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A와 B의 사이 4>
뼛속까지 냉기가 도는 것 같았다.
깊은 물속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안온하고도 추운 멍한 감각.
“허억···.”
내 피바다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다가 숨이 쉬어진다고 생각한 순간.
“흐허억···.”
오랜 시간 산소통 없이 잠수하다가 간신히 공기를 찾은 사람처럼 거칠게 호흡을 이어가던 나는 이내 이곳이 어딘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은 거지?’
온몸에 진흙을 바른 것 같은 찝찝함과 동시에 피비린내가 아직 내가 공장의 비밀문 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무 어두워.’
비밀문은 닫혀 있었고 콧속 가득한 피비린내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어떻게 살아난 거지?’
“재생?”
나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를 가다듬고 벽면을 더듬으면서 스위치를 찾았다. 비밀문 입구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찾은 스위치를 올리자 형광등 특유의 소음과 함께 빛이 들어왔다.
‘정신을 잃은 지···얼마나 된 거지?’
찐따 패거리가 팔 한쪽을 걷어붙이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여러 개의 주삿바늘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흘린 피가 끈적거리면서 내 발걸음마다 나를 쫓아오듯 따라왔다. 나는 비밀 문안을 살펴보다 CCTV가 있는지 확인했다. 비밀공간이어서 그런지 아무런 감시장치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글씨를 쓰듯 움직이며 ‘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내가 걷는 발자국마다 끈적거리면서 따라오던 핏자국이 사라졌다.
‘금고를 어떻게 활용할지 연구해놔서 다행이네.’
금고는 내 소유라고 판단되면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면 뭐든지 입출 가능했다. 심지어 내가 흘린 체액이나 내가 원하면 흐르는 물조차도···
‘다만 이게 섬세함을 요구해서 머리가 아프지만 말이지.’
강화 육체와 재생이라는 초월에 가까운 육체 능력을 통한 공간지각능력이 덧붙여지지 않는다면 불가능할 마법 같은 활용법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내가 왔던 흔적은 깨끗하게 지울 수 있겠는데···머저리가 아닌 이상 죽었다고 생각한 놈의 시체와 핏자국이 없어지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얽히고설킨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고심하다가 비밀공간에서 가방을 가지고 나갔던 이 실장의 모습에 집중했다.
‘이곳에 그런 가방 비슷한 물건은 안 보이는데···이 실장이 가져다 둔 건가?’
깜박이던 형광등이 들어오자 그로테스크한 찐따 패거리의 창백한 표정과 함께 한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에 홀리듯 그곳을 바라봤다.
‘이건···.’
알고 보지 않는다면 찾기 힘들 정도로 작은 틈을 둔 숨겨진 장소였다.
‘공장 벽체와 같은 재질로 덮어 논건가?’
힘을 줘서 밀자 밀리기 쉽게 바퀴를 달아놓은 건지 처음의 육중한 무게와 달리 쉽게 밀렸다.
벽체가 밀리자 육중한 금고가 열린 상태로 그대로 그 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열려 있어?’
안에 금고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보다 열려 있다는 사실에 집중해서 다가가자 이 실장이 왜 열여 놓고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생체 정보와 비밀번호가 동시에 필요한 건가?’
비밀번호와 몰래 알아낸다고 해도 생체 정보는 이미 죽어버린 다음에는 얻을 수 없을 테니 열어두고 나간 것으로 보였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열어놓고 갈 일이 있을까?’
금고 안에는 이 실장이 들고 나갔던 검은색 낚시가방으로 보이는 가방들이 벽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가방을 하나 들어 올렸다.
‘무거워.’
바닥에 내려놓고 열자.
‘이건···엔화?’
그것도 만 엔권이 가방 한가득 들어있었다. 이거 가방 하나만 해도 원화로 따지면······
우우웅.
생각이 깊어지기 무섭게 휴대폰이 진동음이 들려왔다.
‘누구 핸드폰이지···?’
찐따 패거리가 널브러진 사이로 생명을 얻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휴대폰이 보였다.
‘이건···.’
계속 울리던 휴대폰은 수신자가 받지 못하자 이내 어두움 속으로 죽은 것처럼 더는 울리지 않았다.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도 애타게 찾는 가족이 있다는 건가?’
나는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숨겨진 금고로 향해 벽면 가득 채워져 있는 가방을 ‘금고’를 통해 챙기고 내 흔적도 지워버렸다.
‘이미 더럽게 엮인 악연이 되어버렸는데···돈을 두고 갈 이유가 없지.’
찐따 패거리의 핏기 가신 창백한 얼굴을 잊지 않겠다는 듯 보다가 나는 날 듯이 공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 실장이 아니었다면···내 손으로 저들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시간.
나는 답답해진 속을 풀 듯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사 온 아파트는 둔방 초등학교 바로 옆 둔방 양정2단지 아파트였다.
‘결국 평형이 크다고 고민하시더니 초등학교 바로 옆으로 결정하셨구나?’
초등학교 바로 옆의 아파트 단지를 따라 공원도 조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살기 좋아 보였다. 늦은 시간에 되어서야 현관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이제 집에 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해요. 휴대폰을 학교에 두고 와서 다시 가느라···초행 길이이고 하고요.”
“저번에 한번 와 봤다면서···.”
