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익숙하지만 변해가는 것 2>
잘 꾸며진 아파트 단지 내를 지나서 익숙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띵―.
도착하면 엘리베이터에서 바로 몸을 왼쪽으로 돌린다.
현관문은 단단하고 안전하게 외부와 우리집 을 막아서고 있다.
‘단단하고 안전하게라···.’
이전처럼 바람이 심하게 불 때 덜컹거리던 현관문과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들리던 귀에 거슬리던 소음 반지하 특유의 지하실 냄새와 곰팡이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흰 벽지와 검은색으로 포인트를 준 깔끔하면서 세련된 외관이 나를 반긴다.
“다녀왔습니다.”
주신이는 기주네에 놀러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편의점을 관리하느라 보이지 않는다.
익숙하게 욕실 문을 열고 샤워하고 타월을 목에 걸고 거실로 나와본다.
씻고 나와서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는다고 감기 걸린다고 잔소리하는 목소리가 보이지 않는다.
학교에서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놀아달라고 하는 목소리가 보이지 않는다.
익숙하다.
‘아니 익숙해지는 건가?’
묘한 감정을 내리누르면서 자리에 앉아서 익숙하게 전화번호를 누른다.
어머니하고 연락이 안 돼서 발을 동동 구르던 게 얼마 전인 것 같은데···.
고등학생이지만 사실 진짜 고등학생이라고 할 수 없는 나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많은 것을 바꾼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뚜르르―.
“여보세요? 주인이니?”
“네.”
“냉장고에 김치찌개 해서 넣어놨으니까. 반찬 꺼내서 데워서 먹으렴.”
“알겠어요. 엄마는 식사하셨어요?”
“엄마도 먹어야지.”
“그럼 같이 먹어요.”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이 새로 오는데 그때까지는 편의점 지키고 있어야지.”
“아···이번에 또···새로 바뀐 거예요?”
“저번까지 도와주던 영석이가 이번에 복학하면서 새로 구했지.”
“힘들면 제가 나갈까요?”
“아니야. 몇 시간만 있으면 새로 구한 친구 올 거야. 걱정하지 말고 식사 챙겨야지. 시간대 놓치면 건강에 안 좋아.”
‘어머니는···.’
내가 반문하려고 할 때 편의점에 누군가 들어왔는지 어머니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어두워진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생각한다.
‘쉽게 연결되는 건 쉽게 끊기는구나···.’
김치찌개를 냉장고에서 꺼내 데우고 따뜻한 밥을 한 공기 퍼서 먹는데···
같은 김치찌개, 같은 밥이었지만 전혀 다른 맛이었다.
나는 누군가 나의 뒤를 쫓아오는 것처럼 급하게 한 입 먹고 먹었던 식기를 씻어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제자리라···.’
나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외투를 걸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저 멀리 붉은 기운이 땅에 닿아 녹아들 듯이 붉게 물드는 것 같은 길 위로 단지에서 가까운 편의점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딸랑―.
“어서 오세···. 주인아?”
“아직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은 안 온 거예요?”
“원래 약속한 시간 되려면 아직 멀었는걸”
“면접은 엄마가 본 거예요?”
“영석이가 괜찮은 친구 같다고 하더라.”
“그래? 이번에는 좀 오래 해주면 좋겠다.”
“그런데 집에서 쉬지 왜 또 내려왔어.”
“엄마는 밥 먹었어요?”
“편의점에 도시락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편의점 계산대 옆 쓰레기통에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 포장지가 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모르는 척 어머니 옆으로 갔다.
“오늘 몇 시간이나 편의점에 있었던 거에요?”
“별로 안 있었어.”
“다리 아프지 않아요?”
“엄마는 이 정도는 끄떡없어.”
어머니와 대화 하다 보면 가끔 생각한다.
어머니란 존재는 거대하고 단단하며 언제나 강철같이 버텨줄 것만 같다고···
하지만 내가 나이가 먹고 사회에서 생활하다가 나이든 어머니를 보게 되면
그저 어머니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대한 버티고 버티기에 급급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미리 선배가 어머니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서 놀랍지만 그래도 왠지 싫지 않았다는 게 아닐까?
