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철든 아이들 3>
“덥다···.”
“죽을 것 같아.”
“죽을 것 같다는 건 아직 살아있다는 거지.”
“뭐래···.”
“나 유학 가.”
“그래···.”
“뭐?”
푹 퍼진 시금치처럼 널브러진 상태로 말도 안 되는 대꾸로 한낮 더위가 지나가기만 기다리던 나와 친구들은 종혁이의 말에 벌떡 튀어 오를 것처럼 뛰어올랐다.
“유학 간다고?”
“응”
“너 방학식 때 표정이 안 좋았던 게···.”
“말할 틈도 없이 네가 빨간 스포츠카의 연상의 누님과 데이트를 즐기러 갔지.”
“그거 아니라고.”
“그래. 아니라고 치고 어쨌든 갈지 말지 고민해서 결정해보라고 엄마가 말했는데 가려고.”
“갑자기?”
“다들 외환 때문에 다 힘들잖아. 그런데 서운대도 학자금 수급이 어렵다고 교수 중에 시간제 강사 먼저 자른다고 하더라···.”
“···?”
“그런데 아빠가 그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 미국에 있는 대학에서 이전부터 꾸준하게 제의가 있었다고 이번 기회에 가자고 하는데···.”
“와우···미국에서? 종혁이네 아버지 대단하시다.”
“아빠가 대단한 거야. 항상 느끼지. 그런데 난 친구들이 전부 여기 있고 그래서 가기 싫다고 생각했거든. 여기 있을 만한 이유만 하루하루 꼽으면서 이것저것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번 사건 겪으면서···생각이 달라졌어.”
“음?”
“갑자기?”
“이번에는 종혁이가 입원한 다음에야 기주 납치 사건에 대해서 알았잖아. 기주 납치한 전 씨도 피해자였다고···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이라서···그런데 기주가 납치를 두 번이나 당했는데 돈 요구는 없었으니까. 이것저것 의심하면서 궁리해 보는 거지···. 또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안 되니까.”
“나는 그냥 이번 사건은 뉴스에도 안 나왔잖아. 그런데 피해자와 가해자는 있고···. 가해자도 피해자도 피해를 입었다고 하고···. 그냥 이런 상황이 이상한데 뭔가 바꿔야 할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네가 그랬잖아. 세상을 바꿔보자고···.”
“어? 내가?”
“뭐 정확한 워딩이 세상을 바꿔보자 그런 건 아니었지만···난 그렇게 느꼈어. 아···이 친구라면 진짜 뭐라도 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인하 그렇게 되면서 경수가 각성한 느낌? 그전에도 확실한 목표가 있었지만···.”
이 더운 무더위 속에서도 꿋꿋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경수를 슬쩍 쳐다보면서 작게 말하는 종혁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좀 분위기가 바뀌기는 했지.”
나와 종혁이 어깨에 팔을 걸치면서 현진이 말했다.
“너네가 말하는 걸 들으면서 내가 모르던 세계를 알게 된 것 같아.”
“응?”
“여름 한복판에서 오징어가 될 수 있는 세계.”
“뭐?”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미친···너네 이러고 놀았냐?”
나와 종혁이가 서로 마주 보더니 피씩 웃고는 말했다.
“그래 아주 철판 오징어 한번 말아보자.”
내와 종혁이 현진의 양팔을 붙잡고 태양 앞으로 끌고 가자 진짜 햇볕이 강렬해서 그런지 온몸을 뒤틀면서 현진이 외쳤다.
“으악···뜨···뜨거워···.”
우리는 크게 웃고는 도서관 휴게실에서 큰 소리로 떠든다고 경비아저씨에게 한소리를 듣고 쫓겨났다.
터덜터덜.
도서관에서 짐을 챙겨서 가까운 분식점에 가면서 서로 탓하면서 시끌벅적하게 떠들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고 푸르지만 뜨거운 태양이 가득한 하늘은 누구라도 햇빛으로 말려 죽일 것 같았다.
‘덥다···.’
나와 종혁이 그리고 현진이가 소란으로 쫓겨나자 같이 쫓겨나게 된 경수가 아무렇지 않게 질문했다.
“덥다. 더워···그건 그렇고 종혁이 너는 갑자기 유학을 결정한 건데?”
휴게실에서 대화를 했던 나와 현진이의 말을 전해 들은 경수의 질문에 종혁이 머리에 손을 올려 햇빛을 가려보려고 하면서 말했다.
“몰라.”
“뭐?”
나와 현진이가 경악성을 내뱉었지만 종혁이는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봤다.
“내 친구들은 전부 자신의 꿈을 향해서 나가고 있는데···그 꿈이 멋져 보이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더라. 그래서 뭐든 할 수 있는 모든 위치에서 자격조건을 만들어놓으면 나중에 뭐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
“뭐야 그게···.”
“경수는···”
“왜?”
“부당하게 대우받는 친구들을 위해서 훌륭한 대법관이 될 거라고 믿어.”
“현진이는 제대로 된 기사를 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녀석이지.”
그리고 나를 보는 종혁은 그냥 씩 웃기만 했다.
“뭐야···나는 왜 그냥 웃고 넘기는데?”
“크흠···그렇게까지 말하면 넌 범인 잡는 훌륭한 경찰이 될 거야.”
“여기에 내 의견은?”
“최소한 허 경장 아저씨는 좋아하겠네.”
“뭐?”
“주인이가 전학 오고 이것저것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는데···무언가 어디부터인가 잘못된 것 같은데 바꾸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그거야···아직 우린 학생이고···.”
“그래서 이렇게 더운데도 에어컨 고장 난 도서관에서도 쫓겨난 불쌍한 중생들이지.”
“어쨌든 나는 바꾸고 싶어. 정확하게 뭘 바꾸고 싶은지는 모르겠는데···내가 어른이 되면···.”