“해지고 오니깐 또 다르네요.”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기는 하네. 저녁 해놨으니까.”
“이삿날인데 자장면 안 먹고요?”
“고생한 식구들은 자장면 벌써 먹었지.”
“어 외삼촌?”
“너희 외삼촌이 도와줬으니까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아직도 짐 풀고 있었을 거야.”
“그건 짐도 아니지. 연미···넌 옷부터 사야겠더라. 짐이 많기는커녕 너무 없어서 걱정이야. 저녁 먹고···.”
어머니의 그늘졌던 표정이 외삼촌을 볼 때는 어린 소녀처럼 보여서 새삼스러웠다.
현관문이 열리고 보이는 아파트 내부는 광택이 도는 흰 벽지와 바닥은 타일을 깐 것처럼 고풍스러운 문양을 보여줬다. 어머니는 내가 현관문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라는 표정이 즐거운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이끌고 방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가지는 내방인가?’
“네 방은 네가 말한 대로 블랙하고 화이트만 넣어서 심플하게 꾸몄는데 너무 삭막해 보이지 않니?”
“저는 이게 좋아요. 이제 수험생 되는데 공부하는데 집중하기도 좋고요.”
“그래···연미 네 방처럼 화사하게 꾸미면 하루 종일 잠만 잘걸?”
어머니가 외삼촌을 타박하듯 등을 때렸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은지 외삼촌은 나를 향해 밝게 웃고는 말했다.
“가구는 내가 알아서 넣었다. 급하게 이사 하게 만들었으니까. 집들이 선물로···.”
“무슨 집들이 선물이 이렇게 과해요.”
“하나도 과하지 않거든? 전부 맞춤 가구도 아니고 급하게 사느라 전부 시중에 나와 있는···.”
외삼촌의 말을 등 뒤로하면서 어머니가 화장실과 거실 베란다까지 보여주면서 즐거워하셨다. 나는 새로운 집의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보다 어머니가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이사하고 나서 처음으로 주신이와 나는 각자 방을 처음으로 가지게 되었다.
주신이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주신이는 낮부터 이사 때문에 힘들었는지 이미 침대에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어머니가 내 등을 두드리면서 조용히 말했다.
“아침부터 이사한다고 정신없었을 거야. 자게 놔두고 저녁 먹자.”
“네. 늦어서 죄송해요.”
“그래도 헤매느라 늦는다고 전화라도 해서 걱정 안 해서 다행이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드린 게 신의 한 수였다.
“여기서 학교 다니면 멀까? 고등학교도 가까운데 짓고 있다는데 하필이면 너 입학 다음 학년부터 신입생을 받는다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주신이는 가까운 곳에서 다닐 수 있잖아요.”
어머니가 나를 빤히 보더니 이매 조심스럽게 말 하셨다.
“주인아. 힘들면 엄마한테 말해도 돼.”
나는 순간 움찔했지만,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당연하죠. 저녁 식겠네요. 저도 금방 씻고 나올게요.”
나는 식은땀과 흙먼지를 ‘금고’에 넣고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심신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기 앞에서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정말 힘들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순간 어머니 질문에 속에 있는 고약한 고민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 나는 이내 샤워기 물줄기 안에서 눈을 감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오늘 있었던 일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새로 이사 온 집은 화사하고 따뜻하기만 했다. 블랙 엔 화이트 구조에 이미 큰 가구들은 빌트인으로 넣어있는 집이었기 때문에 기존에 반지하 방에서 가져온 거라고는 입던 옷과 침구류 뿐이었다.
‘외삼촌이 전부 다시 사야 한다고 난리였지.’
식사 시간 내내 엄마를 데리고 쇼핑을 나가려고 시도했던 외삼촌은 병원에서의 호출에 나가고 이내 집은 적막감마저 흐를 지경이었다.
“따뜻한 유자차야. 오늘 피곤해 보여서.”
“감사해요. 그런데 엄마 혼자 청소하려면 힘들 것 같은데···외삼촌 말처럼 사람 한 명 쓰는 건 어때요?”
“난 괜찮아. 마트 일할 때 틈틈이 파출부 일도 했는데. 이렇게 깨끗하고 짐도 없는 집 청소야···.”
“외삼촌 말처럼 짐이 없기는 해요. 엄마 옷도 사고···.”
“뭘 나는 괜찮아. 사려면 너하고 주신이 옷하고···책···.”
“엄마···.”
“응?”
“난 엄마하고 주신이하고 행복하면 좋겠어요.”
“뭘···엄마도 주인이하고 주신이하고···.”
“엄마··내가 꼭···.”
‘이런 일상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난······.’
“응?”
“아니···다음에 다 같이 옷 사러 가요. 주신 이도 이제 봄옷 살 때 됐잖아요.”
“그럴까?”
‘엄마···난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하고 주신이가 짐같이 느껴지지 않게···
그렇게······
행복해서 넘치도록 소녀 같은 웃음만 지으면서 살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약해지면 안 돼. 남 주인.’
나는 한쪽 구석에 밀어둔 이 실장과 재회를 기다리면서 유자차에 눈을 돌릴 때였다. 맞은편 거실에 걸린 거울 속 내 얼굴은 얼음을 깎아 그 속에 억지로 따뜻한 온기를 심은 것 같은 어긋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