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재능>
시원하다기보다는 얼음 같은 계곡물이 내 정신을 맑게 했다. 이제는 익숙한 오두막을 향하자 대백공이 노을 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친구 어서 오게···.”
나는 흐릿했던 초점이 맞춰지면서 맑아진 시야로 대백공이 바라보던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붉은 양탄자를 하늘에 섬세하게 수놓은 것처럼 아름다웠지만 실제로 보지 않는 이상 그 감동을 전달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오늘은 재능을 얻기 위해서 온 건가?”
“그게···정의의 저울을 사용해서 특이점을 오히려 사용했는데요?”
“자네의 행동으로 한 친구의 삶의 방향이 전환되었으니 특이점이 크게 쌓였다네···.”
“설마···재민이···?”
“보지도 못한 부모를 원망하고···원망하기만 하다가 스스로 삶을 포기할 아이에게 새로운 시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이니 말일세.”
“전 그럴 의도가···.”
“의도와 다르게 다른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지. 이번 일도 그렇고···.”
나는 대백공의 말을 곱씹다가 대백공이 언급했던 재능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럼 저번에 말씀해주신 재능을 받을 수 있다는 건가요?”
“다행히 시기가 맞아서 가능하다네. 자네가 저번에 재물복을 선택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못했던 재능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하지.”
“재물복을 선택했을 때는 그저 재물복이 나타날 거라고만 말씀하셨잖아요?”
“후후···자네가 지금 받게 되는 재능은 쉽게 생각할 재능이 아니기 때문이지.”
“쉽게 생각할 재능이 아니라면···?”
“인세를 빛낼 재능이 허무하게 스러지니 하늘이 그 재능을 걷어가기 전에 기회를 준 것이지.”
“도대체 무슨 능력이길래 인세를 빛낼 재능이라고까지···.”
“아쉽게 꽃피우지도 못하고 죽었던 인하라는 소녀의 재능이라네.”
“네?”
“세상을 놀랍게 만드는 재능이지···. 아픔을 치유하고 세상을 밝게 만드는 재능 말일세.”
“무슨 재능이길래···?”
“후후···.”
“자신의 고통을 아름답게 예술로 승화시키는 재능이지. 상처받은 이들을 향한 따뜻한 메시지가 담긴 시대를 초월한 예술 작품을 만들 재능이지. 그런데···시일이 지나서 재능이 세상으로 좀 흩어졌다네.”
“재능이 흩어진다고요?”
“하늘이 내린 재능은 계속 흐르지···이번처럼 큰 재능이 한곳에 모여있는 경우도 발행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능은 흐름 속에서 인연이 닫게 되는 곳으로 간다네···. 사용하지 않는 재능도 휘발되듯 사라져 다른 이에게 발현되기도 하고 말이네.”
“재능이 휘발된다고요?”
“사용하지 않는다면 재능이 있다 해도 의미가 없지 않겠나? 그렇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지.”
“···?”
“그렇게 인연이 생겨서 재능을 얻더라도 인간 각자가 가진 달란트가 다른 만큼 어떻게 그 재능이 재주로 나타나는지는 천차만별이라네.”
“그럼···.”
“인하라는 소녀는 자신의 아픔을 책갈피에 담아서 그 기억을 조금씩 꺼내 치유하면서 그걸 다른 이들과 공감할 수 있도록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재능으로 개화할 예정이었지.”
“그럼 저도 예술에 재능을 가지는 건가요?”
“아니네.”
“그럼···.”
“자신이 가진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재능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흠···기억 책이라는 재능을 받게 될걸세.”
“기억 책이요?”
“그저 내가 붙인 별칭이지.”
“별칭이 기억 책이면···기억을 책처럼 보관한다는 건가요?”
“기억을 순간 장면처럼 인식해서 그걸 아주 깊은 곳에 간직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펼쳐보는 재능이지.”
“···?”
“기하라는 소녀가 기억 책이라는 재능으로 개화하게 된 개기는 참으로 참담하지만, 재능으로서는 아주 놀라운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기억 책이라는 재능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나요?”
“감당하기 힘든 기억들을 조각내서 차곡차곡 깊은 곳에 정리해두는 것이지. 아픈 기억을 자신이 만들어낸 책 속에 보관하면 망각한 상태가 되지만 필요한 순간 그런 기억을 펼쳐서 자신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재능이었지.”
“그런 재능이 싹 틀 정도로 기하는 힘들었던 걸까요?”
“아마···어머니와의 추억과 감당하기 힘든 현 상황을 분리하고 싶어서 개화된 재능일 걸세···.”
“같은 재능을 받아도 개화하는 재주는 각자 다르다고···그런데 제가 기억 책을 그대로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자네는 특이점의 보상으로 승계받는 것이니···가능하다네.”
“그럼 승계를 받는 중에···그러니까 예술적인 부분은 없다고 하신 거면···.”
“재능은 한자리에 그래도 있는 것이 아니라네. 한정된 재능이라는 풀에서 인연이 닫는 이들에게 순환되는 것이지.”
“한정된? 순환이라고요?”
“하늘이 내린 천재라는 사람들이 단명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한곳에 재능이 몰려있으면 흐름이 막힌다네. 그래서 너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은 채 꽃피우기도 전에 죽고 말지.”
