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김 씨 아저씨3>
“김 씨 아저씨?”
종혁이 아버지와 친구들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한 인기척이 자동차가 멀어지자 느껴진 건 일부러 소리를 낸 덕분이었다.
“이건···.”
검은색 봉지 안에는 밀크티 캔이 들어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순간.
나는 익숙한 아찔한 두통과 귀속에서 울리는 이명을 참으면서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집중했다. 흐릿한 오래된 사진 속 장면처럼 느끼는 것과 동시에 사진이 움직이는 듯한 이상한 부유감이 느껴진다.
이명이 섞인 듣기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점차 대화 소리가 선명해진다.
외할아버지와 김 씨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아···.’
아주 잠깐이지만 외할아버지의 그리운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한 사이에 두 사람의 손에는 찻잔이 들려있었다.
의아한듯한 김 씨 아저씨의 모습에 꾸미지 않은 웃음을 보이면서 외할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차라네.”
한 모금 마신 김 씨 아저씨가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 아저씨가 놀랄 때도 있네?’
“이거···.”
“그래 밀크티일세.”
“···.”
“의외라고 생각하나? 뭐, 난 추억을 음미하면서 마신다네.”
아찔한 감각과 함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들리던 대화가 엿가락처럼 느려지면서 감각이 점차 돌아오면서 손에 들린 차가운 캔이 느껴졌다.
‘밀크티를 외할아버지가 좋아하셨다고?’
차가운 캔이었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미묘한 느낌이었다.
“잘 마실게요.”
캔을 따고 마시면서 김 씨 아저씨의 말문이 열리기만 기다렸지만, 캔을 다 미우도록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늘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서 병원에 갔어요.”
김 씨 아저씨가 움찔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두워서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고 계속 말했다.
“인하라는 친구인데 체육선생한테 피해받은 피해자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오랜만에 학교에 가게 돼서 제대로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었는데 제 친구 중에 경수가 말해줬어요.”
“···.”
“그런데 체육선생이 오늘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살인이라고 그러니까 이제는 피해자였던 인하가 범인으로 몰리고 있어요. 인하 아버지가 범인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회의적이거든요. 그 사람 무척 이기적이어서 자기 딸이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은 부끄러워하면서도 합의금은 가장 많이 받고 싶어 해서 계속 합의를 안 해주고 버텼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이에 피해자인 인하의 고통은 더 커졌고요.”
한참을 침묵하던 김 씨 아저씨의 입이 열렸다. 내가 한 의뢰를 완수했다는 말이었다.
“피해자들 영상은 전부 삭제 처리했다. 숨겨둔 영상까지 놓치지 않고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정말 있었군요. 쓰레기 자식. 설마 했는데···.”
“피해자는 알려진 것보다 더 많더군.”
나는 숨길 수 없는 답답함을 가슴 밖으로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하아···.”
내 한숨이 다 내뱉어지기도 전에 김 씨 아저씨에게 한 나의 의뢰 내용에 대해서 아주 간략한 브리핑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네가 말한 안남산 폐쇄된 우물로 그를 가게 했다. 그 방법까지는 궁금해하지 않을 테니 생략하도록 하지. 그런데 거기서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체육을 내가 발견했던 안남산의 폐쇄된 우물로 향하게 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피해자들에게 피해 보상을 많이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체육이 인간쓰레기인 건 맞지만 체육이 재산이 없다고 버티거나 파산신청을 하게 되면 피해자들이 받을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불법적인 재산을 축적했다는 걸 증명하고 피해자들이 단체로 피해 소송을 할 수 있게 지원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대백공이 알려준 안남산의 폐쇄된 우물에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묵직했던 마대자루가 있던 위치를 알려준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고?’
“무슨···.”
“넌 우연히 우물에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돈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고 했지?”
