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선택>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는 짧게 자른 곱슬머리가 된다.
밝은 미소가 머문 자리는 만성 피로에 찌든 얼굴이 된다.
흰 피부에 큰 눈동자는 인상을 쓴 덕분에 자리 잡은 주름과 다른 이들을 향한 알 수 없는 적대감이 깃든 날카로운 눈초리가 된다.
나는 과거 아내의 모습과 마주한다.
‘아내는 아름답다.’
하지만 가시 많은 장미처럼 주변의 모든 것에 적대적이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가시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 연민과 미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자신의 아들을 향한 모호한 모정 속에서 나는 그녀의 상처를 내가 보듬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리석었지. 그녀의 고통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도 알지 못하고 나라면 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빠져 있었어.’
이제는 아내의 고통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아들을 사랑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피해자였을까?’
아니···
‘주변의 모두를 향해 적대적인 상태에서 자기 연민에 빠진 그녀는 피해자가 맞았겠지.’
하지만 삶은 잔인해서···
피해자에게 동정을 오래 나눠주지 않는다.
삶의 현실 앞에서 그녀는 일어서야 했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생긴 아들과 함께···.’
그녀의 부모는 뭐라고 했을까?
나는 아내에 관하여 답을 알아내기도 전에 나는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니 그건 사랑이 맡았을까?
나는 어머니에게 받았던 애정을 아내에게서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당시 어머니가 병원에서 고통받는 모습이 힘든 게 아니라 어머니의 끝없는 애정을 줄 상대를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미혼모인 상태에서 한번 결혼에 실패했음에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키워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와 어머니의 모습을 투영했던 게 아닐까?
나는 그녀와 결혼 상대였지만 결혼 생활은 평행선을 그은 채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결혼했지만 아무런 접점이 없는 남처럼···
내가 생각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을까?
나는 어느새 학교 근처의 공원에서 그녀가 사 들고 온 차가운 음료수 캔을 들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 탄산음료 안 좋아해? 다른 음료로 바꿔올까?”
“···.”
“다시 한번 고마워. 정말 너 아니었으면···.”
“···.”
“아니···사실은 아직도 밤에는 집에서 못 나가 집이 엄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나도 무서워서···처음에 대학 가서 아빠하고 싸웠는데 이제는 아빠가 하는 말이 이해가 돼···. 내가 이럴 줄은 나도 몰랐는데···.”
‘장인이 엄하셨던가···.’
당시 2번째 결혼이었던 아내는 친정과 의절 아닌 의절 상태였기 때문에 장인과 장모의 얼굴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이런 말 하려고 보자고 한 게 아닌데···.”
그녀는 하얀색 캠퍼스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신문지로 뭉치를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이게···무슨···.”
“성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너 병원에 있을 때 아버지하고 내가 찾아갔는데···.너희 어머니가 거절하셔서···.”
흰 피부에 맑은 눈망울이 찌푸려지고 주름 잡히면서 신경질적인 눈초리로 바뀐다. 언제나처럼 그녀가 외친다.
“이게 뭐야, 애 교육비가 얼만데 쥐꼬리 같은 월급 가지고···다들 투잡이다 뭐다 하면서 아르바이트 다니는 거 몰라? 당신은 언제나 그래. 적당히 하고서는 이 정도면 되는 것 아니냐는 듯 그렇게 나를 본다고 완전 진절머리가 나!”
그녀의 모습이 더 이상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언제부터 서로를 미워하기만 하게 된 걸까?
분명 처음 시작은 그렇지 않았을 텐데···
“그만―!”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런 내 반응에 놀란 듯 겁을 먹은 것 같은 이수의 반응에 나는 받은 캔 음료를 단숨에 마시고는 벤치에서 일어나 이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저기···”
붙잡는 이수의 손길을 벗어나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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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만났다.’
‘내 기억 속 아내와 완전히 다른 사람.’
‘내가 원망하고 미워할 수 있게 회귀 전과 같은 아내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까?’
‘나는 그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는 걸까?’
대백공은 미워하고 싶으면 원망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미워하고 원망해도 된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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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집에 바로 앞이었다. 집으로 올라가기 전 미니스탑 오픈예정이라는 큰 현수막에 발걸음이 멈췄다.
동생은 기주네 어머니에게 맡겼는지 매대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눈에 박힌다.
“주인아? 집에 가면 저녁 차려놔서 데워 먹기만 하면···.”
“엄마같이 먹어요. 이것만 정리하면 되는 거 아네요?”
아직 미니스탑 오픈 전이여서 매대를 정리하고 있는 어머니의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무거운 짐이 있는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서 정리하는 단순한 일이다 보니 한 명이 하는 것보다 둘이서 바쁘게 움직이니 금방 끝낼 수 있었다.
‘무거운 물건을 어머니 몰래 내가 옮겨다 놔서 금방 끝나기도 했고.’
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봐 안 보이는 곳에서 무거운 짐은 정리했다.
“아직 퇴원한지 얼마 안 됐는데 몸은 괜찮아?”
“괜찮아요. 오히려 하도 움직이지 않아서 좀이 쑤신다고요. 그런데 엄마 나 입원해 있었을 때 그 납치 당했던 학생이 찾아왔었어요?”
어머니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학생 때문은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네가 구하다가 이번에 입원까지 하고 마음이 안 좋아서 면회 왔는데 절대안정이라고 돌려보냈거든···.”
나는 불편해 보이는 어머니 표정을 보면서 학교에 직접 찾아왔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한참 말이 없어지더니 현관문을 열고 외출복을 정리하고 저녁 준비를 분주하게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 말이 없으시길래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아 하신다는 생각에 나도 교복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씻고 나왔다. 식탁에는 오랜만에 엄마와 나 둘뿐이었다.