“미친···.”
“대통령이 꿈이라고 말하지?”
“그런 꿈은 없다고···.”
“그래서 왜 유학인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 내 꿈. 내가 하고 싶은 일. 잘 모르겠는데 그냥 세상은 이상한 기준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고 그걸 바꾸고 싶은데 그러려면 넓은 곳에서 많은 걸 배워야 할 것 같아서···지금 너네하고 지내는 이 시간이 좋은데···그래서 더···.”
“무슨 말인 줄 알겠어. 우리나라는 편견이 너무 많으니까 편견이 없는 나라에서 넓은 시야를 보고 싶다는 거 아니야?”
“역시 경수가 정리는···.”
“그런데 괜찮겠어? 거기서 제대로 적응하겠냐고.”
“음···. 누가 그러더라고 실패를 두려워해서 안주하면 작은 울타리에 갇힌 가축이 된다고···”
나를 보면서 말하는 종혁이의 말에 나는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다. 경수가 나를 째려보더니 이내 크게 한숨 내뱉고는 말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친구인 건 변하지 않을 거야. 잊어먹지 않게 연락이나 자주 해.”
종혁이가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담긴 미소를 입가에 띄우면서 말했다.
“너희 같은 친구니까. 힘들어도 더 도전하고 싶은 거야.”
“그게 무슨 헛소리냐? 그래서 언제 가는데?”
“아마 체력장은 하고 가지 않을까?”
“체력장은 왜? 너 몸 움직이는 거 싫어하잖아.”
“난 알 것 같은데···.”
“뭐?”
궁금해하는 경수를 보면서 말했다.
“강혜림.”
“혜림이면 2등?”
“2등이라니 너무 솔직한 거 아니냐? 1등?”
“윽···그렇게 부르니까 좀 그렇긴 하네. 혜림이가 왜?”
“종혁이가 혜림이 좋아해.”
“야 무슨 너도 현진이처럼 헛소리 전파하냐?”
“그건 누가 말 안 해도 알 것 같은데···.”
“혜림이 되게 까칠한데···내 친구지만 취향은 좀···.”
“그런 거 아니라고.”
“하긴 방학 때 바로 유학 준비해서 가버리면 혜림이가 제대로 열 받긴 하겠다.”
“왜?”
“종혁이가 1등이잖아.”
“뭐? 종혁이가? 너 나한테는 왜 말 안 했어.”
“뭐하러 그런 걸 말하고 다니냐?”
“종혁이가 1등하고 바로 전학 가버리면 혜림이한테 경수만큼 찍히는 거지.”
“내가? 내가 왜?”
“혜림이나 너 되게 싫어해.”
알 수 없는 1패를 맞은 경수가 멍해 있는 사이에 종혁이가 말했다.
“그냥 친구들하고 인사는 하고 가야지. 정 없게 그냥 가냐···.”
나는 종혁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었다.
경수도 피식 웃고는 종혁이 앞에 메모지를 내밀었다.
“이건 뭐야?”
“다음에 한국 올 때 사와야 하는 거.”
“뭐?”
“갈 때는 빈손이지만 올 때는 양손 가득 몰라?”
어이없다는 듯 웃은 종혁이었지만 이 더운 여름의 더위를 날려버릴 것 같은 상쾌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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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 후 체력장 날이 다가왔다. 종혁이의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면서도 나와 현진은 장난스럽게 얼굴을 마주하고는 모르는 척 지나갔다.
체력장이 시작되고 거의 모든 반이 체력측정이 끝나갈 무렵 여학생들이 몰려있는 곳에서 큰 소리의 함성이 들려왔다. 멀리서 바라보자. 혜림이 반의 달리기 측정을 하는 중이었다. 그중 압권은 강혜림.
긴 머리를 날리면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모습은 어딘가로 당장 뛰쳐나갈 것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그런 걸 나만 느낀 건 아닌 듯 주위의 아이들이 전부 환호하면서 기록을 보더니 크게 소리치면서 대단하다고 하고 있었다.
“여자 반 신기록이래. 혜림이 제는 공부하고 운동하고 못하는 게 없네.”
“그러게···.”
“눈에 힘을 줘. 썩은 동태눈 같거든?”
홀린 듯 혜림의 달리는 모습을 보는 종혁이를 잡아끌면서 현진이 주의를 주지만 결국 포기한 듯 양손을 허리춤에 걸고는 나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온다.
“저 상태로 고백하면 10번 해서 10번 차인다.”
“그것도 경험이지.”
“뭐래. 너 가끔 볼 때면 우리 할아버지 같거든?”
“하하···”
‘뭐 회귀 전 나이까지 합치면 아니라고 하는 것도 거짓말이지.’
내가 난감하다는 듯 웃을 때 체육선생이 나를 불렀다.
‘이제 남자반 달리기 측정하려나?’
탕.
익숙한 출발 총성이 들린다.
익숙한 만큼 익숙하게 긴장한다.
우리는 달린다.
왜?
이유는 모른다.
눈앞에 트랙이 있고 우리는 총성을 들으면 달려야 한다고 배워왔다.
눈앞의 트랙을 누가 만들었는지 질문하지 못한다.
질문을 하는 걸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익숙한 정해진 방향으로 달리지 않고
멈춰 서서.
어째서 달려야 하는지.
어째서 이 트랙인지.
질문을 하지 못한다.
왜?
우리는 답이 정해진 트랙을 뛰는 아이들이니까.
질문을 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정해진 교육 기간.
정해진 교육 내용.
정해진 교육방식에 따라 달린다.
우리의 교육이지만
우리의 질문은 포함되지 않는다.
달린다.
그리고 그 끝에서 결과를 기다린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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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종혁이는 유학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