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작지만···작아서 더 소중한 행복 2>
대백공의 일침 섞인 지팡이 질에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머리를 혼란하게 하던 감정을 누군가 강제로 깨끗하게 지워낸 것처럼···
나는 위화감을 감추듯 밤새도록 있었던 사건에 대한 사실을 정리했다.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내 가슴을 붙잡고 놓지 않았던 무언가와 씨름하는 대신 내가 해야 할 일에 먼저 집중하기로 했다.
타닥.
아침에 어머니하고 아침 식사 준비를 도와드리고 나왔더니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했다.
‘늦지는 않겠지?’
시간을 쪼개서 쓰고 있었기 때문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하지만 육체는 도파민에 중독된 듯 더 빠르고 더 가볍게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목적지로 나를 움직이게 해줬다.
‘몸을 혹사 시킬수록 더 강해지는 것 같은데?’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평소와 다르게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은 내가 원하는 장소로 평소보다 더 빠르게 도착해 있었다.
깜깜한 하늘 저편으로 밝은 빛이 넘어오고 있었다.
점차 밝아지는 시야에 보이는 곳.
‘골목길···꼭 오랜만인 것 같네.’
만 하루···아니, 사실 잠을 자지 않아서 시간관념이 다르게 느껴진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이곳에서 등교를 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던 게 바로 전인데도 기억 속 페이지가 넘어간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마음가짐의 문제인가?’
깜깜한 새벽이 지나고 이미 출근 시간은 지나고 학생들 등교 시간 전의 적막감이 감돌았다.
코 끝에 지나가는 아침밥 내음과 설거지를 하는 물소리 들리고 등교 준비를 하는 집안의 소란스러움은 잡혔다.
하지만, 골목길로 나오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막한 골목길에서 나는 소음이라고는 나의 발걸음 소리뿐이다.
저벅 저벅.
나는 잠시지만 아늑했던···
내가 회귀해서 처음 걸어들어왔던 골목길을 다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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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얼마간의 시간 후 종혁이가 대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반긴다.
“어여···.”
“야, 너 이사 갔잖아. 그런데 내가 왜 여기서 나와?”
“이사 가서 자려다 보니 잠이 안 와서 일찍 일어났네. 뭐···그냥 천천히 등교할 생각으로 걷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잠자리가 바뀌니까 잠이 안 와?”
‘아니···자고 싶은데 잘 수가 없었어.’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나는 시선을 종혁이 뒤로했다.
‘철컥’
학교로 향하면서 골목길 끝자락 정도까지 걸어갔을 때 익숙한 대문 여는 소리에 나와 종혁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왔다.
“종혁야. 이거 놓고 갔어.”
“엄마?”
“그래? 다 챙긴 것 같았는데?”
종혁이 어머니가 내려오시다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웃음을 보였다.
“종혁이하고 같이 가려고 온 거야? 이제 꽤 멀 텐데···.”
“잠이 안 와서요. 그리고 이제 방학도 얼마 안 남았는데···그때까지는 같이 등교하고 싶어서요.”
“호호···그래? 조금만 일찍 왔으면 아침도 같이 먹고 갈 걸 그랬다.”
“아네요. 집에서 먹고 왔어요. 그런데 손에 들고 계신 건···.”
“어머···내가 종혁이 준다고서는···. 이거 오늘 경수 만나러 가면 전해줄래?”
부피가 크지 않은 쇼핑백 안에 포장된 상자가 들어있었다.
“내가 경수 만나러 간다고 말했어?”
“그런 건 말 안 해도 엄마는 다 아는 법이야. 학교 늦겠다.”
“네? 알겠다고···.”
나와 종혁이는 종혁이 어머니에게 일별하고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종혁이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나는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어두웠던 하늘이 점차 밝아지면서 이제는 푸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끄럽지만 동시에 조용했던 학교 수업이 끝나고 나와 종혁이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경수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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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종혁이가 병문안을 위해서 하굣길에 바로 병원으로 향하면 도착하는 시간대가 보통 점심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익숙하게 점심 메뉴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
“계속 햄버거 먹었더니 물리지 않냐? 순댓국 어때?”
“순댓국을 먹느니 차라리 햄버거를 한 번 더 먹겠다.”
“순댓국이 어때서 이건 우리나라 역사를 함께한 음식이라고 세계가 인정할···!”
“그래··그래···.”
종혁이는 하나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점심 메뉴를 고민하더니 말했다.
"돈가스 먹으러 가자.”
“그래···너 먹고 싶은 거 먹어라. 그런데 경수도 괜찮데?”
“가서 물어보면 되지. 그런데···입맛 없어서 우리가 가자는 곳으로 갈걸?”
하지만 우리는 기운이 없을게 걱정된 상태로 병문안 간 게 무색할 정도로 밝은 경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뭐?”
“벌써?”
“응 경과 봐서 내일이면 퇴원 가능할 정도래.”
“다행이다. 그런데 진짜 그렇게 빠르게 퇴원해도 되는 거야? 병원비는 어차피 보험으로 처리된다면서 완전히 나을 때까지 병원에 계시는 게 좋지 않아?”
“보험 덕분에 치료비 걱정은 없지.”
그러면서 나를 묘한 눈으로 보는 경수의 눈을 피해서 나는 병원 천장의 패널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몇 개야? 도대체···검은 가방 숫자가 세어봤을 때 가방이 7개였으니까···.’