“주신이는 기주네에서 저녁까지 얻어먹고 올 거야.”
“아···너무 폐만 끼치는 거 아네요?”
“항상 고맙지 뭐.”
한참을 식사만 하던 어머니가 큰 한숨과 함께 속에 있던 말을 뱉어내듯 한 말은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문제였다.
“난 주인이 네가 기주를 구하고 다쳤을 때 많이 원망도 했는데 역시 엄마의 속 좁은 사람인 것 같아. 밝고 잘 크는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 아들이 정말 대단한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니···그건···”
“그런데 또 이런 일이 생기니까. 엄마는···.”
“이제 그럴 일 없어요. 위험한 일 안 할 거니까···. 죄송해요.”
나는 다시 한번 약속을 한다.
‘지킬 수 있는 약속일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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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소화 시킨다는 이유로 공원으로 나와서 걷고 있다. 학교 근처와 달리 조금 무거워진 공기만이 지금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다.
공원 구석에는 ‘일찍 터트린 샴페인’ 등이 일 면에 실려 있는 신문이 바닥에 구겨져 있었다.
IMF가 터지고 정부는 국민의 사치가 IMF를 일으킨 것처럼 여론을 조정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에서도 당시 한국의 외환위기는 기업의 부실경영과 정부의 무능이 주원인임에도 국민의 사치가 한국의 외환위기를 일으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잘하면 정부 탓 못하면 국민 탓인가?’
내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안나···오랜만이에요.”
“자주 연락하라니까.”
“미국하고 이곳 시차를 생각하면 연락하기 어렵죠.”
“저번에 투자했던 메가존이 작년 말에 상장한 가격에서 얼마나 뛰었는지 알아?”
“하하···얼마나 뛰었는데요?”
“주당 6달러에 샀던 메가존 주식이 주당 160달러 넘게 올랐어. 물론 주식 지표가 가장 좋을 때 기준이지만···투자금하고 세금을 제외하더라도 백만 달러 넘게 벌었다고!”
“대단하네요. 거기에 안나가 가져갈 수수료는 빼야죠.”
“정말 순수익에 10%를 내가 가져도 되겠어?”
“그게 우리 계약인걸요.”
“그런데 너라면 또 다른 투자법이 있어서 이렇게 오랜만에 연락한 거겠지?”
‘가지고 있으면 더 오르겠지만 IMF가 터진 지금 국내에 투자했다가 다시 돌리는 게 더 수익률이 높을 거야.’
“이번에는 부동산에 투자해 보려고요.”
“어디? 미국 뉴욕? 여기 집값이 비싸기는 한데···.”
“아니요. 한국 서울시에 투자할까 해요.”
“한국은 이번에 IMF 터져서 투자에 빨간불 들어온 나라인 건 알고 말하는 거지?”
“원래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죠. 그리고 지금 늘어난 수익의 전부를 투자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럼?”
“주식 중에서 한화로 10억 정도 현금으로 만들어서 제가 처음에 제안했던 빌딩을 구매해줘요,”
“정말 한국 부동산에 투자하려고? 다른 시기라면 모르겠지만 구제금융지원을 받는 지금···.”
“지금이 위기니까 기회라고 봐요. 환율도 그렇고 그 빌딩은 의미가 있으니까요.”
“하긴 처음부터 그런 제안에서 시작한 회사긴 했지만···.”
“그럼 이번에도 시작해봐요. 설마 여기서 만족하는 건 아니죠?”
“그건 아니지. 좋아. 내가 뭘 해주면 되는 거야?”
“제가 원하는 빌딩을 투자사 이름으로 구매해주세요. 그다음은 빌딩을 확보하면 말할게요.”
“그럼 나머지는? 다른 부동산을 구매해?”
“아니요. 미국에서 돌아다니는 코인을 구입해 주세요.”
“코인? 기념 코인으로 투자하려고?”
“아니요. 제가 말하는 코인은 골드코인이라고 암호화폐에요.”
“암호화폐? 말은 들어본 것 같아. 그런데 아직 확인되지 않은 시장이라서 리스크가 너무 큰데?”
“쉽게 생각해요. 투자해서 늘어난 순수익 중 제가 받아야 하는 배당을 한국으로 보낼 때 코인으로 보내면 수수료도 최소 거기다 세금도 나가지 않아요.”
“세금이 안 나간다고?”
“배당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거기다 미국 달러를 국외로 반출한다?”
“그럼 암호 화폐시장이 커지면 커지지 작아질 수 없겠구나?”
“눈치챈 건가요? 하지만 지금 풀린 코인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금액만큼 보내는 건 불가능할 거에요.”
“그렇지만 앞으로는 달라진다는 거지?”
“역시 이해가 빨라요.”
“그렇다고 지금 시중에 풀린 코인을 대량으로 사는 건 안 되겠지?”
“그렇죠. 갑자기 큰 손이 들어와서 시중에 있는 코인을 전부 쓸어간다면 관심이 집중되고 빠르게 가격이 오를 거에요.”
“신중하게 접근해볼게.”
“그렇다고 골드코인 확보가 늦어지는 건 안 돼요.”
“알겠어. 그 정도 조율은 주식시장 살피는 것보다 손쉽지.”
‘코인 차트는 24시간이라서 앞으로는 힘들 텐데···어쨌든 안나 잘 부탁해요.’
“그럼 골드코인 구입현황하고 내가 말했던 부동산 구입이 끝나면 연락할게.”
“네. 잘 부탁해요. 그리고 빌딩 구매할 때 기준보다 높게 부르면 차라리 코인에 더 집중해주세요.”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