딸랑―.
긴 생머리에 청바지에 움직이기 편한 패딩을 입은 여자가 편의점에 들어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를 알아보는 것 같은데···누구지?’
“주인이?”
“설마···너···.”
“내가 왜 여기에?”
“오늘부터 아르바이트하기로 한 학생?”
나와 지혜 그리고 어머니까지 서로를 바라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리고 나와 지혜는 편의점에서 쫓겨났다.
‘어머니가 결국 밤늦게까지 하시는 건가? 괜히 편의점을 추천할 걸까?’
갖은 생각을 하다가 내 옆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지혜를 보면서 침묵이 길어졌다는 생각에 말을 걸었다.
“오늘부터 아르바이트 하겠다는 게 넌 줄 몰랐어.”
“나도 네 어머니가 하시는 편의점인 줄 몰랐어.”
“나 때문에 아르바이트 못 하게 돼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시간이 늦었으니까 집에 간다는 말을 하려고 할 때 익숙해진 두통과 함께 시야가 반전되었다.
사람이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자주 찾지 않는 아웃렛의 전경이 눈에 담긴다.
익숙하다는 듯 사람들을 매대로 이끄는 지혜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감정까지 동화되지는 않았구나···.’
내가 지혜의 기억을 읽는 사이에 배경이 바뀌어 휴게실로 보이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지혜야. 내가 널 좋게 생각해서 주는 기회야 한번 해볼래?”
“네?”
지혜가 일하는 매대의 점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사람 좋은 모습으로 지혜에게 무언갈 권하고 있었다.
‘감정 동화가 안되면 편하기는 한데 제대로 사건이 인식되지 못하는 건 불편하네.’
언제 기른 건지 길어진 생머리를 질끈 묶은 지혜가 아웃렛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피해 다니는 지하의 창고에 내려가서 먼지 쌓인 상자들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읏차···이거 옷들이 이월상품이라서 그렇지 상태는 나쁘지 않은데···.”
지혜를 고민하듯 비닐에 쌓여 있는 옷으로 보이는 것들을 종류별로 하나씩만 들고 창고에서 빠져나왔다.
아웃렛에 있는 공용 PC로 무언갈 하는 듯 분주한 손놀림 뒤로 마네킹에 입혀진 세련된 착장에 시선이 간 사이 장면이 바뀌었다.
“지혜 씨, 그건 아니지.”
“하지만 점장님 저한테 창고 정리를 부탁하셨잖아요.”
“···.”
“그리고 잔뜩 쌓인 이월제품을 정리한다고 창고 공간이 늘어날 리 없으니까. 제가 아웃렛 홈페이지를 통해서 이월 상품을 팔아서 재고 정리를 한 건데···. 왜 절 갑자기 쫓아내시는 거죠?”
“무슨···. 함부로 우리 브랜드 제품을 팔았으니까. 월권 남용이지.”
“세일 기간에 재고상품의 정해진 할인율에 따라서 판 것뿐인데···.”
“나한테 보고를 해야지.”
“분명 창고 정리하면서 재고상품을 할인가격에 판다고 말씀드렸어요.”
“몰라 몰라. 난 들은 기억 없으니까. 당장 오늘부로 그만둬줘야겠어.”
“점장님!”
“자꾸 이러면 경찰 부를 거야.”
“···.”
화를 내도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 지혜를 억울한 듯 애먼 입술을 씹으면서 돌아 나올 수밖에 없어 보였다.
그녀가 가는 길 사이로 다른 브랜드의 매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재고 정리 잘했다고 본사에서 인센티브까지 받았으면서 그게 자신이 아닌 아르바이트생이 했다는 게 밝혀질까 봐 아르바이트생부터 자른 거 아냐?”
“그러니까. 아르바이트 하면서 괜히 나서서 고생할 필요가 없다니까.”
