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사랑의 조건 : 그 여자>
나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화책은 신데렐라다. 재투성이 어린 소녀가 왕자님과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것처럼 답답한 나의 일상을 바꿔줄 왕자님이 언젠가 나에게 나타날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고?’
“우리 영희는 어떻게 이렇게 예쁠까.”
‘나는 예쁘니까.’
“하하···. 웃어보렴. 아빠하고 말해봐.”
“엄마라고 말하는 게 먼저죠.”
‘어렸을 때 아빠와 엄마가 다투듯 나를 품에서 떼지 않고 읽어주던 동화책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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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예쁜 아이네요.”
“어머, 어머, 아역 배우 같은 연예인 시켜도 되겠어요.”
“우리 영희를 그런 딴따라나 시킬 수는 없죠.”
“하긴 숙희 여사가 어련히 꽃길 마련하시려고요."
“저번에 모임에 영희 데리고 갔다가 영희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하던데. 약혼 안 시킬래요?”
“아직 영희가 어리니까 조금 보고요.”
“하여간 숙희 사모님 수완이 대단하다니까.”
“하하···. 우리 딸이 어디 빠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여유 있다가 엄한 놈팡이한테 걸리면 어쩌려고요?”
“우리 영희는 착해서 부모 말 잘 들어요.”
“어머 어머 사춘기도 없이 컸다고 자랑하시는 거예요?”
“참 착하고 예쁘고 말도 잘 듣고 최고 며느리감이죠.”
나를 둘러싼 아줌마들이 입 입 입···.
머리가 아프다.
나는 나를 둘러싼 아줌마들과 그런 아줌마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엄마의 행동에 무표정한 얼굴에 짜증이 올라올까 봐 신경이 곤두섰다.
‘동화처럼 백마 탄 왕자님이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까?’
그런 나의 기대를 배신하듯 아무도 나를 이 사모들 무리에서 구하러 오는 용기 있는 남자가 없다. 나는 엄마에게 피곤하냐는 표정으로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경제인의 밤 익숙한 얼굴들 사이로 미끄러지듯 이동한다. 지겹지만 지겹다는 걸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표정을 가다듬어야 한다.
오늘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건 엄마가 오늘 행사를 위해서 사 온 하얀 원피스였다. 샤×에서 신상으로 나온 옷이라고 나에게 사주면서 행사에 불참하겠다는 나를 설득한 옷이다.
‘이런 행사 정말 지겨워.’
내 주변을 맴도는 익숙한 얼굴에 나는 속으로 ‘우웩’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표정에 그런 생각이 드러나지 않도록 얼굴을 경직시켰다.
‘행사 때마다 무표정을 있으려니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것 같아.’
나를 찾아올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면 눈부신 미소로 반겨야 하는데 점점 표정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 슬펐다.
그녀가 행사장 안을 찬찬히 살피면서 사람을 익숙하게 피해 다니기 시작이었다.
하지만 행사장 안은 연말이어서 그런지 익숙한 얼굴과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뒤섞여서 더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정말 싫다.’
“영희 씨 여기에 계셨네요. 행사장 안을 한참이나 찾아서 다녔습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또 뵙네요.”
마주하기 싫어서 그렇게 행사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눈치 없는 이 남자의 말에 주변에 익숙하고 지겨운 얼굴들이 몰려온다.
젊은 사업가들의 비전 모임이라는 말만 길고 결국 결혼을 위한 모임에 속한 젊은 남자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영희 씨 오늘도 눈이 부시네요.”
“감사합니다.”
‘나도 내가 예쁜 거 알아. 식상하다고.’
오늘 행사에 참가하지 않으면 신상 원피스는 없다는 엄마의 불호령에 참석했다. 그런데 역시 불쾌한 이들의 시선이 머물 때면 그저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관심도 없는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속으로 아빠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내가 사업정보를 많이 듣는데 아빠는 내 말을 왜 안 듣지?’
저번에도 모임에서 말실수를 한 건지 나에게 정보를 주려고 노력하는 건지 머저리 같은 남자들이 나를 향해 쏟아낸 정보를 아빠에게 말했지만, 아빠는 정작 듣는 둥 마는 둥 이었다.