나는 자신 없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백공이 꿈에서 안남산 산책로에서 벗어난 옆길에 오래전 폐쇄된 우물 속에 현금다발이 마대자루에 매달려있다는 걸 알려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말한다고 해도 믿어줄 리도 없고···미친놈처럼 보지 않으면 다행일까?’
“거기 있던 돈은 월드파라는 조폭 조직이 마련한 불법으로 마련한 비자금이었다.”
“네?”
나는 김 씨 아저씨의 눈빛이 내 속을 파고드는 듯한 섬뜩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골목이 보일 뿐 아무도 없었다.
‘김 씨 아저씨의 시선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이상해 보이지는 않을려나?’
이런 내 행동에서 무언갈 생각하듯 김 씨 아저씨가 말했다.
“눈앞에 눈먼 돈이 있는데도 손을 대지 않는 건 참 잘한 일이다. 그 돈의 주인이 누군지 모를 때는 더욱 말이다.”
‘내가 거기 있던 돈 중 일부를 가져간 걸 알아챈 걸까? 아니면···.’
“그 말씀은···.”
“체육선생은 그 자리에서 월드파의 조직원과 마주했다. 다만···.”
“다만?”
“조직원도 그저 관리 차원에서 인적이 드문 시간을 골라서 들린 듯 한 명뿐이었다. 아무래도 큰돈을 숨겨둔 곳이니 관리 차원에서라도 많은 조직원에게 알리지 못한 거겠지. 당황스러운 사태에 둘은 우발적으로 싸움이 벌어졌고 둘 다 덩치가 큰 성인남성이니 결국 흉기를 가지고 있던 월드파 조직원이 이긴 거지.”
“그럼···.”
“월드파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철저히 숨길 거다. 사건 자체가 우물 근처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불법으로 마련한 비자금을 찾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데 굳이 경찰에 몸통이 위험해질 구실을 직접 들어낼 이유가 없겠지.”
나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살인자를 안다. 하지만 경찰은 빠른 사건 종결을 위해서 피해자를 용의자로 특정했다. 그런데 제 3자가 나서서 월드파의 조직원이 체육을 살인했다고 주장한다고 한들 믿어줄까?
‘월드파 조직원에게 원한이 있어서 무고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
“경찰은 계속된 강력사건에 뭇매를 맡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범인을 잡으려고 할 거다. 강간 사건의 피해자가 사적 보복을 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경찰 입장은 더욱 난처해질 테니 더욱 빠르게 수사해서 범인을 검거했다고 발표하고 덮으려고 하겠지.”
피해자가 곤란한 상황을 김 씨 아저씨도 예측한 것 같았다. 사실상 큰 대학병원 앞에서 형사들이 버티고 용의자를 검거하겠다고 버틴 것만 봐도 사실상 빠르게 사건을 정리하려 한다는 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
“빠른 수사가 정답이 아니더라도요.”
“그렇지.”
“그래서 난 우물에 매달린 돈이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마대를 전부 챙겨왔다.”
“네?”
김 씨 아저씨는 의아하다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는 게 아니었나?’
“월드파에 비자금을 돌려주고 차라리 범인을 자수시키는 게 빠르고 깔끔하다고 생각했지. 월드파 입장에서도 돈만 찾을 수 있다면 받아들일 확률이 높았지.”
‘하긴 말단 조직원이야. 부품처럼 쓰고 버리는 놈들일 테니 오랜 시간 모았을 비자금에 더 큰 비중을 두겠지.’
“그 협상을 받아들일 확률이 높았다는 말씀은···.”
“그런데 회수한 마대자루 중 하나가 바닥이 터져 있었다.”
나는 방금 전처럼 김 씨 아저씨의 눈을 피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내 노력이 받아들여진 걸까? 내가 말없이 김 씨 아저씨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자. 나에게는 길었다고 생각되는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다.
“···.”
내가 숨도 못 쉬고 긴장한 채 김 씨 아저씨를 바라보자 이내 입을 열었다.