다른 걸 세다가도 계속 고액 엔화가 가득 들어있던 돈 가방 안에 든 금액에 신경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도 병이네···병···.’
액수라도 확인해볼 걸 그랬나?
“수술 끝나고 이제 경과 보면 바로 퇴원 가능한데···.”
“개복 없이 수술했는데도 경과 보는 거야?”
“혹시 몰라서 전신마취를 했거든 깨어나서 다른데 이상 없는지 확인하는 게 주된 이유라고 하더라.”
“개복수술도 아니고 무슨 신기술로 손쉽게 하는 수술이라면서 왜 전신마취까지···.”
“혹시 몰라서 안전하게 마취하고 수술 진행한 거라고 하더라. 익숙하지 않는 의료 장비들이 환자 옆에서 움직이면 긴장하고 움직여버릴 수 있다고···.”
“아···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내일 바로 퇴원하시는 거야?”
“아니···아빠는 바로 퇴원하고 싶어 하는데 엄마가 결사반대야. 최소한 이번 주까지는 입원하지 않을까?”
“그래. 혹시 모르니까 좀 두고 보는 게 좋지. 그래도 수술도 성공적이고 상태도 안정적이라니 다행이다.”
“그래서 점심 뭐 먹을 건데? 종혁이는 돈가스 먹고 싶데.”
“사실 입맛이 없는데···먹고 싶은 건 있어.”
“어? 뭔데? 오늘은 경수 먹고 싶다는 걸로 먹자.”
종혁이는 자신과 입맛이 비슷한 경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결정하듯 말했다.
“오늘은 순댓국 먹어볼래.”
“뭐? 순댓국?”
종혁이가 깜짝 놀라서 다시 물어보자 경수가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뒤통수를 만지면서 종혁이의 시선을 피했다.
경수는 나보다 종혁이 입맛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잘 알 테니까.
“갑자기 순댓국? 나야 괜찮은데···.”
말하면서 나는 종혁이와 경수를 차례로 바라봤다.
“그게···아빠가 퇴원하면 가장 먼저 먹고 싶은 음식이 뭐냐고 엄마가 물어봤는데···.”
“물어봤는데? 설마?”
“응. 순댓국 먹고 싶다고 가족끼리 다 같이 가고 싶은 오래된 맛집이 있다고 말씀했거든.”
“아···그럼···?”
“아빠···퇴원하고 간 순댓국집에서 맛있게 먹고 싶어서 먼저 먹어보려고···.”
나는 멍한 표정이 된 종혁이의 어깨에 팔을 걸치면서 밖으로 끌어당겼다.
“가자. 순댓국집.”
뽀얀 국물에 붉은 다진 양념이 들어가자 한눈에 보기에도 뜨뜻해 보이는 국밥이 완성되었다. 내가 먹는 방법을 따라 하려다가 도저히 안되겠는지 순대만 건져 먹는 종혁이의 모습이 맞은편에서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고 뜨끈한 국물을 위장에 집어넣었다.
‘카하···살겠네···.’
어제부터 찬바람에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관절까지 풀리면서 몸속에 뜨끈한 국물이 몸의 피로를 풀어내듯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너무 맛있게 먹어서 였을까?
반신반의하면서도 경수가 내가 먹는 모습을 따라 먹기 시작했다.
“어? 나쁘지 않은데?”
“뭐가 나쁘지 않아야? 엄청나게 맛있으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먹고 있지.”
나와 경수의 반응에 뽀얀 국물을 수저로 뜨고서도 한참 고민하던 종혁이가 말했다.
“돼지 비린내나 잡내 없어?”
“들어가 있는 고기 부위가 생긴 것만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냥 고기 먹는 맛이야. 오히려 고기 구워 먹는 것보다 부드러워서 식감도 좋은데?”
경수의 반응에 한번 속아주겠다는 듯한 포즈로 한입 크게 떠서 먹은 종혁이 놀랐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이거 곰국이랑 비슷한 맛인데? 좀 더 진한 느낌?”
“곰국도 정성이지만 거기에다 이것저것 돼지고기 부위 중에서 구이나 찌개용이 아닌 부위나 내장을 오래 삶아서 썰어 낸 거야.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고···.”
“눈감고 먹으면 맛있어.”
“어···오도독거리는 부분도 있다.”
‘어제 밤새 야간근무한 것 같이 다들 맛있게 먹을 거면서···. 실제로는 내가 어제 밤새 고생했건만···.’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자신들이 싫어할 수 없는 맛이라는 걸 알게 되자 나보다 더 빨리 먹기 시작했다.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우리는 순식간에 순댓국을 마시듯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아저씨가 자리에 앉아서 순댓국을 주문하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순댓국집 메뉴판의 가격을 보니 다시 검은색 가방에서 고액권 엔화가 머릿속을 점령했다. 돈 가방의 무게만 대충 헤아려도 백억 단위는 넘을 것 같은 돈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 회귀 전 물가 속에서 생활하던 버릇 때문에 회귀 후 물가와 괴리 때문에 돈에 대한 관념을 잡기 힘들었다.
‘지금 높은 환율을 생각하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원화로 따지면 더 큰 돈일 수도 있어···도대체 그런 큰돈이 어디서 나왔을까?’
식당을 나서면서 식당 앞에 준비되어있는 자판기 커피를 한 잔씩 들고는 마시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