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평범한 삶의 무게>
“어르신!!”
측은지심을 말하는 때부터 점차 멀어지는 음성에 애타게 대백공을 외쳤지만 밝아오는 햇빛을 막을 길이 없었다.
“주인아?”
나를 깨우는 어머니의 손길에 눈을 번쩍 뜨고 상체를 일으키자 깜짝 놀란 듯 몸을 뒤로 물린 어머니가 다급하게 말한다.
“종혁이가 계속 기다리고 있어. 한 번도 늦잠잔 적 없는 애가”
“지금 시간이···.”
“지각하기 직전이다. 빨리 옷만 갈아입고 나와 오늘은 종혁이 아버지가 나가는 길에 태워준다고 기다리고 있어. 빨리.”
나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어머니의 다급한 재촉에 정신없이 세수만 하고 교복을 손에 들고 집에서 쫓겨나듯 골목길로 나서야 했다.
“이야. 웬일이냐? 한 번도 늦잠 잔 적 없으면서.”
종혁이와 종혁이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장난스럽게 나에게 말을 건네는 종혁이의 말에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야, 너하고 나하고 먹는 것도 같은데 이거 뭐냐? 배가 왜 빨래판이야?”
교문에 도착하자마자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종혁이의 팔을 낚아채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교문에서는 세이프였지만 교실까지 우리에게는 아직 널찍한 운동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헉···헉··.”
“뭐야? 아침부터 달리기로 내기라도 했어?”
교실에 도착하자 경수의 인사와 동시에 차임벨이 울리면서 무사히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숨 돌리기 무섭게 아침부터 급하게 뛰어온 우리를 다그치는 경수의 질문에 답하기 무섭게 나는 아직도 정신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무심결에 종혁이와 경수에게 질문하고 말았다.
“너 같으면 말이야.”
“뭐?”
종혁이와 경수가 나의 늦잠에 앞 담화를 하다가 내 질문에 동시에 돌아봤다.
“정말 죽었으면 하는 악당이 있어. 살아있어 봐야 피해자만 양산하는 나쁜 놈. 그런데 그런 놈을 죽이면 내가 강해지네? 그럼 죽일 수 있겠어?”
“어제 밤새 게임 했냐?”
“악당이면···음, 예를 들면?”
“체육 정도···?”
“체육 정도면 죽어도 싸지 않냐? 그런 놈이면 맘 편하게 쓱싹할 것 같은데? 그런데 캐릭터가 빌런 쪽이야? PK 하면 능력치 오르게?”
“좀···아니···아주 현실적인 게임이어서 캐릭터가 PK 하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하거든. 그러다가 완전히 타락하거나···.”
“그럼 정신력 만땅 찍으면 되지 뭐 그런 스탯 없는 설정이면 스킬 정신 방벽 같은 거 그런 거 찍는 거지.”
“아니면 카르마 낮춰주는 퀘스트 같은 거 그런 거 없어? 카오 수치 높아지면 하는 퀘스트 있지 않나?”
“아···.”
나는 종혁이와 경수의 말에서 답을 찾았다.
어제 대백공과의 만남 이후 정신을 제대로 다잡지 못하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체육 같은 죄인들을 두고 보면서 나와 가족 주변 친구들만 신경 쓰고 살고 싶어도 삶이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내가 지혜를 걱정해서 했던 신고는 결국 체육이라는 범죄자를 잡게 해주었고 범죄자를 잡았는데 어이없게 인하라는 새로운 피해자가 나타나 버렸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회귀 전처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내 삶의 건강과 만족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그렇다고 하지만 눈앞에 벌어지는 참상을 눈감고 넘어갈 수 있을까?
‘눈감고 넘어갈 수 있었다면 지금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도 않겠지.’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일어난 체육과 관련된 일련의 일이 운이 좋다는 말로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나는 대백공이 말한 것처럼 대가 없는 힘을 써서 타락하고 그 덕분에 세상의 멸망이 가속해서 힘에 취한 상태를 지속하다가 결국 나 스스로가 가족과 주변 그리고 친구에게 해를 끼칠 걸 걱정했다.
그렇지만 종혁이와 경수의 말처럼 대가 없는 힘이 아닌 대백공이 말한 운이 좋은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뭐든 특이점을 높여서 대백공에게 필요한 술법 하나 받으면 되는 거잖아.’
대백공이 말한 타락화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정신 방벽 아니면 뭐든 도와줄 걸 받아내는 걸 목표로 특이점을 모으면 되는 거다.
나는 그제야 앞을 가로막는 시야가 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대백공이 멸망을 가속화 하는 존재들이 있다고···했었는데?’
나는 다시금 올라오는 혼란을 꾹 눌러 담으며 대수롭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세계가 멸망하는 배경을 가진 게임이면···.”
“아포칼립스 세계관이야?”
“하긴, 요즘 좀비물 같은 거 많지 않냐? 난 바이오 ○자드 한 판 하면 밤에 잠을 못 자겠더라.”
“하··하···그러니깐 그런 멸망을 시키는 걸 막으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퀘스트하면 되지.”
“퀘스트 따라가다 보면 멸망 막는 걸로 끝나지 않나?”
“막, 메이저 한 게임이 아닌 경우에는?”
“그런 경우라도 결국은 게임 속 주인공이 키를 쥐고 있는 거지.”
