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작지만···작아서 더 소중한 행복>
‘나는 이 순간 어디에 서 있는 걸까?’
공장 주변을 경찰차가 달려오는 걸 확인하고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하면서 든 생각이었다.
정의의 저울을 통한 심판이기 때문에 업, 즉 카르마가 쌓이지 않았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업이 쌓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 실장의 죽음을 방조 아니 살해한 내가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같을 수 있을까?
나는 목적 없이 걷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도착한 곳은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선산이었다. 아버지 산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기가 강해져서인지···
아니면 내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대백공이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의 오두막과 계곡의 모습이 아니었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고산 구름 한가운데를 뚫고 올라온 것처럼 높은 암석지대 맨 위 큰 바위에 허허롭게 올라서 있는 모습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보일 것처럼 대백공의 옷자락을 들쳐내려고 했지만 대백공은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언가 먼 곳의 진실을 탐하듯···
이곳이 아닌 저곳의 풍경을 탐하듯···
‘대백공.’
‘내 질문을 이미 짐작이라도 한 것일까?’
“인간만이 선악을 가른다네.”
“···.”
“자연에 선악이 있을 것 같은가?”
“그건···.”
“땅 위에 우연히 뿌려진 밀알이 자라나 싹을 틔우고 그 싹을 양이 먹고 그 양을 늑대가 잡아먹는 게 이 땅의 흐름일세. 그럼 우연히 뿌려진 밀알은 선이고 늑대는 악일까?”
“···.”
“그저 흐름일 뿐이지. 우연히 뿌려진 밀알조차 누군가 훔치기 위해서 숨겨둔 자루에서 떨어져나온 것일 수 있고 양을 잡아먹는 늑대조차 자신의 새끼를 위해서 먹이가 필요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선악을 나누는 이유는 인간을 벗어나고 싶어서라고 본다네.”
“···벗어나고 싶어서라고요?”
“그렇다네. 그저 존재하는 생물이 아닌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지.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투쟁이요. 삶의 기쁨이지···. 하지만 인간은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의 결집체라고 나는 생각한다네.”
“나쁘다는 건가요?”
“아닐세. 오히려 축복에 가깝지.”
“욕망이 축복이라고요?”
“그 욕망 덕분에 발전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하기 때문이지. 물론 그런 욕망에 잡아먹힌다면···그 끝이 결코 좋다고 할 수 없겠지만···.”
“···다른 생명체와 다르게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하기 때문에 선악을 구분한다는 건···.”
“앞서 말했듯 살아있는 필멸자에게 생존은 투쟁이라네. 결국, 그 안의 흐름은 피가 흐르는 업안에서 이루어진다네. 하지만 인간은 필멸자라는 한계를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도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지.”
“필멸자라는 한계를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선악을 나눈다는 건가요?”
“단정할 수는 없지. 다만, 그렇다고 추측할 뿐이라네.”
“네?”
“나로서는 인간들이 보는 시각과 다르기에 그저 추측하는 것뿐일세. 그저 오랜 시간 지켜보다 보면 그 무리의 방향성을 알게 되기 마련이지.”
“그럼 다른 생명체하고 다르게 삶을 투쟁하면서도 필멸자를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네. 인간들 말로 하자면 선각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지.”
“그게 가능한가요?”
“선재라.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하기 어렵지. 인간은 필멸자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선각자가 될 수 없지. 하지만 선각자 중에 그 시작이 인간이었던 존재가 있다네. 그렇기 때문에 방금처럼 대답한 걸세.”
“그럼···사람이 선각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아닌가요?”
“후후···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인간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코 선각자가 될 수 없는데도? 인간이 선각자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나?”
“인간 중에 선각자가 나온다고 해도 이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건가요?”
“쉽게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
“저는 굳이 선각자가 되고 싶거나 필멸자를 벗어나고 싶거나 그런 게 아닌데 왜 이렇게···.”
“어린 친구···자네가 혼란스러운 건 선악의 기준을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일세.”
“전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신기를 다루는 인간이기도 하지.”
“그 말씀은···.”
“신기 즉 정의의 저울···비록 모조품이라 할지라도 자네가 신기를 다룰 때는 인간의 기준에서 판단하면 안 될걸세. 정확히는 자네만 힘들어지는 것이지.”
“저는···.”
“허어···선재라. 오히려 타락자라면 천금을 받쳐가면서 받아가고 싶어 할 신기이건만···어린 친구 자네에게 고맙군···.”
“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힘을 휘두르는데 쾌감을 얻기보다는 그 힘을 두려워할 줄 알기 때문이지.”
“···.”
“선재라···어린 친구 자네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고 말았구먼."
대백공이 지팡이를 짚더니 이내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분명 육체가 강화되어서 나의 반사신경도 빨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대백공의 공격은 눈으로 보일 정도로 느렸지만 막을 수 없었다.