‘오히려 엄마가 눈을 빛내고 듣더니 한동안 내 옷이며 가방이며 한 아름 가져다줬다.’
엄마가 그 정도 씀씀이로 쓰면 아빠가 분명 한소리 했을 텐데 조용한 것 보면 내가 가져다준 정보로 크게 번 것 같았지만 내가 시집가면 그때 혼수해 준다면서 얼마를 벌었는지 꾹 입을 다문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아빠 생각을 하자 행사장 입구 쪽에서 아빠가 나타났다.
“한참 찾았구나.”
“아빠? 왜 이제 왔어요.”
나는 아빠에게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눈빛을 쏘아붙이지만 아빠는 그런 내 시선을 피하더니 엄마를 찾는다.
“하하. 미안하구나. 오늘 회사에 일이 갑자기 생기는 바람에···엄마는 어디 있니?”
“저기 사모들한테 또 둘러싸여서···.”
나를 가지고 얼마나 품평을 하고 있을지 듣지 않아도 줄줄 읊을 정도가 되었다.
“집에서는 편하게 말해도 이런 행사에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그런 내 표정이 드러난 걸까?
집에서와 다르게 엄한 아빠의 말에 표정을 가다듬고 엄마에게 아빠를 보낼 생각만 했다.
집에서는 세상 다정한 아빠지만 밖에 나오면 가부장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집에 가서는 미안하다고 할 거면서···. 도대체 남자들 세계는 허세하고 허풍만 난무하는 허구의 세상 같아.’
내가 이런 상황이 지겨워서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상대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가 어떻게 말했더라···.
‘허풍선이 같은 놈 말고 제대로 된 놈 엄마가 찾아 줄 테니까 너는 계속 이대로 예쁘게 커주기만 하면 돼.’
더 이상 클 시기는 아닌 것 같지만 눈을 반짝이면서 말하는 엄마의 등쌀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이후로 내가 가기 싫으면 안 나와도 됐던 모임과 행사에 꼬박꼬박 나가야 했던 걸 생각하면 내가 스스로 무덤을 판 것 같다.
“으···. 알았다고요. 저쪽에 여사님들하고 대화하고 있어요. 저는 불편해서 자리 비켜준 거고요.”
아버지의 표정 관리하라는 엄한 표정에 다시 한번 가다듬고 있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기분 나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익숙하게 그런 남자의 시선을 비켜서 동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 대신 이 기분 나쁜 시선을 처리해줄 가장 수완 있는 남자···.’
나를 쫓아다니는 무리 중 그나마 머리 회전이 빠른 구석이 있는 남자다.
그런 나의 시선에 익숙하게 아빠가 엄마를 찾아 움직이기 전에 동화에게 인사를 받는다.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아···오랜만이네. 동화군.”
“하하···저번 모임 때도 인사를 들였는데···.”
“저번 경제인의 밤 행사에도 참여했나? 내가 미쳐 자네가 온걸 모르고 있었군. 아버님은 아직 정정하시고?”
“네. 아직도 활발하게 경영일선에 참여하시는걸요.”
“그래도 자네 같은 후계자가 있어서 든든하시겠어.”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물류회사도 영희 씨 같은 후계자가 있어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에게 여자가 무슨 회사일이냐고 결혼할 생각이나 하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들어서 생각도 안 한 후계자 자리를 동하라는 남자는 아빠를 보면 항상 꺼낸다.
‘무슨 생각일까? 정말 내가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영희야 내가 아끼는 딸이지만 후계자라니 어불성설이지. 다른 쪽 업계는 몰라도 물류 업계가 좀 험하나? 난 내 딸이 고생하는 걸 볼 생각이 없네.”
“아···그러시군요.”
“이 문제는 여기서 할만한 대화 주제는 아닌 것 같군. 난 여사님들 사이에서 내 아내를 좀 구해와야겠어.”
“영희 씨 덕분에 여사님들 사이에서 영희 씨 어머니가 인기가 많으시죠.”
