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후, 인생 다시 산다-130화 (130/205)

<130화 사랑의 조건. 2>

“거기 책 반납하려고 들고 온 거야?”

한 아름 되는 책은 내가 들고 있었지만 대답은 종혁이가 했다.

“네. 방학 동안 빌렸던 것까지 전부 반납하려고요.”

“종혁이는 독서부가 됐어도 좋았을 텐데···.”

“선배하고 친해진 거야?”

내가 종혁이 옆에 바짝 붙어서 낮게 말했지만 구관의 조용한 복도에서 내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말이 들렸는지 선배가 대답했다.

“자주 보다 보니까. 친해진 거지. 유학 간다니 아쉬울 뿐이야. 이제 책 빌리러 오는 사람이 있으려나···."

“독서부 열람실 책들도 하나같이 신작으로 채워져 있는데 학생들이 자주 안 와요?”

“그래···너희는 잘 모르겠구나? 독서부 소문.”

“소문이요?”

소문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나를 앞지르듯 걸어가면서 선배가 독서부를 향해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호리호리한 인형은 꼭 구관의 어두운 복도 속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왕자와 공주 이야기하고 있었지?”

“네.”

“동화책에서는 왕자와 공주는 만나면 서로 사랑에 빠지고 이후에도 행복하다고 끝나는데 현실에서는 그게 가능할까?”

“네?”

나와 현진이 얼빠진 표정으로 선배를 바라보자 선배의 뒤를 쫓아 발걸음을 서두르던 종혁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동화는 동화일 뿐 현실은 다르다는 말씀이죠?”

“어른들의 동화는 잔인하지.”

어른들의 동화가 잔인하다는 말에 움찔한 건지 현진이 대답했다.

“어···. 그러는 저희도 다 큰 건 아니잖아요?”

“그거 알아? 지금이야. 이렇게 어린 척하고 있지만 우리 나이대가 가장 잔인하다는 거.”

나는 그 말을 할 때의 선배의 잠깐 멈춰 선 등을 보면서 등골이 쭈뼛 서는 것 같았지만 내 등 뒤에서 나를 밀어대는 현진이 때문에 구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나가서 보자. 오현진.’

“···?”

“뭐···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야. 왕자와 공주 이야기가 현실판이 된다면 어떻게 될지 내 생각을 말하자면···.”

“···.”

“왕자는 인기가 많고 공주도 인기가 많아. 그런데 그런 왕자와 공주가 서로에게 맞춰주면서 살 수 있을까? 난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인기가 많아서 서로 안 만난다라···. 그런데 오히려 서로 인기가 많아서 난 이런 사람하고도 사귀었다는 걸 바라고 만날 수도 있지 않나요?”

“그럼 그게 정말 좋아하는 걸까? 아마 잠깐 만날 수는 있어도 길게는 못 갈걸?”

“아···.”

“거기다가 인기 있다는 말은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주는 방식에 익숙하다는 말이야. 그런 왕자 공주가 서로가 받던 애정을 주고받는 그런 건강한 연인 관계를 유지한다?”

“힘들다는 말이네요?”

“그런 선배는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요?”

“독서부에 사람이 없는 이유···.”

선배의 일정했던 걸음이 멈춰서 일까? 복도는 적막에 휩싸이고 선배의 나지막한 말이 우리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거 다 나 때문이야.”

“네?”

당혹성과 함께 나와 현진이 한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선배의 뒷모습을 창백해진 표정으로 바라봤다.

한낮인데도 그늘진 구관의 그림자 사이로 누군가 몸을 움직였다고 생각한 순간.

‘뭐지? 뭐야. 진짜 귀신이라도 나오는 거야?’

나와 현진이 질린 안색으로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런 우리 뒤에서 종혁이가 나와 현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헉.’

놀라서 보자 종혁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도착한 독서부실 문으로 우리 등을 밀면서 말했다.

“선배가 말한 소문은 전부 소문일 뿐이야. 오히려 듣고 나면 억울하다고 생각할걸?”

“음?”

신음에 가까운 대답을 하면서 억지로 독서부의 열람실로 들어가자 선배가 익숙하게 불을 켜고 자리를 치우더니 나와 친구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오랜만에 독서부에 손님이 많아졌네.”

씁쓸하게 말하는 선배의 표정은 앳된 고등학생이 아니라 꼭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종혁이가 유학 가면 정말 내가 독서부 열람실 문을 안 열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아.”

“제가 없어도 여기 제 친구들이 자주 올 거예요.”

“정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현진은 버티는 중이었지만 약점인 옆구리를 공격당하고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현진이가 옆구리 근처에 손만 가져가도 자지러지는 건 내가 알아냈는데 종혁이가 써먹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무섭다는 감정이 많이 희석된 것 같았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소문이지?’

“음···너희 쇼윈도 부부라는 말은 알아?”

“보여주기식 부부 말하는 거 아네요? 연예인 부부 중에 많다고 소문만 들었는데···.”

“사실 주변에 그런 부부가 참 많아. 그런데 인정을 안 하는 것뿐이지. 인정하고 나면 너무···그래···슬픈 건지도 모르겠다.”

“네?”

“왕자 공주 이야기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왕자, 공주 이야기의 특징이 뭔지 알아?”

“어···? 예쁘다? 잘생겼다? 잘났다?”

“그것보다는 혈통이지 혈통.”

“백마가 있어야지. 공주는 백마가 끄는 마차.”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그럼 그런 왕자와 공주가 현실판이 되면 어떨 거 같아?”

