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움직이는 사람들>
“은영 누나 오랜만이에요.”
“이제 연락을 편하게 할 수 있어서 좋다. 휴대폰 산 거야?”
“말하자면 길어서···.”
“그리고 이제 은영이라고 부르지 마. 나 이름 바꿨어. 익숙하지 않아도 그 이름에 익숙해져야지. 안 그럼 어디서 실수할지도 몰라.”
“아···알겠어요. 주의할게요. 바뀐 이름이 뭔데요?”
“안나.”
“안나?”
“좀 특이하지. 그런데 외화 바꾸다 보니 외국 이름이 필요해서 쓰다가 이름 바꿀 때 아예 안나로 바꿨어.”
“이름 예쁘네요. 안나 누나? 안나? 뭐라고 하면 좋아요?”
“외국식으로 바꾼 거니깐 그냥 안나라고 불러···.”
은영 누나는 바뀐 이름이 조금 부끄러운 듯 화제를 돌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전화로 만나자고 할 정도면 무슨 특별한 일 있는 거야? 이제 법인설립 끝나고 네가 말한 대로 외화로 전권 교환하고 연락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시작인 거야?”
“아직이에요. 안나 차 있어요?”
“응, 필요할 것 같아서 한 대 마련했지. 왜? 비용을 너무 썼나?”
“필요한 건 써야죠. 잘했어요. 다른 게 아니라 같이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응? 데이트?”
나는 장난스러운 은영 누나의 말을 웃어넘기면서 말했다.
“데이트라고 하기에는 좀 볼품없지만···같이 가야 할 곳이 있어요.”
내 표정에서 진지함을 읽은 건지 은영 누나는 더는 장난을 치지 않고 주차해둔 차량 앞으로 향했다. 겨울철 해가 빨리지는 걸 감안해서 만났었기 때문에 내가 안내한 산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방이 어두운 상태였다.
“너무 어두운 거 아니야? 앞도 잘 안 보이는데.”
“트렁크만 열고 기다리고 있어요.”
“뭐?”
‘텅’
트렁크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산에서 부스럭대는 소음을 일부러 크게 키운 상태에서 허공에서 검은 가방을 2개 꺼냈다. 가방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지만 강화된 육체는 손쉽게 가방을 들어 트렁크에 넣을 수 있었다.
‘덜컥.’
갑작스러운 무게감에 뒷바퀴가 깊게 파이자 놀란 듯 은영 누나가 차에서 내려 놀랐다는 듯 나에게 질문을 했다.
“뭐야? 뭔데 이곳까지 와서 무거운 걸 트렁크에 넣는 건데? 너 혹시···.”
나는 이상한 생각에 빠지려는 은영 누나의 말을 막고 가방을 열었다.
‘지이익.’
가방은 터질 듯 파란색 지폐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 가방이 하나도 아닌 2개나 되다 보니 은영 누나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가방을 쳐다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너···너···도대체 이 돈은 다 뭐야?”
“투자금.”
“뭐?”
“법인 최대 주주가 법인 운영하라고 투자금 넣는 거죠.”
“투자금을 이렇게 밤중에 현금으로 넣는 사람도 있니?”
“잘 몰라서 그렇지 그런 사람 많을 거예요.”
“그렇다고 치고 그럼 이제 네가 말한 계획대로 움직이면 되는 거야?”
“아니 아직···, 먼저 찾아야 할 게 있어요.”
“응?”
“삼정동에 큰 빌딩 중에 벤처사업자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 건물이 있을 건데 거기 좀 수소문하면서 1년 정도 후에 움직이면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요.”
“네가 말한 사건은 5개월 후 정도면 세상이 다 알 정도로 일이 생긴다면서···.”
“열매가 익기를 기다리는 거죠.”
“너 생각보다 냉정하구나?”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 적 없어요.”
“그래도 나한테는 좋은 사람이야. 그럼 된 거지 뭐···.”
은영 누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 말을 장난스럽게 넘기더니 말했다.
“그런데 얼마 정도 되는 돈이야?”
“8억은 될 거예요.”
“뭐?”
은영 누나는 자신도 모르게 빽 지른 고함 소리에 놀라서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런 큰돈을 이렇게 덥석 맡겨도 되는 거야? 내가 들고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그 정도인 거겠죠. 그리고 누나도 알다시피 내가 알고 있는 정보대로 투자하면 이것보다 더 큰돈을 얻을 건데 그걸 포기하면···.”
“쉽게 말하지 말아 줄래? 나 진짜 이 돈 보니깐 심장이 떨리고 손에 수전증 올 거 같거든?”
“네?”
“이 돈 어디서 난 거야? 내가 이름 안나로 바꿨다고 했잖아. 그리고 한국이 아닌 미국 국적이라고. 네가 맡긴 일 끝내면 한국에 없을지도 몰라.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이런···.”
“미국 국적까지 취득했어요?”
“투자 이민으로 아예 국적도 바꿨어.”
“잘했네요.”
“응? 걱정스럽지는 않고?”
“아니 차라리 잘된 거 같아요.”
“뭐?”
“외화 구하느라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한국에서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거야 그렇지. 투자 이민으로 들고 있던 현금 다 들고 미국 가서 국적 얻고 이름도 외국식으로 바꾸고 거기서 외화로 바꾼 거니까.”
“이 돈 불법으로 얻은 돈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걱정돼서 이런 말 하는 거잖아요. 새 삶을 살기 위해서 준비했는데 투자가 아닌 불법은 무섭고 싫다고요.”
“미안···내가 준 돈으로 새 삶을 준비하면서 도움은 여기까지라고 말해서. 그런데 난 거짓말은 못 하겠어.”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이 돈 불법 자금 아니에요. 길지만 이야기 들어볼래요?”
