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추운 겨울을 대비하며···.>
야자를 하지 않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하교를 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야자를 안 하고 바로 하교를 한다고 부러움 섞인 야유를 보내던 종혁이가 없는 교실은 약간 허전하고 씁쓸했다.
생각보다 내가 종혁이에게 의지를 많이 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만히 신문을 스크랩하고 있는 현진의 뒷머리를 장난스럽게 흩트리면서 지나갔다.
“야···뭐야 너 때문에 삐뚤게 붙였잖아.”
“내일 보자.”
불평 어린 현진의 음성을 뒤로하고 손을 흔들고 나온 정문 앞에는 생각지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종혁이 어머니?”
“종혁이 없이 보는 건 오랜만이네.”
“어···.”
내가 당혹스럽게 멈춰서 서 있자 익숙하게 나를 이끌고 주차된 차로 나를 데리고 갔다.
“미국에 간 거 아니었어요?”
“피해자지원재단일 때문에 나는 한국에 남기로 했어.”
“네?”
“그래서 종혁이가 유학을 결심했다고 했을 때 놀랐단다. 나는 친구들 때문에 한국에 나하고 같이 남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건···.”
“그런데 친구들 때문에 유학을 결심했다고 해서 기뻤어. 그리고 언제 이렇게 컸나 싶기도 하고···그래서 피해자 지원재단일 사실 다른 분한테 넘기고 갈까 생각도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한국에 남기로 했단다. 혹시라도 정말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이 있는데 내가 옆에 없어서 곤란하면 안 되잖니?”
“하지만···.”
“종혁이 아빠하고도 상의한 일이니까.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하지만 내가 한국에 없는 기간도 있을 거야.”
“그래서 널 찾아온 거란다.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거든.”
찌르―.
해질녁 학교 앞 화단에서 울어대는 큰 벌레 울음소리 사이로 주차되어 있던 차량 운전석에서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못한 중년의 신사가 밖으로 나왔다. 양복을 입고 굳은 입매는 무언가를 참는 듯한 굳게 다물려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나를 향해 곧게 뻗어오고 있었다.
“이쪽은 이정만 씨야. 구면이지?”
“반갑다. 제대로 인사를 나누는 건 오늘이 처음이구나 이정만이라고 한다. 너를 만난 후···내가 피해자 지원재단 설립자 중 한 명이라고 해서 꼭 만나보고 싶다고 이사장님에게 말했었다.”
“미국에는 기부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오히려 모금하기 좋을 거라고 판단했어. 그래서 나는 한국하고 미국을 오가면서 일할 계획이란다. 그러니까 내가 미국에서 모금 활동 위주로···한국에서의 일은 이정만 씨를 통해서 진행하면 될 거야. 내가 한국에 없을 때는 이정만 씨에게 연락하렴.”
나는 그날 황망했던 이정만 아저씨와의 만남에서 봤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에 놀라면서도 이정만 아저씨가 재단 일을 도와준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짧은 시간이 이렇게 회복된 이정만 씨의 모습은 기쁜 놀라움이었다.
“아···그때보다 건강해지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내가 혼란을 삭히는 사이에 종혁이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기주 납치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 물어왔다.
“그리고 이번에 그···. 전순희 씨 정말 감옥이 아닌 보호감호소로 보내도 괜찮겠니?”
“그건 기주 부모님하고 기주하고도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전순희 씨가 감옥이 아닌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한다고 동의해주셨고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물론 기주 아버지가 탄원서에 그렇게 보내시기로 했지만···법원판결은 어떻게 날지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피해자 측에서 그런 탄원서를 넣어주는 것과 아닌 건 크게 차이가 날 테니까···.”
“전순희 씨가 잘못을 안 했다는 건 아니에요. 기주에게 정말 큰 상처를 두 번이나 준 나쁜 사람인 건 분명해요. 하지만 전순희 씨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누구라도 옆에서 그녀를 지지해줬다면 지금과 조금쯤은 다르지 않을까···어쩌면 제가 직접 피해자가 아니니까 쉽게 말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니야. 나도 전순희 씨 사건에 대해서 간략하게 듣기만 했는데도 마음이 아프던데···그래도 부모 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 가능한 나로서는 피해자인 기주하고 기주 부모님에게 그런 말을 꺼내지는 못했을 거야.”
“어리지만 참 배울게 많다고 이사장님이 말씀했는데 틀린 말이 없구나···.”
“하하···그건 너무 와전된 말인 것 같아요.”
손사래를 치는 내 모습에서 다른 누군가의 그림자를 찾는 침잠한 이정만 아저씨의 눈빛에 나는 그저 웃는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어떤 생각으로 피해자지원재단 일을 시작하는 걸까?’
나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삶의 의지를 잃었다가 다시 일어난 이정만 아저씨가 조금이라도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정만 아저씨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정말로···.”
‘행복해지세요. 정말로···.’
