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여름밤>
나는 서로 얼굴에 금칠을 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슬그머니 외면하고는 종혁이 경수 현진이와 눈짓하고는 요리책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음식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기주나 성주 거기에 주신이는 기주 어머니 음식을 많이 먹어봐서 그런지 감흥이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나와 친구들은 정말 홀린 듯이 음식을 흡입하고 있었다.
“꿀꺽···.”
“진짜···대박···.”
“한 달만 이 집에서 살고 싶다.”
다들 배부르게 먹고도 기주 어머니는 포장이라고 쌀국수를 포장해줬다.
“쌀국수는 삶고 이건 양념인데 프라이팬에 같이 볶기만 하면 볶음 쌀국수가 돼요. 집에서 간편하게 점심 먹고 싶을 때 해 먹으면 맛있어요.”
“우와···이거 거의 라면이나 다름없잖아요?”
“라면은 인스턴트라서 몸에 안 좋은 성분이 많은데 이건 제가 다 손수 만든 양념이라서 몸에 좋아요.”
“와우···대박···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각자 선물처럼 비빔 쌀국수 사실 비빔장은 베트남식 양념을 한국식으로 개량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시중에서 맛보기 힘든 맛있는 맛을 볼 수 있었다. 양손을 가볍게 기주네 집에 왔다가 양손 무겁게 각자 집으로 향하게 되자 부담스러운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항상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한쪽에 그늘이 졌던 기주 어머니의 표정이 세상 밝은 걸 보자 보이지 않는 가슴속 간질간질한 웃음이 피어나오고 말았다.
“주인이는 길 안내하게 엄마 옆자리에 앉고 친구들은 전부 뒷자리에 앉을까?”
“종혁이가 가장 가까우니까. 종혁이네로 먼저 가면 돼요.”
“다행히 첫 목적지는 자주 가던 곳이구나?”
아직 운전대가 익숙하지 않는 어머니가 익숙한 종혁이네로 먼저 출발하자고 하자 안도 섞인 웃음을 내비쳤다.
어머니가 친구들을 각자 집에 데려다주고 주차를 하는 걸 차에서 내려서 지켜보다가 기주네 단지를 무심결에 바라봤다.
‘이 시간에 누구지?’
초등학교 옆 단지다 보니 대부분이 아이를 가진 가정집들이 몰려있는 아파트 단지였다. 그래서 늦은 시간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늦은 시간에 오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직장에서 늦은 가장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처음 보는 듯한 익숙하지 않은 인형에 눈길이 갔다.
‘방문 판매원이라고 해도 이 시간에는 오가지 않을 텐데···.’
주차를 마친 어머니가 주차장에서 올라오자 나를 보고는 나는 독촉했다.
“주신아 시간이 늦었는데 집에 먼저 올라가지 않고.”
“엄마하고 같이 올라가려고요.”
“어머···걱정해 준거야?”
“친구들 전부 집에 데려다준다고 시간이 늦었잖아요.”
“호호 엄마 이래봐도···미니스탑 운영하는 사장님이라고 늦은 시간을 무서워하면 안 되지."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가족끼리 안부를 걱정하는 것까지 막지는 말아주세요. 사장님.”
“하하. 알겠어. 올라가자.”
“네.”
띠링―.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나는 계속 신경 쓰이던 그림자가 시야에서 벗어나는 걸 느끼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을 거하게 먹어서 공원에서 산책이라도 하고 올게요.”
“이 시간에?”
“바로 단지 옆 공원인데요. 금방 다녀올게요.”
“주신아?”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그 외침에 대답하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혹시···.’
내 시야를 벗어난 그림자가 저 멀리 단지 끄트머리로 사라지기 전에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육체 강화를 통해서 빨라진 달리기 덕도 있지만 내가 따라가는 그림자의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아직은 가로등이 그렇게 많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두운 도심의 그림자 아래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마주 오던 차량의 헤드 라이터에 잠깐 스친 얼굴.
‘···!’
그 얼굴을 보고는 그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어째서?’
나는 잠깐 멈추려고 했던 다리를 재촉하면서 그림자의 뒤를 밟았다. 자신이 역으로 뒤를 밟힐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저 무력하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는 일을 억지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쓰륵―.
턱―.
무엇인가 끌리는 듯한 소리와 맥없이 내려놓는 듯한 발걸음 소리.
공허한 눈동자와 맥없이 흔들리던 팔다리.
‘전순희!’
신문에서는 전 씨라고만 나왔지만, 기주 아버지를 통해서 알 수 있었던 피의자의 이름이었다.
전순희는 피의자이지만 동시에 피해자였기 때문에 양형에 영향을 받을 거라고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출소가 너무 빠르잖아? 그리고 무슨 이유로 기주네 집 근처에서 맴도는 거지?’
잠깐이지만 기주는 전 씨와 함께 붙잡혀 있던 시간 동안 전 씨도 자신과 같은 피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재판부에 그런 점을 배려해달라는 탄원서를 직접 써서 냈다고 주신이를 통해서 들었다.