“어···?”

당혹성 섞은 말만 내뱉은 채 나와 현진이 눈치를 보는데 종혁이가 대답했다.

“백마는 스포츠카쯤 되고 뭐 외모야 잘난 그대로 일 거고 혈통은 집안이 좋은 거 대충 그 정도요?”

“그래. 그런데 왕자와 공주가 동화에서 각자 한 명씩 나오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그런 조건을 다 갖춘 사람들은 거의 없어.”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왜···.”

“현실에서는 왕자와 공주가 서로 만나기도 힘들지만 만난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그걸 너무 적나라하게 밝히니까···. 주변에 사람이 없어졌네.”

“네?”

체념한듯한 선배의 모습에 종혁이가 분위기를 바꾸듯 말했다.

“그건 선배 잘못이 아니죠. 그냥 아픈 부분을 외면하다가 그걸 지적하니까 적반하장으로 화낸 거하고 다를 게 뭐에요.”

“하지만 내 발언 때문에 결국 이혼한 건 사실인걸···.”

“그건 핑계를 선배로 하는 거고요. 잘못이랄 것도 없는데 괜히 그런 소문에 신경 쓰지 말아요.”

나는 종혁이 옆구리를 찌르면서 조용하게 물어봤다.

“도대체 무슨 소문···?”

“너희가 그 소문을 모른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다시 설명하려니까 입 열기가 어렵기도 하네···”

“말하기 어려운 내용이면 저는 다음에···”

하고 일어나려는 나를 현진과 종혁이 양쪽에서 붙잡는 바람에 다시 앉아야 했다.

‘종혁이는 그렇다 쳐도 오현진 너는?’

내가 노려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고개만 돌려서 내 시선을 피하면서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막았다.

‘소문에 대해서 궁금하기는 하고 옆에 한 명이라도 더 희생자가 있길 바라는 거냐?’

내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선배가 입을 열었다.

“아빠가 엄마를 상대로 이혼 소송 진행하고 있어.”

“네?”

당황한 우리가 진정하길 기다린 선배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듯 독서부의 이곳저곳을 아련하게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우리 엄마 정말 예쁘다? 덕분에 나도 어렸을 때 미소녀 소리 많이 들었어.”

‘갑자기?’

소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선배 어머니에 대한 말을 꺼내서 당황하는데 선배의 이어진 말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그런데 왜···.”

“엄마는 예쁘고 집도 잘살아. 그리고 자신을 꾸미는 능력도 있어서 외출할 때는 더 화려하고 예쁘지. 그리고 아빠는 그런 화려한 엄마를 사랑했어.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런 아빠나 엄마나 불쌍했지만.”

“네?”

“두서없었지? 그런데 가장 가까이서 보니까 알 것 같아. 무언가 잘못된 거.”

"뭐가 잘못돼요?"

“외가는 처음에는 잘 살았는데···사업이 잘못되었는지 이제는 그냥 평범해 그리고 엄마는 지금도 예쁘지만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그런데 그게 사는 게 그런거잖아? 신도 아니고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는 없잖아?”

“그런데 아빠는 엄마의 외가가 명문가이길 바라고 계속 자신 옆에서 예쁘게 빛나길 바란 거지.”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서로에게 상처가 되어버린 것 같아.”

“네?”

“집에 돈도 많았고 그래서 자신을 꾸미는데 돈도 쓸 줄 아는 젊은 시절의 엄마를 사랑했던 아빠는 이제 돈을 많이 써서 사치품을 산다고 나이가 든 엄마를 지금은 미워해.”

“그럼 선배 어머니 쪽에서 이혼을 해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네요?”

“아니 엄마는 아빠한테 이혼해 달라고 할 수 없어.”

“왜요?”

“돈이 필요하니까.”

“그게···무슨?”

“삶이란 게 관성이 있어서 자기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나가길 두려워하거든···아니···엄마는 그렇게 사는 방법밖에 모르는 건지도 몰라···.”

“네?”

“외가에서는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컸고 아빠도 엄마가 예뻐서 결혼했고 그리고 이제 예쁘지 않아져서 이혼당하니까···엄마가 아프게 된 건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

“아프다고요?”

“많이 편찮으신 거예요?”

“아니···몸은 멀쩡해. 마음이 아픈 거지···.”

그렇게 말하고 쓰게 웃는 선배의 눈과 마주하자 나는 안타까움에 눈을 감았다.

선배의 표정은 무표정이었고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나는 그 안에 담긴 깊고 무거운 슬픔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선배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상처가 없어서가 아닌 상처가 너무 오래 방치되어서 그 고통에 익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럼 아버지가 소송이 아닌 합의 이혼을 선택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차라리 그럼 좋겠어. 그런데 재산 분할 해 주는 게 아까워서 전쟁 같은 이혼 소송을 선택한 거야.”

“그런데 그게 독서부에 사람이 준거하고 무슨 연관이···.”

“말하자면 웃기는 일인데···.”

“···?”

“아빠, 엄마가 서로에게 칼날을 세우면서 이혼 소송을 하니까. 난 갈 곳이 없었어. 그래서 독서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그때 친해진 친구가 있었거든. 소문은 안 좋은 친구였지만 그래도 난 외로웠고 또 어딘가에 기대고 싶었던 것 같아.”

“···?”

“그때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서 말했던 말이···화살이 되어서 돌아왔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슨 말을 했는데요?”

“아빠하고 엄마가 이혼할 것 같다고 말했을 뿐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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