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여름>
“야 여름이라고.”
“응. 말 만해도 더운데 열 내지 말자.”
“지금 그렇게 말할 때가 아니야. 여름인데 이런 도서관에 처박혀 있어야 하냐고.”
“학생이니까.”
“아악···.”
“살려줘···.”
“크크큭···.”
점차 흑화되어가는 종혁이와 경수 그리고 현진의 모습에 나는 웃고는 들고 있던 얼음물을 하나씩 얼굴에 가져다줬다.
“이야···살 것 같아. 도서관 에어컨 언제 고쳐지는 거냐?”
“그러게···에어컨 고장 나니까···도서관이 찜통이야.”
“그런데 주인이 너는 이렇게 더운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냐?”
“괴물이냐?”
“도마뱀처럼 변온동물인 거 아니야?”
“아니야. 더운 걸 너희보다 좀 잘 참는 거지. 무슨···.”
내 반응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진동이 오는 전화기를 잡고 자리에 일어나려고 하자 그런 나를 현진이 보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수상해. 여자친구 있는 거지?”
“저번에 빨간 스포츠카?”
“대박. 아니라고 그렇게 손사래를 치더니 정말 무슨 일낸 거 아니야?”
“무슨 헛소리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런 게 아니면?”
“아니라고···.”
자신을 잡고 늘어지는 친구들을 물리치고 휴게실에 도착할 때까지 다행히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여보세요.”
“네···.”
“그래요. 그럼.”
용건만 간단히라는 포스터 문구처럼 깔끔한 김 씨 아저씨와 통화가 끝나고 돌아가자 더위에 지친 녀석들에게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했다.
“우리 집에 갈래?”
“우오오오.”
“힘이 난다.”
“오예~”
주신이는 대부분 기주네 집에 놀러 갔기 때문에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거실에 있는 에어컨이야말로 녀석들의 목표였다.
“미니 스탑 들러서 먹을 것도 사가자.”
“오픈하시고 손님은 많아?”
“단지 사람들만 찾아도 손님이 많더라고 아르바이트생을 구해야 하는데 걱정이야.”
“왜?”
“이왕이면 성실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엄마가 사람이 좋아서 오는 사람 족족 거절을 못 하거든.”
“거절 못 하는 게 무슨 문제야?”
“오래 할 사람인지 간단하게 면접이라도 봐야 하는데···하루 이틀하고 말도 없이 안 나오는 경우가 있어서···.”
“그것도 문제네.”
“그래서 요 며칠 집에 거의 못 들어오고 미니 스탑에 묶어서 움직이지 못한다니까?”
“그럼 우리가 도와줄까?”
“나라고 말 안 해봤겠어?”
“엄마가 그렇게 얼굴 굳히면서 화내는 건 처음 봤어. 혼자서 잘할 수 있다고 공부에 집중하라고 하는데 뭐···.”
“아···.”
“중고등학생은 아르바이트로 받을 생각 없데···.”
“음?”
“대학생 정도 돼야···받을 거라네.”
“왜?”
“학생은 공부해야 한다고···내 또래는 도저히 일을 못 시키겠다고 하더라고···.”
“아···. 그래서 아직 아르바이트생 못 뽑은 거야?”
“그래도 야간은 다행히 구했어. 군대 가려고 휴학한 형인데 야간시간도 괜찮다고 하더라.”
“그나마 다행이네.”
“그러니까.”
“최소한 두 명은 더 뽑아야 하는데···.”
“어서 오세요···. 주인이니?”
“네. 엄마 제가 도와드릴게요. 이것만 옮기면 돼요?"
나는 매대를 정리하고 있는 어머니가 들고 있던 상자를 들고는 음료수와 과자 등 줄어든 매대를 정리했다.
“도서관이 많이 더운가 보네. 다들 얼굴이 붉은 거 보니까. 여기 아이스크림 먹고 먹을 거 챙겨서 들어가렴.”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친구들의 인사에 활짝 웃으면서 인사를 받던 어머니가 나에게 다가와서 주신이에 대해서 말했다.
“주신이가 방학이라고 너무 기주네에 놀러 가 있는 것 같아. 오늘 집에 일찍 온 참에 주신이 데리고 저녁 같이 먹을래?”
“네. 엄마도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아르바이트 형 나오면 바로 들어와요. 그 형도 엄마가 옆에 있으면 더 불편할 거예요.”
"그러려나···."
“그렇다니까요. 그럼 이따가 저녁은 다 같이 먹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그래. 조심해서 올라가고 저녁거리는 엄마가 따로 챙겨서 올라갈게.”
“무거우면 저 불러요. 아들 옆에 있을 때 써먹어야죠.”
“무슨···.”
하면서 내 등을 두드린 어머니였지만 웃는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리고 친구들은 자장면하고 치킨 좋아하니까. 오늘은 그냥 시켜먹어요.”
“그럴까?”
“내 친구들이지만 제네 다 먹으려면 하루 종일 밥해야 할걸요? 오늘은 배달해서 먹어요.”
“그래. 그럼 내가 주문해놓을래? 엄마는 가게에서 일하다가 올라가면 깜박할 것 같아.”
“알겠어요.”
거실에 누워서 이제 살 것 같다는 표정의 친구들 손에 시원한 음료수 하나씩 들려주고는 기주네로 향했다.
띵동―.
“누구세요?”
“저에요. 주신이 형이요. 주신이 데리러 왔어요.”
“어머···. 주인이니? 며칠 못 본 사이에 엄청 커져서 못 알아봤어. 이제 키가 얼마인 거야?”
“키를 안 재봐서 잘 모르겠어요.”
“그냥 봐도 180㎝는 넘을 것 같은데?”