이런 나의 마음이 이정만 아저씨의 가슴에 작은 씨앗을 심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나와 이정만 아저씨의 모습을 보던 종혁이 어머니가 기쁘게 웃고 있었다.
조금쯤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대백공과의 대화가 귓가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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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으로 잘 모르는 누군가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자네 친구를 붙잡겠나?’
‘친구를 붙잡다뇨?’
‘자네 친구 중 한 명이 자네와 멀리 떨어지게 되는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지.’
‘그게 무슨···.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다는 건가요?’
‘글쎄. 자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친구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 모든 건 어떤 기회가 오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니까 말일세.’
‘···단순히 몸이 멀어진다는 건가요?’
‘그렇지.’
‘그럼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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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택의 결과가 내 눈앞에 서 있다.
한 명의 목숨이 살았고 친해진 어떻게 보면 평생의 친구가 되고 싶었던 종혁이는 유학을 갔다.
‘아버지···저···이번 삶은 정말 열심히 살고 있어요.’
나는 떨리는 손을 따뜻하지만 뜨거웠던 손을 놓았다.
처음 이정만 아저씨의 모습을 봤을 때는 실망감이 컸다.
인하의 아버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훈이 아버지는 다르다.
피해자지만 피의자가 어리다는 사실에 원망도 제대로 못하고 스스로를 죽이고 살던 아저씨다.
종혁이와 멀어지는 건 치기 어린 마음으로 싫다. 어디서든 친구라고 말했지만 사실 몸이 멀어지면 친분도 멀어질 수밖에 없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따뜻하고 단단했던 손안의 온기를 꽉 쥐여본다.
‘역시···살아있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날 내가 이정만 아저씨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아저씨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살아있다.
종혁이가 유학을 가고 한동안 멍하니 운동장 하늘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회귀 전 나의 삶에 친구는 없었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나를 굳게 믿어주던 친구가 옆에 없다는 건 생각보다 견디기 힘든 외로움으로 다가왔다.
‘외롭다···.’
현진이가 같은 반에 있지만···종혁이 그리고 경수와는 다른 느낌이다.
경수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고 종혁이는 유학을 떠났다.
‘외롭다···.’
하지만.
난 같은 선택의 순간이 온다고 해도 결국 한 명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선택할 것 같다.
살아있는 사람의 손은 정말 따뜻하고 뜨겁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겠지.
내가 종혁이 어머니와 이정만 아저씨와 훈훈한 대화를 마치고 집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 아파트 계단참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김 씨 아저씨?”
부스럭거리는 봉지를 흔들면서 나타난 김 씨 아저씨의 새로운 출몰지에 놀라는 사이에 익숙하게 내 손은 밀크티를 찾고 있었다.
시원했을 밀크티가 미지근해졌다.
‘오래 기다린 걸까?’
내 시선을 받으면서도 익숙하게 밀크티를 따서 단숨에 마신 김 씨 아저씨는 봉지 안에 밀크티 캔을 넣으면서 나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한동안 연락하지 말라더니 이제는 괜찮은 거예요?”
“기주네 주변에 있던 수상한 움직임들은 전부 멈췄다.”
나는 밀크티 캔을 열기 위해 힘을 주다가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그걸 왜···.”
“기주 아버지가 대한당에 입당하면서 대국적인 측면에서 버린 패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후···. 어쨌든 기주 가족이 안전해졌다니 다행이네요.”
“대한당에 입당하면 이 사태가 해결될 거라고 판단한 건가?”
“그냥 단순하게 생각한 거예요. 지금 외환위기 때문에라도 민국당이 유리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기주 아버지에게 민국당에 입당하라는 제의가 오가면서 납치가 일어났으니···기주 아버지가 정치에 욕심만 없다면 차라리 대한당에 입당하게 되면 이런 공격이 없거나 아니면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일 뿐인걸요.”
김 씨 아저씨가 고개를 절레 흔들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사건은 정말 위험할 수도 있었어. 아니 정확하게는 아직도 위험한 상태다.”
“그건···.”
“앞으로는 나에게 먼저 의뢰하고 움직여라. 이건 충고가 아니라 경고다.”
“경고요?”
“내가 본 너라면 그래. 오히려 위기를 기회라고 여기고 어떤 문제가 있어도 해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 어린 동생이나 어머니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지금처럼 행동할 수 있겠나?”
“네? 그게 무슨···. 제 동생하고 어머니가 어째서.”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주머니 속 송곳은 튀어나오고 이 사건의 전 말에 네가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어떻게 나올지 나도 예상할 수 없어.”
계단 참에서 나를 내려다보면서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던 김 씨 아저씨의 말이 어두워졌다.
“난···그들에게 버려졌다.”
“그럼 버려진 패끼리 모여서···힘을 합치는 건 안 되나요?”
“···!”
김 씨 아저씨의 놀란 표정을 보면서 말했다.
“버렸다고 하지만 그건 집단의 입장에서 말하는 말이고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유로워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일어난 사건은 하나이지만.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다양하다.
그리고 그 다양성에서 인간은 발전할 수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