“인하도 그런 경우인가요?”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자니 난해하구만···예를 들자면 아주 유명한 가수가 일찍 죽는다든지 젊은 영화배우가 몇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기억한다든지···당시에는 고통받던 가난한 화가의 그림이 세월이 지나면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 같은 경우를 들 수 있겠지.”
“인하는 학교에서는 그렇게 예술적인 면을 특출나게 보여준 적이 없는데요.”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학교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나?”
“아···.”
“그저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지. 천재는 때로는 이해받기 힘들다네···.”
“만약 인하의 재능이 제대로 개화될 수 있었다면···.”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건 없지만···굳이 따지자면 자신이 받은 고통을 처절하게 표현하는 것보다 그걸 승화시켜서 치유하는 재능은 쉽게 나타나지 않거든. 아까운 재능이지.”
“어째서죠?”
“생명이 움텨서 자라나는 것보다 죽이는 게 쉬운 것과 같은 이치라네.”
“죽이는 게 쉽다?”
“인간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게 쉽지. 살리는 것은 백 명의 인간이 나서도 해낼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죽이는 것은 한 명의 인간만 결심하면 가능하지. 그처럼···자신의 아픔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보다 아픔을 치유로 승화시키는 예술이 더 찾아보기 힘들다네.”
“인하로부터 받게 되는······.”
인하의 재능을 승계받는 만큼 제대로 사용해야겠다는 다짐하면서 기억 책이라고 별칭한 재능에 대해 질문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대백공이 점차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멀리서 하지만 또렷한 대백공의 말이 귓가에 남는다.
“정의의 저울은 신기지만 동시에 도구일세···. 도구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선도 악도 될 수 있지···.”
그 말과 동시에 나는 아직은 익숙하지 않는 내 방의 흰 벽지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도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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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다닥.
경쾌한 도마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대백공을 만나고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 눈을 따갑게 하는 햇빛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줬다.
끼익,
방문을 열고 나가자 보이는 익숙한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보글보글 무엇인가 끓어 오르는 소리를 배경으로 깔끔한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딘가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연 방문 소리를 들었는지 어머니가 먼저 인사를 한다.
“주인아···일어났니?”
“네. 아침부터 뭘 이렇게 만드셨어요. 전 괜찮은데···.”
“어제 종혁이가 너 기운 없어 보인다고 하던데 아들은 집에 오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어 버리고 요즘 신경 쓰이는 사건이 많았었잖아. 몸이 지칠 만도 하지.”
“그래서 백숙하신 거예요? 손 많이 갔을 텐데···.”
“괜찮아. 우리 아들 먹을 건데 하나도 힘들지 않아. 어서 자리에 앉아 거의 다됐다.”
“주신이는요?”
“지금 시간이 몇 신데···벌써 친구들하고 놀러 나갔지.”
“애들끼리만요?”
내가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진정하라는 듯 어머니가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고는 말했다.
“단지 내에 놀이터에 놀러 나간 거야.”
“차라리 저를 깨우지 그랬어요?”
“피곤해서 기절하듯 자는데 어떻게 깨우겠니. 그리고 괜찮아. 기주 어머니가 같이 봐준다고 했으니까.”
“기주 어머니요?”
“이번 사건 겪고 나니까. 생각이 많아졌나봐. 여기 단지는 경비아저씨도 있고 부족하지만 CCTV도 있고···거기다 초등학교 바로 옆 단지라고 같은 나이대 학부모가 많으니까. 서로 살피는 눈도 있잖아. 기주하고 성주한테 좋은 환경이다 싶어서 이사했다고 하더라. 성주는 기주 동생인데 넌 아마 기억 못 할 거야. 병원에 입원했을 때 잠깐 봤다고 하던데?”
“주신이가 좋아하겠네요.”
“그래. 방금도 아침 댓바람부터 기주네 간다고···내가 오히려 붙잡고 있다가 데려다줬다니까.”
“그런데 기주 어머니 혼자서 아이들 세 명이나 보면 힘들지 않을까요?”
“기주 엄마가 먼저 말했어. 자기가 시간 날 때마다 아이들 봐줄 테니까. 서로 돕고 살자고···그리고 너한테 정말 고맙다고 몇 번이나 그러더라.”
“그거야···.”
“엄마도 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럽던지···그렇다고 또 위험한 일에 끼어들거나 하면 안 된다. 허 순경이 와서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는데···.”
“허 순경 아저씨가요?”
허 순경이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여기서 형이라고 하면 어머니가 잘 아는 사이냐고 질문하면 설명하기 곤란하다.
“아참···이번에 진급했다고 했는데 입에 붙으니까 잘 안 바뀌네···어쨌든 이런 유괴사건은 이번처럼 잘 풀리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목격자한테도 충격이 클 수 있다고 경찰에 맡기라고 하면서 네 칭찬을 얼마나 하던지···.”
“아···네.”
경찰이 얼마나 좋을지 어머니한테 홍보를 한차례하고 가셨나 보군. 잊을만하면 강조하는 게 진짜 이러다가 경찰로 진로가 정해지는 거 아닐까?
‘뭐 경찰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좋은 사람은 어디서나 좋고 나쁜 사람은 어디서나 나쁜 것이지 경찰이 나쁜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