“하하···. 크면 좋죠. 주신이는···.”
“기주 방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지. 오늘은 영어 선생님 오셨거든. 애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어서 원래 수업시간보다 좀 늦게 끝나. 조금 있으면 끝날 거야.”
“이렇게 매번 과외 하는데 같이 수업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과외비를 별도로 드릴게요.”
“어쩜 네 어머니하고 똑같은 소리를 하니? 어차피 기주 공부한다고 부르는데 같이 들으면 더 좋지. 기주도 옆에서 누가 자기하고 들으니까 더 집중되고 좋다고 하고.”
“기주는 이제 괜찮아요?”
“뭐···말을 잘 안 해. 아···어둡거나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할까? 의사 선생님 말로는 해리성 기억장애 그런 거라고 하더라···무서운 일은 무의식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
“괜찮은 건가요?”
“건강한 반응이래. 자기가 기억하기 싫어하는 걸 묻어두는 거니까.”
“다행이네요.”
기주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항상···볼 때마다 정말 고마워.”
“아니에요. 기주가 잘 이겨내고 있다면 이제 저한테 고맙다는 말도 안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
“기주 어머니가 그 말을 할 때마다 상기될 수도 있잖아요.”
“아···그건 생각 못 했네···.”
“으음···. 엄마?”
“우리 성주 일어났어?”
“응.”
“안녕?”
“어···주인이 형?”
“오랜만이네.”
“주신이 형 데리러 온 거야?”
“···?”
“주신이 형 실망하겠네. 오늘 엄마가 베트남 쌀국수 해준다고 기대하고 있거든.”
“쌀국수?”
“베트남 음식인데 엄마 솜씨가 좋아서 맛있어.”
“아···.”
“오늘 친구들이 와서 엄마하고 주신이도 불러서 같이 저녁 먹으려고 했는데 주신이가 쌀국수 먹고 싶다고 하면···.”
“형?”
“수업 끝났어?”
나는 수업이 끝난 주신이와 기주의 모습에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수업을 해준 선생님을 현관문까지 안내해 준 기주 어머니가 성주를 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놀아주던 내 모습을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쌀국수는 넉넉하니까. 친구들까지 불러서 같이 먹자.”
“친구들 3명하고 저까지 고등학생 4명이라서 어휴···웬만한 양으로 안돼요.”
“괜찮아. 남편이 후배들 데려오면 열댓 명은 금방 넘는 걸 쌀국수 말고 고기도 좀 볶으면 되지.”
“네?”
“남편이 경찰인데···열 명 정도 양은 금방이지.”
뭔가 굳건한 무엇인가를 본 것 같았는데 그런 기주 어머니 주위를 성주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큰 상이 넓은 거실을 차지하더니 베란다에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주인아 거기에 큰 통 좀 가져다줄래?”
“네.”
거짓말 안 하고 주신이 정도의 초등학생이 들어갈 만한 큰 육수통이 기주네 집에 있었다.
‘도대체 이런 통이 집에 있는 이유가 뭐지?’
“기주야. 엄마가 자주 사용하는 양념통 어디 있는지 알지?”
“네.”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맛있는 음식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우더니 큰 상이 빈 곳이 없을 정도로 가득 음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신아 친구들 불러야지.”
“네?”
“이제···나베 올리고···일본식 샤브샤브인데···먹어보면 맛있을 거야.”
순식간에 마법처럼 차려진 상차림에 놀라서 멍하니 서 있는 내 옆구리를 주신이가 툭 치더니 내 손을 잡아당겼다. 주신이가 원하는 만큼 고개를 내리자 귓속말로 조근조근 말했다.
‘기주 엄마···마법사 같아. 해주는 음식 진짜 맛있어. 근데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나는 주신이의 머리를 푹 눌러서 가까이 오게 하고는 주신이가 한 것처럼 귓속말을 했다.
‘그래도 엄마 앞에서는 엄마가 해준 음식이 최고로 맛있다고 해야 해.’
“당연하지.”
갑작스러운 주신이의 말에 돌아보는 기주와 기주 엄마가 성주를 안아 들더니 말했다.
“친구들 불러서 이제 먹기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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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거 일본식 나베지?”
“저건 무슨 음식이지?”
위에부터 경수, 종혁, 현진의 반응이었다.
어머니도 늦지 않게 기주네에 오셔서 차려진 상차림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양손에 든 음료수 박스를 내려놓으면서 고마움에 기주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음식 준비하실 때 부르시지···혼자서···.”
“주인이하고 주신이가 도와줬어요. 그리고 제가 음식 하는 거 좋아해서요.”
“정말 요리사를 해도 성공하실 것 같아요.”
“우리 엄마 요리책도 냈어요.”
“어머···정말? 언급이 없어서 전혀 몰랐어요. 저도 이제 요리책도 좀 보고 해야 하는데···.”
“아니에요. 바쁘게 사시느라 그런 거죠. 전 요리를 좋아해서 이것저것 해보다 보니···레시피를 여러 개 가지게 돼서 다른 사람들하고 나눠볼까 해서 책을 낸 거예요."
“엄마가 인쇄 엄청 받아서 이사 온 거잖아.”
“음? 기주 아버님이 경찰에 고위직 아니에요?”
“엄마가 아빠 월급은 그냥 허공에 날아간다고···.”
기주 어머니가 기주를 째려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그게 남편이 주변에 동료들하고 사이가 좋다 보니까. 매번 술값을 많이 써서요. 사람이 좋아서 그렇죠. 사람이···.”
“어머···기주 아버지 씀씀이가 그런데···이 살림이면 기주 어머니가 진짜 대단하시네요.”
“하하···별말씀을요. 전 주신이 어머니가 더 대단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