“열심히 해봤자.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지.”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있는 곳을 노려본 지혜였지만 고개를 돌리고 뛰듯이 아웃렛 밖으로 향했다.
발아래에서 누군가 나를 잡아끄는 듯한 아찔한 느낌과 함께 찬바람을 맞으면서 나를 바라보는 지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 때문에 아르바이트 못 하게 돼서···.”
“중고등학생은 안된다는 거 알고 있었어. 대학생이라고 속인 건데···. 그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어쨌든 나랑 마주쳐서 못하게 된 거잖아. 아르바이트.”
“괜찮아.”
괜찮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지혜였지만 기억 속에서 봤던 지혜의 모습을 생각하면 전혀 공감되지 않는 말이었다.
“나 때문에 아르바이트 못 하게 된 것 같은데 내가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응?”
“저번에 아웃렛에서 보니까 너 옷가게에서 일하던데.”
“옷가게라니 그래도 이름있는 브랜드 매대라고.”
“하하···. 내가 그런 쪽으로 잘 몰라서···내가 아는 사람은 옷에 되게 관심이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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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한테 연락한 거야?”
“그렇게 된 거죠. 앞으로 유망한 사업이니까. 그리고 그쪽으로 능력도 있는 친구니까.”
“그래서 내 여자친구가 하고 싶은 일을 지원해달라?”
“안나, 제 여자친구 아니라고요.”
“같은 학교 같은 학년 여자친구가 아니면 뭔데? 아···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여자 사람 친구?”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어쨌든 개가 인터넷을 통한 의류 판매에 소질이 있다는 거지?”
“네, 자세한 건 말해주지 않아서 모르지만···그 친구가 일하던 브랜드에서 이월제품을 인터넷에 올려서 재고정리를 했나 봐요. 그게 너무 잘 돼서 그 일에 대한 인센티브를 지혜한테 주기 싫어서 자르고요.”
“제대로 된 지원이 없는데도 눈에 띄는 성과를 냈다는 거니까···.”
“저번에 이야기하던 쇼핑몰 창업에 도움이 될 친구죠.”
“음···.”
“···.”
“좋아 어차피 비용 대비 수익이 내가 예상하고 있는 대로면 놀라울 정도인데···안 할 이유는 없지. 거기다가 비용도 내가 받을 지분 수익에서 전부 지원한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궁금한 점은 거기에···왜 내 도움이 필요한 건데?”
“갑자기 동급생이 그것도 자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못 구한 것 같다고 사업같이 하자고 하면 안나 같으면 같이 하겠어요?”
“그것도 그러네.”
“지혜를 돕고 싶다는 마음도 충분히 있지만···앞으로는 대면으로 판매하는 물품보다 비대면으로 팔게 되는 물품의 유통량이 많아질 거예요. 그걸 생각하면 충분히 투자할만하죠.”
“좋아. 하지만···지금 한국에 들어가면 한겨울이잖아.”
“겨울 싫어해요?”
“싫지 그럼 좋겠어?”
“좋게 생각해요. 겨울이라서 가능한 스포츠 스키라던가···.”
“스위스에서 타는 게 더 좋거든?”
“그럼 산악캠프?”
“미친 겨울에 산에 올라가라고?”
“하하···.”
“돈이 된다고 하니까 내가 한국 간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업성 없으면 비행기 표 한 장 내 식대 하나까지 비용처리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건 사업성이 있든 없든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하여튼 그럼 오랜만에 얼굴 보겠네. 이번에 들어간 김에 입주자들한테 인사라도 해야겠어.”
“건물주가 나타났다고 하면 안 좋아할 텐데요?”
“그래도 한 번씩 얼굴 보이면서 내가 지켜보고 있다고 압박을 해줘야지···기대 중인 코인 거래소도 빨리 나오지 않겠어?”
“하긴 코인 거래소가 빨리 생겨야 좀 더 편하게 자금융통이 가능하기는 하겠네요.”
“그럼 한국에서 보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