕만 먹으면 도망갈 것 같았지만 안나에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은수가 한국에 오고 싶어 한 건 안나가 잘해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은수가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겠지. 그러니까 오늘 병원에서 본 그 이상한 사람처럼 상담이 힘들어도 전문가답게 일하는 게 아닐까?”
“난 은수가 좋은 곳에서 좋은 걸 먹고 마시면서 편하게 살면 좋겠는데···.”
“그건 안나가 바라는 거고 은수가 하고 싶은 걸 막지 않겠다며?”
“그런가?”
나에게 복잡한 웃음을 보여주면서 맛있게 곰국을 먹고 있는 안나 앞으로 내 몫으로 나온 곰국을 밀어줬다.
사양하지 않고 복스럽게 먹는 안나의 모습은 간간이 언론에서 비출 때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 보였다.
‘이쪽이 좀 더···.’
드르륵―.
진동으로 해놨던 핸드폰이 탁자를 울리자 나는 안나가 신경 쓰기 전에 재빠르게 잡아채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역시···.’
휴대폰을 통해서 확인함과 동시에 심판자에 대한 심층 취재를 오늘 방영한다는 내용이 TV를 통해서 나오고 있었다.
2인분의 곰탕을 순식간에 해치운 채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하던 안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한국의 배트맨 같은 거야? 심판자가 정말 있다고?”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믿고 싶어서 믿는 거겠지.”
“하지만 심판자에 대한 영상까지 있다고 하잖아?”
“제대로 된 영상이라면 벌써 경찰에서 조사하고 있지 않을까?”
“그럼 조작이라는 거야?”
“조작까지는 아니어도 제대로 된 영상은 아니라는 거겠지.”
‘수항원 원장도 모르게 취재를 하고 있었나?’
초록 흥신소를 통해서 알아본 내용으로는 제대로 된 모습이 찍힌 영상은 없고 뒷모습만 찍힌 영상만이 있다고 전해왔다.
‘이게 찍혔다는 영상의 풀버전인가?’
휴대폰으로 확인한 영상은 깜깜한 숲 전경 사이로 저택 모습이 멀리 잡혀 있는 상태로 변화가 없었다.
순간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순식간에 지나가고 카메라 시야가 갑자기 흔들린 것처럼 화면이 어두워졌다가 이전화면과 차이 없는 영상이 전부였다.
‘이걸로는 뭔가 특정하지는 못할 텐데···.’
내가 심판자라는 단서는 될 수 없지만···갑자기 금고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이 상황이 이 영상과 관련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이 장면이 이슈가 되면 될수록 내가 금고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금고를 사용하는 영상이 찍힌 건 아니었지만···금고를 열지 못하는 제약에 영향을 준 것이라면···정확한 건 대백공을···만나서···확인해야.’
상념이 깊어지려고 할 때 안나가 투자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금고가 열리지 않는 이상 현상이 언제까지 될지 예상할 수 없는 걸 생각하면 언제 금고에 넣어둔 현금을 꺼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투자금이 생겼다면서? 나야 투자금이 더 들어오면 좋지···.”
“그런데 갑자기 묶여서 당장은 어렵겠네.”
“하긴 자금회수가 그렇게 쉽지는 않지.”
“···.”
“그때 갑자기 골드 코인으로 준비해 달라고 해서 나도 곤란했다고.”
“운영하기 시작한 암호화폐 거래소 통해서 처리했으면 편했을 텐데?”
“네가 타 거래소에서 들어오는 암호화폐는 인증을 거치도록 보안에 더 신경을 썼잖아?”
“신뢰 있는 거래소만 나중에 살아남을 테니까.”
“그래도 초기에 무리해서 거래소 열었다면···수익률이···.”
“덕분에 해킹에 취약해서 바로 미래가 불투명했겠지. 거기다가 거래소가 해킹된다면 여기저기 고소만 몇 개나 물려있겠는데?”
“아쉬워서 그렇지···아쉬워서···시장선점 효과를 놓치게 된 거잖아.”
“늦게 시작하더라도 신뢰가 있는 거래소여야 돼. 그래야 믿음이 생기고 그게 곧 수익으로 나타날 테니까.”
“알겠다고···.”
“그런데 네가 투자금 때문에 바쁜 시간 낸 건 아닐 거고···.”
곰탕을 다 먹고 일어난 후 차에 타면서 묻자 이제까지 변죽만 울리던 안나가 말했다.
“저번에 추천해서 투자한 오픈마켓 말이야. 대기업 유통사 쪽에서 천억에 넘기라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할지 고민이라서.”
“우리가 가진 전체 지분을 넘기라는 거야?”
“아무래도 그러니까. 그런 금액을 부른 거겠지.”
“유통망 자체가 돈이 되는 시기가 올 거야. 뭐 우리가 유통 쪽으로 손을 넓힐 이유는 없지만···.”
“어디까지나 투자의 관점에서 생각해야지. 처음 들어간 투자금을 생각하면 100배 이상의 수익이긴 해.”
이대로 오픈마켓을 유지해도 안정화된 유통망 덕분에 연간 수익이 매년 우상향을 그리면서 늘어나고 있었다.
‘내 판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