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사랑의 조건.>
그리고 종혁이의 고백은 어떻게 되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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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여름의 끝자락 나무 그늘 아래 두 명의 인형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나를 미는 현진이의 머리를 꾹 눌러주면서 말했다.
“그만 밀어. 이러다가 들키겠어.”
“윽···그만 누르라고···.”
나는 손에 힘을 풀고 멀리서 대화를 나누는 종혁이와 혜림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너무 멀어서 하나도 안 들리는데···.”
나는 강화된 육체 덕분에 들리지만 현진은 거리가 멀어서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조금 조용히 해 봐 잘하면 들릴 것 같으니까.”
“진짜? 이 거리에서 들린다고?”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 현진의 입을 막고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왜 불러낸 거야?”
“그게···.”
“할 말 없으면 먼저 간다?”
“아니···그게···.”
“내가 저번에 반에 찾아가서 그래?”
“어?”
“이번에는 꼭 1 등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내 위로 누군가 그것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 있으니까. 확인하려고 간 거야.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겠지만 그때 말한 건 전부 진심이야. 그때 일 화가 나서 부른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그···방학 동안 머리 많이 길렀네?”
“머리 같은 거 신경 쓸 시간도 없이 공부 열심히 했지. 말하려던 게 그거야? 궁금한 거 풀렸으면 나 간다.”
고개를 돌리고 그늘 밖으로 향하는 혜림의 팔을 종혁이가 잡고 스스로 더 놀란 듯 팔을 내팽개치듯 놓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그게 머리 기른 것도 잘 어울리는데···그전에도 괜찮았고···그러니까···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뭐?”
이 상황 자체가 당혹스러운 듯한 반응을 보이면서 혜림의 반응에 종혁이는 더 패닉에 빠지는 게 보였다.
‘명복을 빈다.’
내가 멀리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종혁이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어···그게···. 난 성적에 필사적인 모습이 좋았어.”
“그게 무슨···×소리야?”
혜림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자 얼굴이 더욱 빨개진 종혁이가 랩을 하는 것처럼 빠르게 외쳤다.
“그냥 남들이 어떻게 보든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집중하는 게···성적도 그렇지만 무슨 일이든 필사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오늘 달리는 모습도 그렇고. 그러니까···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냐면···.”
“필사적인 게 보기 좋다고?”
“어···그러니까 그런 모습이 대단해 보여서···?”
자기가 말을 하면서도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나는 튀어나올 것 같은 신음을 목구멍 너머로 처박으면서 담벼락을 힘줘서 잡았다.
돌 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러니까···.이번에 내가 유학을 가는데···.”
“아하···유학 가서 공부할 테니까 필사적으로 누가 더 잘하는지 보자는 거지? 좋아 도전받아줄게.”
“아니···그게 아닌데···.”
휙 돌아서서 긴 생머리를 휘날리면서 퇴장할 것 같았던 혜림이 조금 붉어진 낯으로 종혁에게 큰 소리로 외치고 나무 그늘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도 내 자리에서 필사적으로 최선을 다할 테니까. 너도 그래야 해. 그리고 꼬박꼬박 연락해. 알았어?”
“어···어···.”
얼떨결에 대답하고 좀비처럼 휘적휘적 걸어오는 종혁이를 낚아채서 교실로 들어가는 현진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벽에 낸 손자국을 쓱쓱 문질러서 자연적으로 난 흠집처럼 만든 다음 뒤따라갔다. 내가 교실로 향했을 때 현진이 앉아 있는 종혁이 앞을 막아서듯 서서 심문하고 있었다.
“고백은 한 거야?”
나는 종혁이와 혜림의 대화를 들었지만 현진은 전혀 대화 내용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고백 유무에 대해서 먼저 질문했다.
“한 거 같긴 한데···.”
“하면 한 거지 한 거 같은 건 뭐야?”
인상을 찌푸리면서 현진이 대답을 재촉하자 종혁이가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좋아한다고 말한 거 같아.”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속으로 고백이라고 했던 순간을 그대로 들었던 나는 손을 들어 머리를 털면서 괴로웠다. 하지만 멀리서 네가 했던 고백을 옆에서 들었는데 엉망진창이었어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혼자 괴로워해야 했다.
“그리고 혜림이가 나한테 유학 가서도 꼬박꼬박 연락하라고···.”
‘그건 라이벌 성적이 어떤지 보고하라는 거 아니었어?’
나는 혼자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는 종혁이의 모습을 짠하게 보고 있었다.
그런 나와 다르게 현진은 종혁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면서 말했다.
‘혜림이가 했던 말 중에 듣고 싶은 말만 정확하게 기억하지 말아줄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종혁이와 현진은 이미 길지 않았던 대화를 분해하고 쪼개고 씹어먹기 시작했다.
결론은···
“그런데 잘돼도 너무 멀어서 연예는 힘들지 않나?”
“사귈 가능성이 있긴 한 거야?”
회의적인 나의 반응에 현진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향해 말했다.
“혜림이가 거기까지 나왔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소문으로 듣기론 혜림이는 누가 불러도 따로 안 나간다고 하던데?”