“나는 생각 없다고 해도 아내가 저렇게 나서니···.”
정말 엄마는 나를 왜 이렇게 가기 싫은 행사마다 끌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행사에 올 때마다 나의 일수 거 일투족을 바라보는 많은 시선에 진이 빠지는 기분이다.
“사장님 덕분에 영희 씨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잘 만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네···보는 눈이 좀 있구만. 난 내 딸을 고생시키지 않을 놈으로 콕 집어서 결혼시킬 생각이네.”
아빠는 속으로 동화를 높게 평가하는 게 분명하다. 저런 말은 동화 외에는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머리 회전이 빠르기는 하지만 너도 기분 나쁜 눈초리를 보내는 무리니까. 아웃.’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아빠와 동화가 엄마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엄마하고 같이 있을 아줌마들의 수다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리를 지켰다.
그러자 기분 나쁜 눈초리를 보내는 무리 중에서 익숙하지 않는 얼굴의 남자가 나에게 접근했다.
‘동화가 있으면 대신 답했을 텐데···.’
엄마한테 눈도장 찍는다고 사라진 동화가 갑자기 이 자리에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답한다.
분명 모르는 얼굴이지만 경제인의 밤 행사에 올 정도면 서로 어느 정도 예의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사교적 수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혹시 우리 구면인가요?”
“아닙니다. 이번에 처음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아···그러시구나···.”
“옆에서 대화를 듣다 보니 성함이···.”
나는 내 이름을 말하기 싫어서 질문으로 응수했다.
“제 이름을 묻기 전에 먼저 이름을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저는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서진태라고 합니다.”
“정말 작은 회사 인가 봐요. 이름 처음 들어보는 것 같네요.”
이 정도 말하면 적당히 눈치를 채고 떨어질 때도 됐는데 그 남자는 끈질기게 나와 대화를 이어갔다.
‘보통 이 정도 말하면 자존심 상해서 떨어져 나가는데···.’
“그렇지만 곧 아무나 알게 되는 회사가 될 겁니다.”
“그런가요. 열정이 큰 모습 보기 좋네요.”
‘정말 눈치 없다.’
행사가 끝나고 피곤한 다음날 동화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의 등쌀에 적당히 꾸미고 밖으로 향했다.
“우리 딸 정말 예쁘다.”
“그래.”
아빠하고 엄마는 내가 항상 예쁘다고 한다.
‘내가 예뻐서 아빠하고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어릴 때부터 계속 들어온 예쁘다는 말에 나는 예쁘다는 말이 익숙하고 예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게 익숙하다.
‘사랑받는 것도 피곤해.’
아빠와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속으로만 생각을 하고는 동화가 열어준 차 문으로 타자 인사를 건넸다.
“아쉽게도 오늘 모임은 저하고 영희 씨 둘뿐이네요.”
전혀 아쉽지 않다는 말로 아쉽다는 듯 말하는 동화의 행동에 나는 소름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행사 때 떨거지들 떨어트릴 때 머리 회전 빠른 건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얕은수를 쓸지는 몰랐다.’
“만났는데 드라이브나 갈까요?”
“싫어요. 어제 행사 때문에 피곤해서요.”
“그리고 모임은 여러 명이 만나야 모임 아닌가요?”
“어제 행사 때문에 다들 연락을 안 받아서 나 혼자 나온 겁니다.”
엄마는 내가 예쁘다는 걸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또래 모임이라고 하지만 젊은 사업가 모임이다 보니 여자라고는 나와 나보다 나이 여자 한 명 뿐이기 때문에 모임에 나갈 때마다 모든 중심에는 내가 서 있다.
“그럼 모임을 다음에 하죠. 저도 피곤하고···.”
“제가 다음 주부터 미국 출장이 잡혀서요.”
‘으···정말 끈질겨.’
나는 찰거머리 같은 동화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어제 받았던 처음 본 남자의 명함을 지갑에서 꺼냈다.
‘어제 오자마자 버리려고 했는데 피곤해서 그대로 둔 게 어떻게 신의 한 수가 되었네?’