‘그럼 기주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할 텐데···혹시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런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전 씨가 발을 끌면서 도착한 곳은 화려한 네온사인이 지금 시간을 잊게 만들어주었다.
‘파라오 나이트?’
내가 나이트라는 상호 앞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비틀거리는 몸짓이지만 확실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전 씨를 눈앞에 두고 나는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아무리 조용히 접근한다고 해도 얼굴을 가린 채로 나이트에 들어갈 수는 없어. 그렇다고 이대로 들어가면 미성년자라서 바로 소동이 날 거고···.’
고민하면서 건물 그늘에 기대서 고민하고 있는데 멀리서 검은색 승용차가 다가왔다.
밤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 네온사인이지만 밝은 빛은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형상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번쩍―.
‘커다란 보석 반지를 낀 남자?’
결혼반지의 느낌은 아니었다. 큰 보석 반지를 낀 주먹으로 잘못 맞으면 한순간에 실수로 사람의 목숨이 끝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위험해 보이는데?’
전씨가 기주에게 피해를 주기는 했지만, 당시의 상태나 지금의 상태를 보면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이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한발 물러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확실하지도 않는데···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지.’
나는 나이트클럽을 한 번 더 살펴보고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물론···,
어머니에게 잔소리 듣는 건 피할 수 없었지만···
“이 시간에 갑자기 그렇게 사라지면 어떡하니? 조금 더 늦었으면 실종신고할 뻔했어.”
‘누가 덤벼도 쓰러트리고 집에 올 자신이 있습니다만···.’
속마음과 다르게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하다고 한참을 말한 후에나 어머니의 걱정 어린 말에서 벗어나서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김 씨 아저씨에게 메시지만 남긴 나는 계속 마음에 남던 대백공의 경고를 눈으로 확인한 것에 만족하고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단지 옆 공원 벤치에 앉아서 얼음물로 더위를 식히고 있자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김 씨 아저씨가 나타났다.
‘등 뒤에서 나올 줄을 생각도 못 했네.’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나자 김 씨 아저씨가 검은 봉지에서 꺼낸 시원한 밀크티가 눈앞에 있는 걸 보고는 밀크티를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시원하게 마시고 캔을 쓰레기통을 향해 던지자 김 씨 아저씨가 그런 캔의 포물선을 보면서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김 씨 아저씨.”
“그래.”
“저번···부탁도 빠르게 처리해줘서 감사해요.”
“별로···.”
“덕분에 건물 거래할 때 잡음 없이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어요.”
“···.”
“이번에 부탁드릴 건 기주 납치사건 때 피의자가 벌써 출소를 했더라고요.”
“음···사실 출소는 아니지 집행유예였으니까.”
“집행유예요? 납치범으로 현장검거가 되었는데 어떻게 집행유예가···.”
“1심은 징역형이 나왔지만 2심에서 집행유예 나와서 지금 나와 있다.”
“전혀 생각도 못 했네요.”
“대부분 당사자가 아닌 이상 1심 이상 잘 알아보지 않으니까.”
“대충 어떤 이유에서 집행유예가 나왔는지 알만하네요.”
“음?”
“어제 보니까 출산한 것 같은데···그런 것도 감안해서 집행유예가 나온 거겠죠.”
“아마도···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잠깐 알아본 것만 따져도 상황이 좋지 않아.”
“그 말씀은···?”
“아이 엄마···그러니까 전 씨가 중독자야.”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다. 마약중독이지. 그런데 좀 복잡한 게···.”
“···.”
“전 씨가 원해서 중독자가 된 건 아니야. 경찰 치부여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경찰 내부에서 조용히 넘어간 사건 피해자인데···.”
“그게 무슨···.”
“그 사건을 개기로 전 씨가 기주라는 아이를 납치한 건지도 모른다.”
“네?”
김 씨 아저씨가 전해준 전 씨의 사연은 정말···
전 씨는 미국에서 유학을 갈 정도로 전도유망한 재원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잠깐 만난 질이 좋지 못한 남자를 통해서 나이트클럽에 놀러 갔다가 자신이 마시는 잔에 약을 탄 걸 모르고 정신을 잃게 된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자신이 원하지 않던 사건이 일어난 후였고 그걸 빌미로 협박을 통해 돈을 뜯었다. 이걸 신고한 전 씨는 미국에서처럼 강력범죄로 처벌될 걸 믿었지만···
“정말 경찰이 결혼하라고 했다고요?”
“서로 미혼인 상태이고 나이대도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당시분위기를 생각하면 지금보다 십 년 전이니까. 그런 방식도 충분히 통했겠지.”
“설마···담당 형사가 기주 아버지예요?”
“아니 담당 형사는 이미 은퇴까지 했을 거야. 당시에도 나이가 많아서 짭새 소리 듣던 늙은이였으니까.”
“그럼···.”
“기주 아버지는 그 담당 형사 사수였지. 그러니까 신참 형사를 가르치던 형사가 전 씨 사건을 담당했던 거야.”
“···.”
“기주 아버지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전 씨는 자신의 눈에 보였던 형사 중에 가장 잘나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표적으로 삼은 게 아닐까 한다.”
“그럼 기주가 납치된 건 우연이 아닐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