“응? 종혁이가 불렀을 때는 별말 없었지 않아?”
“부르면 난 트로피 같은 게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거절한다는데?”
“혜림이가 상 받았어? 물론 받을만하지만···.”
“아니면 트로피라고 별명이라도 붙은 건가?”
자꾸 산으로 가는 대화를 붙잡기 위해서 나는 종혁이와 현진이의 목덜미를 잡아서 누르고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그 말은 자기를 트로피로 보지 말라는 거잖아.”
“으···주인이가 목소리 깔고 말하면 닭살 돋는다. 나만 그러냐?”
팔을 쓱쓱 문지르는 종혁이를 보던 현진이 나에게 질문했다.
“아니 나도 그런데 트로피로 보지 말라니 무슨 소리야?”
“혜림이 공부 잘하지.”
“응.”
“예쁘지.”
“응.”
예쁘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긍정하는 종혁이와 다르게 현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인기가 있긴 하지.”
“그러니까 그런 공부 잘하고 예쁜 애들이 학교에 많아?”
“아니. 거의 없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걸? 공부 잘하면 공부벌레로 생겼거나? 잘생기고 예쁘면 공부를 못하거나?”
“그러니까. 희귀한 케이스니까. 그런 자신을 하나의 트로피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생각 없는 놈들이 많았다고 그게 싫다고 말한 거 아냐?”
“아···.”
“종혁이는 그래서 고백한 건 아니잖아. 별말 없이 따라온 것도 그렇고 그러면···.”
“그런데 그걸 혜림이가 알 리 없지. 종혁이가 경수처럼 말주변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네. 그럼 둘이서 대화할 때 설명이라도 잘했어?”
“어···그렇지 않을까?”
나는 종혁이가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현진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제야 내가 말하지 않고 전달하려는 게 느껴졌는지 현진은 종혁이의 양어깨를 두드려주면서 정작 나와 눈빛을 교환했다.
‘이거 완전히 튼 거지?’
‘텄어 텄어.’
나와 현진이 어떤 눈빛을 주고받는지 못 본 종혁이는 아직도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연락 꼬박꼬박하래···.”
그런 종혁이의 모습에 현진은 바닥끝에서 끌어올리듯 이것저것 좋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종혁이 정도면 백마 탄 왕자 아니냐?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종혁이 중학교 때는 너무 유약하다고 하나? 그래 보였는데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키도 크고 그러니까. 여자애들이 좋아하던데.”
“피부가 하얗긴 하지. 종혁이 어머니가 미인이니까···. 무슨 대학 축제 때 여왕으로 뽑히기도 했다던데?”
“무슨···그런 거 아니야.”
얼굴이 붉어진 종혁이 나와 현진의 등을 마구 밀면서 교실 밖으로 향했다. 체력장을 한 날이어서 다른 날과 다르게 교실은 어수선해서 시끄러웠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 대화에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민망한 듯 나와 현진을 끌고 구관 쪽으로 향했다.
“어···어···?”
얼떨결에 구관으로 향하는 우리의 양손에는 책이 가득 이었다.
“이거 무슨 책이야?”
자신이 든 책 대부분을 내 위에 올려놓고 한 책을 들더니 종혁이에게 현진이 질문한다.
“야, 오현진 너.”
“너 힘 세잖아. 그 정도는 들어줘야 오늘치 쓸 힘도 마저 쓰지.”
하면서 내 팔등을 때리는 현진의 모습에 어이없었지만 별말 없이 구관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 제목이···어른들을 위한 동화? 종혁이 너 동화책도 읽어?”
“독서부에 있는 책인데 선배한테 추천받아서 읽은 책이야.”
“동화를?”
“거기에 적혀있잖아.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난 동화 속 이야기가 전부 해피엔딩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뭐?”
“물론 작가가 상상해서 쓴 거겠지만···현실적이어서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더라고.”
“동화야 뭐···잘난 왕자와 예쁜 공주가 만나서 잘먹고 잘살았다가 대부분 아닌가?”
“이런저런 버전이 있지만 대충 그렇지···그렇지만 인어공주는 죽잖아?”
우리는 종혁이가 대출한 책을 가지고 대화를 하면서 구관으로 향했다.
구관은 낮인데도 불구하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서 난 더 크게 현진이와 대화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종혁이는 책을 여러 번 빌리면서 익숙해졌는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왕자와 공주 이야기로 화제가 튀었는지 갑작스러운 음성에 나는 머리가 쭈뼛 서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인어공주가 왜 죽은 건지 아니?”
나와 현진은 바짝 얼어서 뒤를 돌아봤고 거기에는 익숙하지만 익숙해지기 거부하는 독서부에서 봤던 여자 선배가 서 있었다.
분명 미인이었지만 서늘한 분위기가 있다고 할까 나는 흠칫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종혁이는 그 선배 옆에서 어색하게 우리에서 손짓을 해 보였다.
‘뭐지? 도망가라는 건가?’
내가 종혁이가 빌린 책을 전부 들고 있었는데 뛰쳐나가려는 기미가 보이자 선배가 불렀다.
‘아···내가 왜 대신 들어준다고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