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피해자? 가해자?>
방학이 되면 종혁이나 경수와 만날 일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도서관에 다 같이 모여있었다.
“공부해야지.”
“하···피 같은 내 방학이···.”
“너 모의고사 비 내리던 거 어쩌려고?”
도서관에 자리 잡고 중학교 1학년 과정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굳어버린 머리는 좀처럼 글자를 머릿속에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난독증 아니냐?”
‘얼마 만에 책을 제대로 본 거지?’
회귀 전 스마트폰과 인터넷 그리고 유TV에 중독된 나는 어느새 글자라는 걸 읽기 어려울 정도로 산만해진 상태였다.
나는 꿈쩍도 안 하는 경수는 포기하고 종혁이를 불러내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휴게실에서 버티는 중이었다.
“이제 자리 가서 한 글자라도 봐야지 않아?”
“그러게···.”
“요번에 큰일 연달아 겪으면서 많이 힘들어서 그래?”
어제 대백공이 준 선택지 중 재능을 골랐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벗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나 먼저 들어간다.”
“뭐?”
“도저히 공부가 안돼서 다른 대책이 필요한 것 같아.”
“주신아?”
“핸드폰으로 연락해···,”
나는 도서관에서 나오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일을 무모하지만 시도해 보기로 했다.
“김 씨 아저씨 의뢰할 게 있는데요.”
나는 학원가로 걸어가면서 김 씨 아저씨에게 전화하고 눈으로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역시나···.’
방학이 끝나기 전에 내가 한마디 했던 것 때문에 학교는 빠지지 않았지만 방학하자마자 PC 방에 있는 뒷모습을 보니 변재민이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건 바뀌어도 좋을 텐데···.’
쓰게 웃은 나는 재민의 뒷모습을 보면서 툭 치자 이번에는 인상을 쓰거나 하지 않고 놀란 표정으로 바로 뒤돌아봤다.
“안녕.”
“하하···안녕.”
“왜 그렇게 놀래. 내가 괜히 미안하게. 내가 부탁 하나 하려고 하는데···.”
“무···무슨 부탁···?”
“때리고 맞는 역할이라고 할까?”
“뭐?”
“물론 네가 맞는 역할이야.”
“주···주인아··네가 말해서 학교도 가고 그랬잖아. 재하하고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나한테 맞으라는 소리가 아니야.”
“뭐?”
“너를 때려줄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거지.”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의 재민이에게 여기까지만 말하고 밖으로 따라 나오라고 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따라 나왔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억한 심정이야. 물론 첫 단추를 잘못 꿰긴 했지만 결국 네가 원하는 데로···.”
“재민아 너 실업계 지원했다며?”
“어···그건 어떻게 알았어?”
“담임선생님이 말하더라. 성적 괜찮았는데···재하 퇴학당하고 그때부터 엉망이었다고···.”
나는 말 없이 자기 발끝만 보는 재민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너 송태연이라는 사람 동경했다며···.”
“넌 못 봐서 그래···그 형 태권도 할 때 진짜 날아다녀···.”
“그래?”
“우리 보육원에 자랑이었어.”
“너? 부모님은?”
“문 선생님이 말 안 했어?”
“그건 몰랐지. 그냥 성적 떨어져서 안타깝다고 학교라도 잘 나와서 출석이라도 되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몰랐는데···문 선생님 좋은 분이셨구나···.”
“뭐?”
“나 태연형하고 같은 보육원 출신이야. 난 선생님이 내 앞에서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
“우리 보육원 원장님하고 통화할 때 부모님 아니면 어머님이라고 부르시더라고···.”
“아···.”
학교에서 보육원 출신이라고 배척당할까 봐 보육원 원장과 통화할 때 일부러 호칭에도 신경 쓰고 통화하거나 말한 거다.
‘하긴 허 순경이 날 찾아왔을 때도 괜찮다고 하는데도 한쪽에 자리 잡고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같이 듣고 계셨지?’
체육과 문 선생님이 같은 선생이라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껴야 했다.
‘선생이라고 전부 인격자도 아니지만, 선생이라고 전부 체육 같지는 않다는 거겠지.’
“그럼 PC 방 갈 돈은 어디서 구하는 거야? 아직도 삥 뜯고 다니는 거야?”
“아니야. 그건 재하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그런거고···.”
“그럼 PC 방 비용은?”
“재하 아버지가 주셔···.”
“뭐?”
“너는 전학와서 잘 모르겠지만 나하고 같이 재하한테 찍힌 친구가 있었어.”
재민은 거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순간. 나는 익숙해지지 않는 아찔한 두통과 귀속에서 울리는 이명을 참으면서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집중했다. 흐릿한 오래된 사진 속 장면처럼 느끼는 것과 동시에 사진이 움직이는 듯한 이상한 부유감이 느껴진다. 이명이 섞인 듣기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점차 대화 소리가 선명해진다.
재민이의 앳된 모습과 단정한 잘생긴 친구가 재민이와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
“재민아. 괜찮아?”
“죽여버릴 거야.”
“재민아?”
“재하 새끼···.”
“후···선생님한테 말씀드리자.”
“너야 반장이고 공부도 잘하니까 담탱이가 잘 들어주겠지만 나 같은 보육원 새끼가 하는 말 들어줄 것 같아?”
“재민아···.”
“다 꺼져···다 필요 없어.”
“음···그럼 내가 재하한테 말해볼게. 이건 정도를 넘어서서 심각한 문제라고···.”
“너···그러다가 너도 나처럼 될지도 몰라.”
“그래도 우리 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그대로 방치되는 건 반장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
“지훈아···.”
