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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후, 인생 다시 산다-33화 (33/205)

<33화 아버지의 삶 3>

나는 병실 앞을 한참 기다려도 어머니가 나오지 않자 병실에 들어가는 대신 담당 간호사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자리를 벗어나 주신이를 데리러 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돌렸다.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동시에 두 분이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을 늦었지만 가질 수 있었다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할아버지의 기억에서 봤던 안타까움이 조금이나마 희석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천천히 주신이를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한다.

아버지라는 무게가 어떨지 생소했지만, 외할아버지의 기억 속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뇌는 전부 가족을 향해 있었다. 그게 아버지가 아닐까?

주신이를 데리러 가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무런 일 없이 도서관에서 놀고 있었다. 다만 약속 시간보다 늦게 온 나를 향해 입을 삐죽 되면서 화가 난 게 보였지만 나는 모르는 척 주신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엄마랑 형이랑 미워, 약속보다 너무 늦었다고.”

“미안해. 배고프지는 않아?”

“괜찮아. 어린이 도서관 사서 누나가 이따만큼 과자 줘서···엄마는 맨날 못 먹게 하는데 실컷 먹었어.”

“단 거 많이 먹어서 입맛 없겠다.”

“그게 아니잖아. 왜 이렇게 늦었어.”

“주신이 오랜만에 형이 업어줄까?”

자기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모습에 주신이 화가 난 걸 알았지만 나는 묵묵히 떨어트리거나 놓치지 않기 위해서 힘을 줘서 안아 들었다.

등에 업고 단단히 붙잡고 있는 작고 따뜻한 손길을 느끼면서 집을 향해 한발 한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신아···오늘 엄마가 늦을 거야. 아니면 오시지 않을지도 모르고.”

“왜? 내가 엄마 늦게 왔다고 떼써서 그런 거야? 그럼 나 맨날 기다려도 돼”

“아니, 주신이가 잘못한 건 없어. 엄마는 외할아버지를 오랜만에 만나서 정신이 없으실 거야.”

“외할아버지? 우리도 외할아버지가 있어?”

“응. 그런데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주신이는 만나기 힘들지도 몰라.”

“왜? 나도 외할아버지 만나고 싶어.”

“외할아버지 몸 상태가 좋아져서 병원에서 퇴원하면 보자.”

“정말이지? 나도 외할아버지 생겼다.”

“왜? 좋아?”

“응. 다른 애들은 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가 막 장난감 사주고 놀러 가면 신기한 것 많고 그렇다고 해서 나도 가지고 싶었어.”

“우리 외할아버지는 몸이 안 좋아서 주신이하고 놀아주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좋아?”

“할아버지 생긴 것만으로 좋아. 근데 언제 볼 수 있는 거야.”

“건강이 나아지시면···그럼···.”

‘이렇게 좋아하는데···.’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쓴 숨을 깊게 삼키며 주신이를 씻기고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또 김치찌개야?”

“맛있다고 하더니 이젠 질린 거야?”

“아무리 맛있어도 김치찌개만 먹으면 우음···.”

“그럴까 봐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지. 짠.”

“이건 소시지잖아?”

“그래 엄마 몰래 조금만 먹자.”

“아싸. 비밀 지켜줄게.”

야무지게 한입 깨무는 주신이를 보면서 나는 질렸다고 말하는 김치찌개를 한입 먹었다. 나에게는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 맛이었다.

‘어머니가 담가 주신 김치.’

어머니 김치가 아니면 이런 맛을 내는 김치찌개를 만들 수 없다.

이 맛을 찾아서 이곳저곳 떠돌 듯 김치를 만드는 반찬가게를 전부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어머니의 손길은 생활 깊숙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를 천천히 녹아내듯 돌봐주시고 있었다.

아버지는···

순간 김치찌개를 먹다가 올라오는 울컥함에 나는 물을 한 컵 마시며 진정하고 놀란 듯 나를 보는 주신이에게 괜찮다는 손짓으로 얼른 먹으라고 했다.

아버지는······

평소에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낀 적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돌아가시고 당장 살기 급급해서 그 자리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장의 급한 삶 속에 아버지가 있었다면···

그렇다면 회귀 전에 어머니가 고생하고 동생이 짐처럼 느껴지는 일은 없었을 거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지키는 울타리였다. 그런 울타리를 가족에게서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은 가족의 근처에 자리를 잡게 되는 울타리.

울타리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가정은 행복한 것이다. 울타리가 있기 때문에 세상 풍파를 직접 맞지 않아도 되니···하지만 한번 사라진 울타리에 대해서 아쉬움을 토로할 때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일 때가 많다.

울타리가 없어진 삶은 각박하고 정신없고 당장의 삶이 급할 테니···

그렇다고 울타리를 짓기 시작한 목적을 잊어버린 아버지는 울타리를 높게 쌓기에 급급해서 가족들과 너무 떨어진 곳에 울타리를 쌓게 되면 그 높은 울타리가 아까워서 가족과 멀어지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아무도 없는 홀로된 곳에서 사방에 울타리를 쌓다가 헤매곤 한다. 그 헤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후회하는 건 아버지 자신이지만 그걸 깨닫기에 울타리는 너무 견고하고 높다.

하지만.

결국 돌아갈 곳은···

생각이 깊어진 사이에 어느새 밥상이 치워지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주신이 가 자기 키만 한 싱크대에 사용한 그릇들을 요령껏 쌓고 있었다.

“형 도와주는 거야? 고맙지만 여기까지. 나머지는 형이 할게.”