“낡아서 바닥이 터진 거겠지. 아마 그날 체육과 마주친 조직원이 매달 관리해야 하는데 그런 말단 조직원이 회사원처럼 빠릿빠릿하게 일 처리를 했다면 조폭이 되었겠나? 정상적인 월급 받는 직장인이 되었겠지.”
“그 말씀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우물에 빠져서 사라진 거지. 다른 마대자루에서 나온 패물 같은 거라면 건질 수 있겠지만 마대자루 위에 묶인 부분에서 만 원권 지폐가 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주 오래전 발행된 만 원권 화폐더군.”
김 씨 아저씨는 돈이 훼손되었을 상황을 평소와 다르게 길게 설명하면서 말했다.
‘꼭, 만 원권이 있던 마대 자루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것처럼···.’
“그럼···.”
“오래전 발행된 화폐는 물에 잘 훼손되지 건져도 의미가 없을 거다.”
“···?”
“월드파 입장에서는 비자금 중 일부만 돌려준다면 오히려 연락이 온 쪽을 공격해서 나머지 비자금을 찾으려고 들겠지. 다행히 협상 시도 전에 훼손돼서 사라졌을 거라고 예상되는 흔적을 발견해서 다행이야.”
나는 김 씨 아저씨의 말이 다 끝날 때까지 듣고 생각했다.
‘정말 오래된 마대자루가 훼손돼서 손실된 걸로 생각하는 걸까?’
“그 말씀은···.”
“월드파와 협상이 불가능하게 된 거지.”
“인하는···그럼···.”
“이대로라면 인하라는 학생이 계속 경찰의 용의자가 되겠지.”
체육이 쓰레기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죽었다면 오히려 속이 더 풀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쓰레기의 죽음이 피해자에게 또 다른 피해가 된다면 그건 막고 싶다.
‘이 모든 일이 내가 의뢰한 일에서 시작되었다면 더욱.’
“이번에 자네가 한 의뢰는 체육이 혹시나 가지고 있을 피해자들의 불법 동영상 파기와 체육에게 안남산의 우물을 찾아가게 하라는 것이었지. 물론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왔지만 의뢰는 완수했다.”
“그렇죠. 완수네요.”
내가 허탈하다는 듯 김 씨 아저씨의 의뢰완수를 인정하자 김 씨 아저씨는 침묵했다.
“···.”
김 씨 아저씨가 말한 의뢰 완료의 의미는 뭘까?
이대로 내가 김 씨 아저씨에게 부탁한 의뢰가 끝났으니 자신의 손을 떠난 일이니 신경을 더 이상 쓸 필요 없다고 말한 것일까? 아니면···
“의뢰가 완료되었다면 김 씨 아저씨만 괜찮다면 새로운 의뢰를 하고 싶어요.”
말없이 어둠 속에서 가만히 서 있던 김 씨 아저씨의 고개가 끄덕였다고 느낀 건 내가 대백공의 술법으로 육체가 강화되어서 일까?
“그럼 새로운 의뢰를 하죠. 체육을 살인한 범인을 잡아주세요. 아니···자수를 시키거나 범인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경찰에 가져다주세요. 어쨌든 인하의 혐의가 풀리면 돼요."
“···.”
나의 새로운 의뢰를 들은 김 씨 아저씨는 말이 없었지만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아서 차가워졌을 밀크티를 단숨에 마시고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리고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멀리 사라질 듯 흐릿해지는 어둠 안에서 김 씨 아저씨를 향해 내가 외쳤다.
“의뢰를 완수했으면 그리고 새로운 의뢰를 받았으면 착수금을 받으셔야죠.”
“이미 받았다.”
김 씨 아저씨는 내 쪽을 돌아보더니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는 웃음을 보여주더니 이내 어두운 밤길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어두운 밤길을 보면서 생각했다.
‘설마···설마··그럼?’
우물에서 건진 그걸로?
다시 한번 김 씨 아저씨를 찾아봤을 때 보이는 건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 사이로 잠깐 반짝이다 사라진 별똥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