“이제야 이름으로 불러주네. 내가 재하한테 잘 말해 볼 테니까···걱정 말고 기다려.”
흐릿했던 사진이 붉게 불타오르는 것처럼 눈을 아프게 하더니 이명이 점차 커지면서 누군가 크게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순간 장면을 놓치고 제정신을 차리자 보이는 건.
“지훈아···지훈아. 안돼···미안···나 때문에···아악···.”
재민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처참한 시체 앞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는 모습이었다. 너무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었을까?
아찔한 감각과 함께 혼란스러운 상태로 나를 마주하고 있는 재민이의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너···재하하고 도대체 무슨 관계야?”
“나···난···날 도와주겠다고 한 친구를 배신했어···.”
“뭐?”
나는 단순한 부탁을 할 생각이었던 재민이의 심각한 모습에 햄버거 가게로 데려가 차가운 음료를 건네고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진정이 된 것 같아서 말했다.
“친구를 배신했다고?”
한참을 말없이 속이 탄다는 듯 차가운 음료만 마시던 재민이 입을 열었다.
“난 왕따였어. 보육원 출신에 태연이 형마저 추락하고 난 다음 기댈 곳도 없었지.”
“담임은?”
“문 선생님이 특이한 거지. 이제까지 담탱이는 내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숨길 생각도 안 했어. 그래서 학교에서는 알만한 놈들은 다 알았지.”
“그래서 재하의 타깃이 된 거야?”
“맷집 좋고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고 재하한테는 최고의 샌드백이었지.”
“그런데 배신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다들 내가 보육원 출신이니까 왕따를 당해도 외면하지 말을 걸어주거나 하는 애들은 없었거든. 그런데 2학년 때 반장인 지훈이만 달랐어. 공부도 잘하고 잘생기고 성격까지 좋았지.”
“···.”
“그런데 나를 돕다가 재하한테 죽은 거야.”
“재하가 죽였다고?”
“내 눈으로 봤으니까 알아. 옥상에서 나 대신 재하하고 다투다가 재하가 성질을 못 이겨서 지훈이를 뒤로 밀어버렸지.”
“넌···왜···.”
“난···비겁하게 도망쳤어.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준 지훈이도 없는데 여기서 재하 아버지가 내미는 합의를 안 하면 또 그 지옥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거든.”
나는 재민이의 기억을 보게 될 때 최대한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조정했는데도 재하 앞에서 끝을 모르고 떨어지는 자존감과 손발이 떨리는 공포감 그리고 두려움을 읽었기 때문에 재민이에게 어째서 끝까지 재하의 횡포에 대항하지 못 했냐고 말하지 못했다.
‘나라면 재민이와 같은 상황에서 홀로 버틸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난 돈이 꼭 필요했어. 방금처럼 계속 게임에 빠져 있던지 다른 생각을 안 하면 머리에 계속 지훈이 마지막 모습이 떠나지 않았어. 그리고 치료비도···.”
“치료비?”
“태연이 형 치료비.”
“치료비라니 무슨 소리야?”
“태연형 다리 낫게 해주고 싶어서···.”
“그런데 합의금을 모은다고?”
“PC 방에서 쓰기는 했지만 한 달에 50 만원 씩 주는 합의금 매달 절반 이상은 적금하고 있었어.”
“합의금을 쪼개서 준다?”
“원래 그런 거 아니야?”
“원래는 그렇지 않지. 조건이 뭔데?”
“내가 사건 관련으로 떠들고 다니지 않으면 그럼 매달 생활비로 주는 거야.”
“그런데 지금은 왜···.”
“태연형이 이번에 피해자 지원재단인가? 거기를 통해서 수술받고 재활치료도 지원받을 수 있다고 들어서 그래서···.”
‘내가 한 행동이 이렇게 영향을 미친 건가?’
“그래서 앞으로는 어떡하려고?”
“지훈이에게 잘못도 빌고 제대로 사건도 밝히고 싶었어.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기회가 된다면 이제까지 모은 돈으로 태연형하고 같이 가게 하자고 하려고 했지.”
“무슨 가게?”
“태연형은 오토바이 좋아하고 난 차 좋아하니까 정비소 차리려고 그래서 실업계로 지원한 거야. 뭐···성적도 그렇지만···.”
“그래도 다행이네.”
“응? 뭐가?”
“그래도 꿈이 있어서···.”
“무슨···.”
“내 부탁 들어주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정비소 바로 차려줄 수 있는데 어때 들어볼래?”
“뭐? 네가 무슨 정비소를 차려줘?”
“나 생각보다 돈 많아.”
“소문으로는···.”
“못 믿겠으면 우선 착수금으로 받아.”
내가 만 원권 뭉치를 건네자 당혹스러운 음성으로 재민이 말했다.
“이건 내 한 달 생활비나 다름없는데···.”
떨리던 손이 이내 돈을 굳게 잡더니 말했다.
“말 만해···내가 몇 대 맞아주면 되는 거야?”
눈을 감고 나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재민을 징그럽다는 듯 밀쳐내고는 간단하게 말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한 대만 맞으면 돼 어차피 아프지도 않을 거야.”
“뭐?”
자신을 샌드백으로 만들 생각으로 돈을 건넸다고 생각했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내 말을 다 듣고는 멍한 표정이었다.
“너는 정말···.”
“왜?”
“내가 아니라 네가 지훈이 옆에 있었다면···.”
“그런 가정은 무의미해. 그래서 한다고?”
내가 계획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재민이는 PC 방에서 게임을 할 때의 어딘가 찌든 표정에서 제 나이대로 보이는 표정을 만들면서 밝게 말했다.
“그런 일이라면 돈 안 받고도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