명함에 대표라고 적힌 걸 보니 모임에 참여한 최소 조건은 갖춘 것 같았다.
모임 조건은 크든 작든 사업을 하고 있는 대표나 사장 아니면 그 후계자 위치에 있는 젊은 나이대의 남녀이다.
젊은 사업가들의 비전 모임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있지만 사실은 비슷한 조건을 가진 결혼 적령기의 남자 여자를 모아서 서로 인맥을 쌓기 위한 모임이다.
남아선호 사상이 강해지면서 모임에 점점 여자가 줄어서 엄마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좋은 자리는 이미 서로 어린 시절부터 약혼해서 그런 거지만···.’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쓴웃음을 무표정으로 삼키고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했다.
‘정말 귀찮고 짜증 나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면 엄마가 아줌마들한테 얼마나 까일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나는 엄마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어제 명함을 받은 남자를 불렀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이 겪어왔던 모든 행태를 한 번에 보여주는 그 남자의 추태에 얼굴을 찌푸렸지만 동화와 단둘이 만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분명 둘만 만났다고 하면 그걸 빌미로 얼마나 헛소문이 돌겠어. 지겹다. 진짜.’
적당한 관심은 좋지만 과도한 관심은 정말 피곤했다.
“엄마 이제 모임에 안 나가도 되지 않아? 이미 충분히 얼굴 팔린 것 같은데···.”
“이번에 외국 나갔다가 들어온 삼별그룹 아들도 있다더라. 오늘만 참여하면 다음부터는 모임에 억지로 안 나가도 돼.”
“거기 정도면 내가 눈에 차기나 하겠어?”
“우리 딸은 예쁘잖아.”
“그건 그렇지만···.”
“우리 딸 백마 탄 왕자님 만나고 싶다며···.”
“내가 생각한 백마 탄 왕자님은 나만 보고 나만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거야. 돈은 아빠도 잘 벌잖아.”
놀란듯한 엄마의 표정을 보면서 난 심드렁하게 모임을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만 고생하면 한동안 모임이니 행사니 안 가도 될 테니까. 욕먹지 않을 정도만 꾸미고 나갈까?’
분명 처음 의도는 그랬던 것 같은데 의상실에서 나선 내 모습은 엄마도 깜짝 놀랄 만큼 예뻤다.
“어머···우리 딸 예쁜 건 알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해서 힘 좀 준 거야. 이제 더는 나 이런데 안 나갈 거야.”
“알았다. 너무 늦지 말고.”
“늦게 있고 싶지도 않다고.”
그렇게 도착한 호텔 라운지의 모임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오늘 호텔 라운지를 전세 낸 건가?’
익숙한 얼굴 사이로 동화와 그런 동화를 편하게 대하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내가 등장하자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사람이 삼별? 그냥 평범한데?’
평소와 다른 분위기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미모에서 비교가 되어서 그런지 첫날 보고 보지 못했던 여자가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모인 사람들을 향해 인사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인사만 하고 그만 갈까? 삼별 자재가 와서 그런지 꼭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날이네.’
아무래도 있는 집 자식들의 모임이다 보니 가끔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벌어질 때가 있는데 그런 꼴불견을 바로 옆에서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머···피곤하다고 동화 씨 바람 맞추고 빨리 들어갔다던데 오늘은 나왔네요?”
인사를 하기도 전에 나를 향해 뾰족한 날을 세우는 것에 인사를 생략하고 당당하게 답했다.
‘이럴 때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또 무슨 소리를 할지 상상하기도 싫다.’
“전 모임이라고 해서 경제인의 밤 행사 다음날이라 피곤해도 억지로 나갔는데 모임 인원들이 전부 안 나오고 동화 씨만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동화 씨하고 대화할 정도로 제가 경영에 깊숙이 알지 못해서 새로운 친구를 소개해 주고 전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일찍 들어갔죠. 동화 씨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영희 씨 덕분에 새로운 대표도 만나서 대화해 봤는걸요. 물론 별 것 아닌 업체 사장이 대표랍시고 접근한 것 같아서 그랬지만요.”