“아니면 게임이 아니지.”
‘게임도 아니고 주인공도 아니거든···?’
답답한 마음이 절로 일어났지만 결국 내가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을 거다. 대백공이 나에게 경고한 건 말 그대로 내가 타락해서 멸망을 더 가속화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 였을 거고···
‘대백공에게 최소한 멸망을 늦추는 방법을 물어보면 그 방향성이 보이지 않을까?’
회귀 전 같은 삶이라면 세계가 멸망을 하든 당장 없어지든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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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전 평범하다는 말에 속아서 살았다.
하지만 삶의 끝자락에 도달해 보면 알게 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평범하다는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는 걸···
끝나지 않는 평범한 기준을 통과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원하지 않는 종착지에 도착해 후회하는 모습을 서로 지켜보게 된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우리는 서로를 평범하다고 속인다.
일상을 둘러보면 보이는 언제나 불이 켜져 있는 동네의 작은 슈퍼.
그 슈퍼의 주인아저씨는 동네의 슈퍼를 유지하기 위해서 새벽같이 일어나 슈퍼 앞을 청소하고 밤늦게까지 일하며 휴일조차 없다.
그네들의 삶에서 평범은 평소와 같이 새벽에 슈퍼를 열고 한밤중에 문을 닫고 동네 주민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연중무휴로 항상 여는 것이다. 가족과 여행은 한번 갈 수 있을까? 아파도 병원 한번 편하게 갈 수 있을까?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시장이면 의례 보이는 오래된 돼지 국밥집.
어렸을 때는 뜨겁기만 한 국밥을 먹으러 집안 식구들 다 데리고 나갈 때마다 원망스러웠지만 내가 어른이 되고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시장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돼지 국밥집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가격도 올리지 않고 그대로 그 맛을 유지하면서 자리를 지켰지만, 너무 고된 일과에 몸이 축난 국밥집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그 가족 중 누구도 가게를 이어가지 못했다.
‘맛이 없어서?’
아니다.
그네 할머니가 하시던 일과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평범하다가 쉽게 말하는 평범한 일상 속에는 누군가의 땀과 누군가의 노력이 녹아있다. 그런 평범한 틀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발버둥 친다.
누구나 평범하다 쉽게 말하지만 그 평범을 이룩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그네들의 노력을 너무 쉽게 폄하한다는 점에서 평범이라는 단어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를 평범하다 속이며 그 평범하다는 범위를 지나칠까? 모자랄까? 고민하면서 산다. 하지만 평범하다고 하는 주위의 모든 것은 그네들의 피땀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서로의 피땀을 일상이나 평범으로 둘러싸고 쉽게 말하고는 한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등지고 지나오지 않았나?
다른 이들처럼 적당한 성적을 내기 위해 대학을 가기 위해 직장을 가기 위해 가정을 이루기 위해···
우리네가 정말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기 위한 평범이라는 단어에 속아서 산다면 삶은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공부하는 게 좋아서 공부하는 건 좋다. 하지만 평범이라는 기준을 통과하기 위한 공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신의 꿈을 위해서 대학에 가는 건 좋다. 하지만 다들 가니까 가는 대학이라는 건 누구를 위한 대학인 것인가?
자신의 삶을 즐기기 위해서 일하는 건 좋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 들 정도의 평범한 직장을 가야 한다는 건 누구의 기준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닌 나이가 먹어서 아니면 다른 이들의 시선 때문에 결혼하는 건 누구의 삶인가?
누구의 기준도 아닌 자신이 스스로의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야 한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사회는 개인에게 평범하지 않는 모습을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주체가 자신이며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젊은 시절 어떠했던가?
부모님이 하는 이야기를 믿었다.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믿었다.
신문에서 하는 이야기를 믿었다.
뉴스에서 하는 이야기를 믿었다.
기성세대의 주장을 믿었다.
의심하지 못했다. 나는 어렸고 어른을 믿어야 된다고 교육받았으며 동시에 그게 평범하고 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고심을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외로운 몸짓을 외면하면서 그저 내가 편한 대로 들었다.
선생님의 개인적인 일탈이나 그네들의 치우친 생각이 있을 것을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위치라는 곳에서 나오는 지위를 이용해서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걸 외면했다.
신문이 말하는 진실과 진실 속에 짧게 숨어져 있는 비탄을 읽어내지 못했다.
뉴스에서 국민을 선동해 가리고 싶어 하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자극적인 뉴스만 기억했다.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이권을 놓지 못하고 아귀다툼하는 것을 그저 사회의 단면이라고 생각했다.
삶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 지금은 안다.
부모님이 사정에 의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어리다는 이유로 배제된 진실도 있다는걸.
선생님 중 정말 존경할 만한 분도 있지만 그저 월급만 받고 학급 아이들을 귀찮아하는 사람도 있다는걸.
신문이나 뉴스조차 결국은 자신들의 이득에 따른 이슈를 다룰 뿐 정말 뼈아픈 진실은 그저 묻어두며 이용해 먹을 뿐이라는걸.
기성세대도 결국은 삶이라는 거친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것이라는걸.
평범하다는 말에 속아서 자신의 삶이 한 번 밖에 없는 귀중한 기회라는 걸 놓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회귀 전처럼 평범하다는 말에 속아서 삶을 낭비하면서 살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