“좋아. 믿기지는 않지만, 주인이 네 말 이니깐···들어보기는 할게. 우선 앉아서 이야기하자.”
‘지이익.’
‘탕.’
트렁크를 닫고 차 안에 앉아서 내가 은영 누나가 없는 사이에 겪은 일을 짧게나마 이야기했다.
‘으어헝···.’
“그···누나? 아니···안나? 이렇게 울 필요는···.”
“어떻게 난 네가 복권으로 돈 많이 벌어서···안 좋은 일 당한 우리 자매한테 기회를 준 거라고 생각 했어. 그런데 난 네가 어떤 생각으로 일을 벌인지도 모르고···난···.”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그리고 그 돈 가지고 사라져서 새로운 인생 살아도 좋다고 생각한 건 맞아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힘든데도 우릴 돕겠다고 생각했다는 거잖아.”
“그 돈은 안나가 벌게 해준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무슨 헛소리야?”
‘대백공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나는 좋은 일을 해서 복권이 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깐 그 일로 번 돈은 그 당사자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난···.”
“서로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해요. 괜한 생각 할 필요도 없고요. 이번에 넣는 투자금은 외할아버지 유산이에요. 몰랐는데 현금을 묻어두셨더라고요.”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대백공이 보상이라면서 말해줘서 알았죠···.’
“외할아버지가 마지막에 말씀해주셨어요. 그런데 정신없어서 생각 못 하고 있다가 혹시나 하고 찾아가 본 곳에 있었던 거에요.”
“그럼···.”
“제가 아직 미성년자여서 이 돈 가지고 투자를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나이도 걸리고···.”
“어머니한테 말도 못 하겠고?”
“그게 크죠. 아무래도 외할아버지 유산을 제 마음대로 처분한다고 하면 어머니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게 아무리 현금이라도요.”
“이렇게 몰래 처분하는 건 괜찮고?”
“10배로 불려서 가져가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거 딱 도박꾼이 자주 하는 말 같은데···.”
“제가 투자하려는 건 확실한 거예요.”
“그 빌딩이라는 곳?”
“네. 지금은 비싸겠지만 1년 아니 5개월만 지나도 급매물로 나올 거에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제가 미래에서 80억짜리 빌딩이 8억에 나왔는데 대출이고 뭐고 다 막혀서 아쉬웠다는 소리를 들었거든요.’라고 말할 수는 없고···.
“그건 제 투자 비밀이라서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은 없네. 알겠어. 나도 최대한 알아볼게. 만약 내가 말한 건물이 안 나오면 비슷한 매물 중에서 알아봐도 된다는 거지.”
“네. 위치만 그 방향이면 돼요. 만약 건물을 사고도 여유가 된다면 그쪽 아파트나 주택 매물도 급매로 나오면 구입해 주세요.”
“알겠어.”
“그런데 누나···아니 안나는 카페 하고 싶다고 한 거 아니에요?”
“맞아.”
“그런데 미국으로 가면···.”
“미국에서 커피전문점 차리고 한국까지 늘릴 생각이야. 한국은 자체 브랜드 보다 외국에서 넘어온 브랜드를 더 좋아하거든.”
“대단하네요···.”
“뭐야? 내 생각이······.”
“그 넓은 시야는 제가 아니더라도 사업을 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무슨···그런 립 서비스한다고 내가···어···?”
어두운 산길이었지만 강화된 육체의 시력은 월등했다. 은영 누나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봤지만 못 본 척하면서 말했다.
“시간이 늦어서 걱정하실 것 같아요. 이만 데려다줄 수 있어요?”
“아직도 그 골목길에 사는 거야? 유산도 받았고 이렇게 현금도 많은데 바로 이사 나오지?”
“아무래도 알아보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해요. 돈이 없어서 들어간 집이었는데 돈이 생겨도 정이 드니깐 쉽게 움직여지지 않아요.”
“그런 걸 감상적이라고 하는 거야. 냉정한 구석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물렁하다니까.”
“그런가요. 아무래도 제가 아직 심지가 굳지 못해서···.”
“난 심지 굳은 인간들 보면 두드러기 나니깐 심지 어쩌고 하지 마.”
“네?”
“사람이 살면서 굳은 의지를 가져야 하는 건 맞지만 쓸데없는 똥고집으로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것도 민폐거든. 적당히 서로 맞추면서 사는 거지. 이해도 안 가는 고집 피우는 인간들 보면 아휴···생각하기도 싫다.”
“안나···그런 사람 있었어요?”
“우리 엄마.”
“···.”
“그렇게 굳을 필요 없어. 이제는 말해도 좀 괜찮아진 느낌이니까. 우리 엄마는 내가 이혼하고 집 나가자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어. 이런 험한 세상에 집도 절도 없이 남편 없이 여자 혼자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사는 게 말이 되냐고 고집이었거든. 결국···버티다 못해서 내가 집을 나갔지만, 엄마는 한 발자국도 제 발로 나가지는 않았어. 삶에 정답은 없지만 자기가 옳다고 무조건 고집 피우는 것도 주변 사람들한테 민폐라고.”
“안나···괜찮아요?”
“뭐···이렇게 다들 살아가는 거지. 도착했다. 내가 골목길 앞까지는 도저히 못가겠거든. 여기서 내려.”
“괜찮아요. 조심해서 가요.”
“그래. 다음에는 좋은 소식 들고 올게. 대박 소식 말이야.”
“네···.”
끝까지 씩씩한 모습으로 운전하면서 사라진 은영 누나의 뒷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삶에 정답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