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거짓된 사도 기회>
차르르륵―.
두꺼운 서류철 사이로 A4의 파도가 인다.
무게감만으로 사람을 압살할 것 같은 서류 더미에 눌려 질식할 것 같다.
‘이번에 머리도 한지 오래된 것 같은데 머리하러 간다고 하고 사무실에서 나가면···.’
똑똑―.
그런 생각을 하는 중 갑작스럽게 들린 노크 소리에 놀란 마음을 다스리면서 사내는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변호사님, 손님입니다.”
“누군데요?”
사무실이 커지면서 고용한 비서의 음성에 사내가 손님이 누구냐는 질문을 했지만 당황하는 듯한 비서의 음성만 들려왔다.
사내는 서류 더미를 한번 보더니 씩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 때문에 확인하지 못했다고 나머지는 정 사무장이 해달라고 밀어봐야겠군.’
속으로 양심 없는 생각을 하면서 사내는 한달음에 자신의 사무실 방문을 열고 나가 접견실로 향했다.
접견실 문이 열리고 반갑지 않은 사람이 앉아 있자 저절로 인상이 구겨지려는 걸 억지로 피면서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신가? 변호사 선생.”
“직접 뵙는 건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접견실에 마련한 소파 중 상석에 자신의 집 안방 마냥 편하게 앉아서 사내를 향해 손짓하는 보석 반지 낀 중년 남자의 모습에 사내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하···이제 완전히 내가 만만하다는 거지?’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눈앞의 보석 반지를 낀 중년남성 앞에 조용히 앉았다.
대한변호사협회의 징계를 받은 학연이나 혈연 같은 인맥이 없는 변호사에게 보석 반지를 낀 중년 남자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돈이 되는 일을 맡겼고 사내는 정 사무장의 도움으로 그 사건들을 소화하고 있었다.
덕분에 사내의 사무실은 이전 사무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져 있었고 그에 따라 접견실도 따로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보석 반지를 낀 중년 남자가 연결해주는 사건은 평범하지 않았다. 대부분 폭력사건과 관련된 일이었고 대다수가 유죄로 끝나는 게 당연한 사건이었다. 최대한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 협상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는 사건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승소율은 꽤 낮아진 상태였다.
‘어떤 사건을 맡기더라도 자기는 관계없다는 듯···첫 사건 수임 이후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새끼가 이 시간에 사무실에?’
사내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는 듯 차를 내어놓으려는 비서를 보석 반지를 낀 중년남성이 축객했다.
‘여긴 내 사무실이거든?’
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편한 일을 하면서 산 것 같지 않은 중년 남자 특유의 냉막한 분위기에 밀리듯 사내의 비서를 자기 사람처럼 부리는 중년 남자를 향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내가 그 영상만 아니어도···.’
사내는 약점으로 잡힌 영상만 아니라면 보석 반지를 낀 중년 남성에게 소신을 말할 것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사내가 처음 열었던 열악했던 사무실과 반대로 커진 변호사 사무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실 영상이 아니더라도 돈이 되는 일을 가져오는 중년 남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사내는 그 사실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목줄만 채워지지 않았어도 너 같은 놈은···.’
사내는 속내를 감추듯 웃는 낯으로 보석 반지를 낀 중년 남성에게 용건을 물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더 반가운 것 같습니다.”
“서로 얼굴 안 보는 게 가장 좋은 일이지.”
하고 씩 웃는 중년남성의 살벌한 대답에 움찔한 사내였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비즈니스로 바쁘신 사장님이 여기까지 오신 거면 꽤 큰 사건인가 봅니다.”
“사실 사건 자체를 별거 아니야. 그런데 위에서 주시하는 사건이거든.”
‘위에서 주시하는 사건? 그럼 이 남자 윗선이 있다는 말인가?’
이제까지 보석 반지를 낀 중년 남자가 가져온 사건을 처리하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의문을 담아 보석 반지를 낀 중년 남자를 바라봐도 그 이상은 말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럼 사건 내용이란 게···.”
노란색 서류봉투를 사내 앞으로 밀 듯이 내려놓고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쏘아보는 눈총에 사내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서류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이건···.”
“아이들의 작은 다툼인데···피해자 아버지가 돈도 거절하고 소송을 하겠다고 하는군.”
사건 파일을 빠르게 읽어봤지만 대부분 정 사무장의 도움으로 사건을 해결한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저는 변호사입니다. 어떤 사건이든 온다면 최선을 다하죠. 하지만 이렇게 사건 자료를 부실하게 주시면···좋은 결과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매번 한방에 대가리 나갈 것 같은 서류 더미만 보다가 겨우 A4 5장? 이건 변호사에게조차 제대로 된 자료를 안 넘겼다는 말이지.’
“지금까지는 잘해왔지 않나?”
“지금까지 사건처럼 적당한 형량에 거래 가능한 사건이라면 모르지만 직접 오셔서 건네는 사건이 그렇게 간단할 거라고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
심기가 불편한 듯 노려보는 중년 남자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할 말을 했다.