“어머···제가 회사 일은 잘 몰라서 실수했네요.”
“사업가 모임에 사업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이렇게 열심히 나오는 걸 보면 바라는 게 있나 봐요?”
“아무래도 제가 잘 아는 분야도 아니고 불편해서 앞으로는 그만 나오려고요.”
내가 이렇게 대답할지 몰랐는지 나를 몰아붙이던 알지그룹의 둘째 이제는 30대가 된 고지혜가 얼굴을 붉히면서 비꼬아서 말했다.
“왜 이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나 봐요?”
“네. 모임에서 제가 올 곳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까. 목적 달성이라고 말해도 어폐는 없겠네요.”
‘내가 찾는 백마 탄 왕자님은 최소한 이곳에는 없는 거지.’
이런 말까지 들을지 예상하지 못했는지 어버버 거리는 고지혜를 지나쳐 그대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붙잡는 손만 없었다면 바로 나갔을 텐데 뿌리치고 나가면 또 어떤 구설수가 생길지 몰랐기 때문에 못 이기는 척 돌아보자 동화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모임에 왔는데 마지막이라고 해도 한잔은 하고 가요.”
“저는 입맛이 없어서···이만···.”
“그러지 말고···무알코올 샴페인 영희 씨 생각해서 가져왔는데 이대로 가면 섭섭해요.”
나는 머리가 아파졌지만 이대로 실랑이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잔 마시고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게 더 속이 편할 것 같았기 때문에 동화가 건네는 음료 잔을 바로 원샷하고 뒤돌아서 나왔다. 뒤에서 고지혜의 야살 거리는 목소리가 멀리서 웅··웅···거리면서 들리는 것 같았다.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띵.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곧장 도착하자 평소와 다른 몸 상태에 나는 호텔 카페에서 정신이 차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내 잔에 장난을···?’
그 생각을 끝으로 나는 낯선 천장을 보고 눈을 떠야 했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말 못 할 곳이 아파 왔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창피해서 말도 못 하고 옷가지를 챙겨들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빠와 엄마는 내가 말도 없이 외박했다고 화를 내면서도 걱정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난 전혀 기억나지 않는 어제의 일들에서 도망치듯 침묵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동화가 설마···하지만 나하고 같이 있던 남자는···.’
“우욱···.”
몇 번이나 변기를 붙잡고 주저앉아서 나는 좌절하고 말았다.
“임신 3주째입니다.”
내 상태를 걱정스럽게 생각한 엄마와 함께 간 병원에서의 진단에 엄마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고 아빠의 냉랭한 표정은 나를 발가벗겨서 시베리아 벌판에 던져버린 것 같은 수치심이 들었다.
그리고···
상견례 날이 잡혔다.
“크흠···자네가 영희 남자친구라고.”
“네 그렇습니다. 장인어른.”
“왜 내가 자네 장인어른인가?”
“영희 씨하고 제가 서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어이없다는 듯 붉어진 얼굴이지만 눈을 질끈 감더니 나를 외면하고 말했다.
“내가 딸을 아주 귀하게 키웠다네. 그래서 집안일이나 그런 건 하나도 할 줄 몰라 그런데도 내 딸을 귀애하게 대우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장인어른 영희 씨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습니다.”
“그래···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아빠···.”
나는 아빠의 결정에 그리고 엄마의 외면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나의 완벽했던 모습에서 날카로운 흠집이 나자 아빠와 엄마는 나를 외면했다.
이전의 따뜻했던 집은 나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로 뒤덮인 성이 되어서 나를 수치스럽고 괴롭게 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뱃속의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더 이상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아빠, 엄마한테 버림받는거야?’
나의 아름다운 동화는 날카로운 물레 바늘에 찔린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조용히 그렇지만 나의 숨을 조여왔다.
더 이상 나를 향해 이전과 같은 따뜻한 시선을 주지 않는 아빠와 엄마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그런 내 손등을 그 남자가 툭툭 친다. 나는 그 손짓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저 나도 눈을 감고 말았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