“아악···.”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은 망각일세···.”
처음 회귀할 때만큼이나 아픈 통증에 노려보듯 대백공을 올려다보자 허허롭게 웃으면서 말하더니 이내 풍경은 선산으로 바뀌어 갔다.
‘뭐야, 자기가 할 말 만하고 사라지고···으윽···더럽게 아프네.’
아버지 산소의 잡초를 뽑고 말없이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향해 문을 열었다.
새집 특유의 도배를 막 끝낸 듯 풀 내음이 먼저 나를 반기더니 거실에서 분리된 주방 쪽에서 어머니의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신이니? 어디 갔다 왔어?”
“주변에 공원이 좋아서 운동 겸 산책갔다 왔어요.”
“말이라도 하고 가지. 갑자기 문 열고 들어오니까 깜짝 놀랐다.”
“하하···놀라게 할 마음은 없었는데···이거.”
“어머. 이게 웬 꽃이야?”
화사한 노란색 프리지어 다발을 받아든 어머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면서 말하려는 말을 가로채면서 먼저 말했다.
“식탁에 올려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어머···난 이런 거···. 꽃값도 비쌀 텐데···.”
“오늘 이사하고 첫날이잖아요. 부담가지실 필요 없어요. 아침이라고 세일 하는 거 사 왔어요.”
“아 참···찌개 올려놨는데···.”
노란색 프리지어 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어머니가 이내 급하다는 듯 다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좋아하는 표정에 나는 이제라도 자주 꽃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이번에는 뭐라고 잔소리를 듣더라도 잊지 않고 선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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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꽃을 좋아한다는 건 회귀 전에도 알고 있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면 ‘꽃값도 비싼데 왜 이런 걸 사와’ 하면서도 좋아하는 표정을 숨기지는 못하셨으니까.
하지만 회귀 전에는 어머니의 ‘이런 걸 왜 사와’라는 타박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그 말을 핑계 삼았다.
살기 바빠서라는 핑계로 어머니에게 한 번도 꽃 선물을 해드린 적 없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살기 바쁘다. 한 번도 여유가 있었던 적이 없다.
살기 바쁘지 않다는 건 목표가 없다는 것이고 목표가 없다는 건 그저 숨만 쉬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그저 숨만 쉬고 있는 게 아닌 역동적이고 살기 바쁜 세상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세상이다.
하지만 역동적인 삶은 언제나 살기 바쁘고 그렇기에 바쁘다는 이유로 우리는 많은 것을 그저 지나치고 만다.
그건 ‘살기 바쁘다’라는 말의 함정이다.
삶은 항상 살기 바쁘다.
재산이 아주 많은 자산가도···.
금욕적인 종교인도···.
하루하루 등교하는 학생들도···.
매일이 힘든 직장인도···.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삶 속에서 삶은 항상 거칠고 역동적이며 그 속에서 살기 바쁘다.
하지만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우리가 둘러보지 못한 아주 작은 것들이 어쩌면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회귀 전 난 어머니가 꽃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나에게 꽃은 그저 아름다운 ‘저것’일 뿐이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어버이날 전화만 드린 적도 많았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였는데도···.’
이후에 삶이 바쁨 속에서도 사람들이 말하는 안정을 찾았을 시기에는 어머니는 더 이상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버이날 작은 카네이션 하나에도 웃음 짓던 어머니의 장례식장.
어머니가 좋아한 꽃으로 장례식장을 찾아온 문상객들이 웅성거릴 정도로 생화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단 하나.
가장 소중한 것을 채우지 못했다.
꽃을 받아들고 행복하게 조금은 곤란하다는 듯 미소짓던 웃음···.
꽃을 받을 어머니는 더 이상 내 옆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시야를 조금만 넓게 보면 보일 일이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든다.
어린 시절 코끼리의 발목에 무거운 추를 달고 키우면 다 큰 어른 코끼리가 되어서도 사육사의 말을 듣게 되는 것처럼···.
경주마의 시야를 가려서 앞으로 달리는 것만 생각하게 하는 것처럼···.
삶이 바쁘고 살기 힘들어서 그래서 행동하던 하나의 행동 두 개의 행동이···
점점 당연시되어버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저 앞을 보고 달리는 것만이 목표가 되어버린다.
‘익숙해서···.’
‘그래왔으니까···.’
‘다들 그러니까···.’
삶이 바쁘고 살기 바쁜 세상 속에서 자신이 바라는 삶의 방향을 원한다면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의 원칙이 필요하다.
‘작지만···작아서 더 소중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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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전에는 돌아가시고서야 장례식장에 꽃다발을 놓아드렸는데···그런 미련한 짓은 두 번 할 필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