‘여기서 어설프게 사건을 수임했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될지 몰라···. 이 남자가 직접 신경 쓴다는 건 내가 이들하고 처음 엮일 때 맞았던 사건처럼 중요한 일이란 건데···.’
신중하게 보는 것처럼 서류를 들여다보는 사내의 행동과 다르게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처음 이 남자와 관련되었던 살인 사건···자백을 했던 사건처럼 이것도 특별하다는 건데···.’
“제대로 된 피의자와 대화나 사건조사 없이 이 사건의 결과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흠···. 무죄 가능성은?”
“사건이 발생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의 고소이기 때문에 잘하면 사건 자체를 없애 버릴 수 있겠죠. 하지만 여기 피의자로 지목되었던 학생 중 변재민이라는 학생의 증언이 변경된 게 큽니다. 그럼 사건에 대한 진실을 피해자 가족이 알게 된 날로부터 다시 계산해야 하니까요.”
“그럼 키는 이 학생이라는 말이지?”
“그렇습니다만···.”
웃으면서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여 앉는 중년 남자였지만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오한을 느낀 사내가 다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지금 고소장이 접수되었는데 증인 중 한 명이 갑작스럽게 잘못된다면 검찰 측도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검찰에 손을 쓴다고 해도?”
“그건···.”
‘검찰에 손을 쓸 수 있다고?’
사내가 생각한 것보다 보석 반지를 낀 중년 남자의 윗선이 어디까지 닿아있는지 사내의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
사내가 고심하는 사이 보석 반지를 낀 중년 남자가 결정을 했다는 듯 반지를 낀 손을 소파 팔걸이를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사내는 다급하게 말을 이어나가야 했다.
“어설프게 손을 대면 오히려 사건이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습니다.”
“애들 다툼쯤에 사건이 커진다고?”
요약된 사건 내용을 살펴본 사내로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이 사건이 잘못되면 사내도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급하게 말했다.
“최소한 변호사인 제가 사건 관계자들과 대화는 해보고 진행하는 게···.”
“···.”
“사실 간단하게 해결하려면 더 쉬운 방법도 있으니까요.”
“쉬운 방법이라···.”
“···.”
사내가 보석 반지를 낀 중년 남자의 입을 초조하게 주시하는 순간.
“좋아. 한번 잘 해결해보라고 이건 위에서 주시하는 사건이니까. 잘 해결하면 나쁜 일은 없을 거야.”
‘뭐야. 잘 안되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말하고 뭐가 다르냐고?’
중년 남자의 면상에 외치고 싶은 말을 힘들 게 꿀꺽 삼킨 사내는 피의자들의 연락처를 받고 일어나 중년 남자를 배웅했다.
진이 빠진 상태로 접견실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있자 정 사무장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났는지 말을 건다.
“지금 나간 저 사람이 그···.”
사내는 접견실에 자신과 정 사무장만 있다는 걸 확인하고 말했다.
“그래. 내가 말한 그 남자.”
“말로 들었을 때는 변호사님이 과장해서 말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살벌하네요.”
“그러니까. 그런데 오늘 좀 이상한 말을 들었어.”
“무슨 말이요?”
“검찰 쪽에 손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말하던데···.”
“네? 그럼 어째서 자기 식구들을 적당히 형량 조절해가면서 넣는 거죠? 그럴 정도면 그냥 집행유예로 빼버리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그러니까. 이제까지는 그저 깡패들 변호해줄 사람을 찾는 건 줄 알았는데 내가 모르는 게 더 있는 것 같아.”
“위험한 거 아닐까요?”
“위험한 냄새가 나 그런데 대박의 냄새도 난다고···.”
“···?”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거지. 분명 저 깡패 새끼 위에 누군가 있는 거야. 저놈보다 거물이···.”
“그럼···.”
“아이들끼리의 다툼이라고? 분명히 아이들 중 윗선에 닿아있는 사람의 자녀가 있을 거야. 정 사무장 이건 기회지만 잘못 처리하면 우리가 후폭풍에 넘어질 수도 있어. 이거 책임지고 하나하나 뜯어봐.”
사내의 말에 정 사무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가벼운 서류를 무겁게 받아들다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질문을 던진다.
“아니 변호사님은요?”
“나는 피해자 가족 그러니까 소송 당사자를 한번 만나봐야겠어. 이제까지 가만히 있다가 소송을 건 거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 만하고 사건 저한테 떠넘기고 또 밖에 나가시는 거 아닙니까?”
“그럼 자네가 사건도 꼼꼼히 살피고 피의자하고 피해자 면담도 다 할래?”
“윽···아닙니다. 잘다녀오십쇼.”
퉁명스러운 정 사무장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해방이다.”
사내는 일을 정 사무장에 다 떠넘기고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에 사무실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환호하면서 사람들이 걸어가는 거리 속으로 향했다.
그런 사내를 바라보는 덩치 큰 사내들이 있었지만···그 모습도 금방 인파에 휩쓸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