“치···나도 빨리 키 크고 싶다···형은 멀대 같은데 난 언제 커?”

“금방 클 거야. 자고 일어날 때마다 쑥쑥 자라는데 잘 모르는 거야.”

“그럼 빨리 자야지.”

이부자리를 펴며 소란을 일으키는 소리를 등 뒤로하고 소담하게 쌓여있는 그릇들을 내려다봤다. 두 명이 먹고 치운 자리는 치울 것이 별게 없을 정도로 단출했다.

‘어머니 저녁은 드셨을까?’

걱정은 되었지만, 이 시간에 내가 병원에 다시 간다면 더 걱정하실 거라는 생각에 속마음을 접고 주신이에게 이빨을 닦으라고 말한 다음 설거지를 끝냈다.

이미 이부자리에 누워서 잘 생각이 만반이 주신이를 보고는 웃으면서 불을 꺼주었다. 잘 생각은 있지만 잠이 잘 오지 않는지 생각이 많아지는 듯 주신이가 내 쪽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형, 자?”

“아니, 아직.”

“외할아버지면 엄마 아빠인 거야?”

“그래.”

“그럼 엄마도 엄청 좋겠다.”

“왜?”

“나도 아빠 오면 엄청 좋을 것 같아. 아빠 보고 싶다.”

나는 주신이가 빨리 잠들기를 기도하면서 등을 쓸어내렸다. 주신이의 숨이 고르게 난다고 생각했을 때 속으로 대답했던 말이 숨기지 못하고 새어 나오고 말았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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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등굣길 종혁이 가방이 무거워 보인다.

“학교에서 이제 수업도 안 하는데 가방이 무거워 보인다?”

“너 주라고 엄마가 바리바리 싸줬는데 안 가져간다고 했더니 가방에 몰래 넣어놨더라고. 늦어서 그냥 매고 나왔지. 어차피 먹을 걸 텐데 학교에서 먹으면 가벼워지지 않겠어?”

“아니, 너희 어머니가 손이 큰 건 알았지만 이른 아침부터?”

“몰라. 어제 아빠하고 엄마하고 대화 나누더니 완전 기분 업돼서 한밤중부터 난리였어. 자는데 기름 냄새에 아주 잔칫상 차리는 줄.”

“그렇게 좋을 일인가? 어떻게 보면 당연하잖아. 너나 나나 그리고 경수나 부모님 중에 재단 관리할만한 시간 하고 능력 되는 분이 너희 어머닌데 그걸 언급한 게 그렇게 좋을 일이야?”

새삼스럽다는 듯한 표정의 종혁이 나를 바라봤다.

“네가 우리 엄마 좋게 봐줘서 좋긴 한데. 넌 좀 특이한 것 같아. 누가 아줌마한테 사업을 시켜. 그것도 자기 엄마를···.”

“아줌마라니 대학교도 나온 재원인데 완전 거기에 비하면 너랑 나는 ×밥인 거야. 아직 고등학생도 안 된 거니까. 그리고 너희 어머니한테 아줌마가 뭐냐? 아줌마가.”

“아니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

종혁이와 평소처럼 다투면서 교문을 지나는데 학주와 개덕이 교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야, 오늘 학준데?”

“뭐?”

우리는 당황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학력고사가 끝나고 수업 없이 영화만 보다 보니 교문을 지날 때 교복을 제대로 차려입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선생들도 굳이 단속하지 않기도 했고···그렇지만 학주는···.’

“학주는 우리 잡으려고 할 건데 어떡하냐? 나 어때?”

“머리가 좀 길긴 한데 뭐 3학년이니깐 괜찮을 거야. 그런데 너 명찰 어쨌어?”

“뭐? 깜박하고 그냥 왔나? 주인이 넌 넥타이 어쨌냐?”

종혁이와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교문을 향하던 발걸음을 뒤로하고 서로의 교복 상태를 봐주고 있었다.

‘혹시 가방에 넣어놨을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필기구만 단출하게 들어있는 가벼운 가방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너, 이 자식 준비성 최곤데? 내 명찰은 언제 또 챙긴 거냐?”

“이거 경수가 장난친다고 가방에 넣어둔 것 같은데? 넥타이를 리본으로 만들어서 네 명찰로 고정해놨잖아.”

“어쨌든 살았다. 명찰은 나 주고 너도 빨리 넥타이 목에 걸어.”

의심스럽다는 듯 부산하게 움직이는 우리를 주시하는 학주의 매서운 눈초리를 못 본척하면서 나와 종혁이는 아슬아슬하게 교문을 지날 수 있었다.

“휴···살았다.”

“그런데 이제 학기말인데 갑자기 학주는 교문에 나타나서 왜 저런데?”

“아마, 학교 분위기도 뒤숭숭하고 애들이 소문에 관심 가지면서 수업도 제대로 안 듣고 그러니깐 한번 날 잡고 기합이라도 하게 하려고 나온 거겠지.”

“그럼 오늘 걸린 녀석들 아주 곡소리가 나겠네.”

놀랍게도 우리는 교실을 전세 낸 상태에서 종혁이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당당히 꺼내놓고 먹을 수 있었다.

“야···오늘 학주가 많이 잡을 거라는 건 알았는데. 어떻게 우리 셋만 빼고 전부 끌려갔냐?”

“경수야, 원래 넥타이가 1㎜만 밀려도 각 잡는 놈이니깐 그렇다고 치지만 주인이가 안 걸린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목에 뭐 걸리는 거 싫다고 매번 교문 앞에서만 매더니. 오늘 용케 통과했다?”

“그러게 이상하게 운이 좋은 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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