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아픈 현실3>
“피해자를 원망하는게 더 편하니까.”
“네?”
“가족 구성원이 망가지면 사회는 동력을 잃어 버리지. 그러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봉합할 법이 필요해. 이제 산업화가 더 이뤄지면 여성 교육도 더 빨라질 거고 그렇게 되면 기존의 관습법처럼 넘어가던 게 형사법으로 넘어올 텐데 그렇게 되면 정부로서는 면피할 방향이 필요하니까.”
“해결이 아닌 면피인겁니까?”
“이 나라는 너무 급격하게 성장했어. 시민의식과 경제기반 그리고 교육수준 전부다 불균형하지. 이전에야 군사정권이었으니 다들 입닥치고 참겠지만 이제 문민의 정부니 뭐니 하면서 떠드는 사건들 많아지잖아? 그런거 조용히 시키라고 정권 조용히 넘긴거야. 이것만 잘 마무리되면 또 한세기쯤은 어떻게 넘어갈 수 있겠지.”
“해결할 방법이 있는데 이런 어설픈 대책을···.”
“우리 일도 아닌데 이 정도 신경 쓰면 많이 쓴 것 아닌가?”
“···.”
“얼굴에 다 쓰여있군. 그래서 자네를 쓰는 거지만 앞과 뒤가 똑같은 머저리들이 참 편하거든. 그렇게 ‘열 받아’ 하지 말게.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내 국적은 한국이지. 하지만 한국국적을 가졌다고 이 나라를 무조건 모국이라고 생각하는 머저리들하고 나는 좀 다른 사람이어서 말이야.”
주먹을 꽉 지고 분노를 삭이는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빌딩 너머로 보이는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비웃음을 한줄기 입가에 머물게 한 남자가 이내 말했다.
“이 나라는 정말 많은 걸 내게 주거든. 이런 작은 선물을 또 어떻게 받을지 정말 미친 듯이 궁금하군.”
“이게 작은 선물이라는 겁니까?”
분노에 찬 남자의 음성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남자가 돌아서면서 말했다.
“나의 큰 선물도 이미 받지 않았나?”
“무슨···.”
“민족주의자들을 청소해줬는데 그걸 아직 모르고 있다니 역시 재미있는 나라야. 하핫.”
그런 남자의 말에 충격을 받은 대화 상대편의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런 모습을 알았을 텐데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황홀하게 빛나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남자는 냉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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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분명 개선 방향이 확실한데도 항상 엉뚱한 데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이상한 나라긴 해.’
하굣길은 평소와 다르게 시끄러웠다. 조용했던 종혁이가 말이 많아지면서 남자도 세 명이 모이면 접시를 깨는 걸 도전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듯 우리는 시끄럽게 골목길로 들어섰다. 주신이는 우리의 수다에 관심이 없다는 듯 평소와 다르게 친구들과 뒤에서 같이 오고 있었다.
내 하교 시간이 빨라지자 학교에 남아서 나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친구들하고 하교를 하게 된 거다. 즐겁게 떠드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너무 빠르지 않게 속도를 조절하면서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도서관보다는 종혁이네에 모여서 점심도 해결하고 놀다가 저녁이 되기 전에 각자 집으로 가자고 말한 날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토요일에 약속처럼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아참, 오늘 엄마 집에 없는데.”
“그래? 오늘 어디 가신 거야?”
“오랜만에 동창회 간다고 나가셨어.”
“그럼 점심은 라면인가?”
“아니? 점심으로 불고기 만들어 놓고 간다고 함. 가서 데워서 먹기만 하면 될 거야.”
나는 친구와 헤어져서 나에게 달려오는 주신이를 붙잡아 책가방을 한 손에 들었다. 가방을 뺏기지 않겠다는 주신이의 반항을 한 손으로 잠재우고는 말했다.
“데워먹을 줄은 알고?”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
나는 아직도 ‘남자들의 적’, ‘공공의 적’이라는 식으로 장난치는 종혁이와 경수의 대꾸를 무심히 흘리면서 주신이 가방을 한쪽에 걸쳐매고 말했다.
“그럼 가방은 집에 놓고 올라갈게. 주신이도 좀 씻기고.”
“너도 참, 네가 이렇게까지 하니깐 주신이가 볼멘 표정이잖아.”
“그래도 학교 갔다 오면 씻어야지. 안 그럼 감기들기 쉽다고.”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바이러스 사태 이후로 습관이 된 행동이지만, 아직 지금 시기에는 지나치게 위생에 신경 쓰는 것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몰라도 주신이는 아직 어리니깐 조심해야지.’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혹시나 나 때문에 감기에 걸릴까 나도 밖에서 오면 간단하게 씻는 걸 습관화했다.
이렇게 주신이를 씻기고 식사를 챙기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종혁이 어머니는 종혁이가 네가 옆에 있으면 굶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는지 회귀 전과 달리 집을 비우고 외출을 종종하곤 했다.
종혁이 어머니가 집을 가끔 비우는 일이 이렇게 돌아올지는 몰랐는데···
나는 평소와 다르게 화려한 양장 차림의 종혁이 어머니의 모습과 동시에 순간 머리가 아찔한 느낌이 나면서 오래된 스피커에서 들리듯 잡음이 많이 섞인 질책 어린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흐릿한 사진이 움직이는 듯한 어색함과 함께 잡음이 섞여 있는 대화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순식간에 지나가면서 좌절하고 있는 종혁이 어머니 모습이 이미지로 남았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노부인이 젊은···아니, 어려 보이는 종혁이 어머니를 자리 앉히고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만이 그나마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지희야. 이번에도 아버지 말씀 안 들으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그런데 꼭 대학교에 가야겠니?’
‘엄마, 난 순자 고모나 엄마처럼 살기 싫어.’
애잔한 슬픔이 담긴 노부인의 얼굴에서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마냥, 어리광부리듯 대학교 학비 대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야. 나 장학금 받았다고 그런데도 왜 안 보내겠다는 건데?’
‘너희 아버지 성질 잘 알잖아. 여자가 무슨 공부냐고 할 사람이야. 집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나도 이제 성인이야. 하고 싶은 꿈이 있다고 단순히 결혼하고 애만 낳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너희 아버지가···.’
‘엄마는 매번 같은 소리지. 아버지. 너희 아버지. 항상 같은 소리. 왜 내 말은 들어 줄 생각을 안 해?’
‘지희야···엄마는···.’
애달프게 부르는 노부인의 음성에도 매몰찬 표정으로 찬 바람 일도록 몸을 일으킨 채 돌아서서 뛰어나가는 종혁이 어머니의 어린 소녀 시절의 표정은.
순간 장면이 바뀌면서 현관문에 서 있는 종혁이 어머니를 바라보자 붙잡는 노부인을 부름을 뿌리치고 뛰쳐나갔던 그 표정과 똑같아 보였다.
평소와 다르게 화려한 차림새로 외출에서 돌아온 종혁이 어머니의 모습에 놀라기도 전에 종혁이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에 우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항상 여유가 있고 굳이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교양이 넘치는 종혁이 어머니의 단점은 그저 음식을 할 때 손이 크다는 것밖에 없었다. 굳이 더 표현하자면 종혁이에 대한 넘치는 애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행히 종혁이 아버지가 중심을 잘 잡아줘서 종혁이가 넘치는 애정에 마마보이가 되지는 않았지만, 종혁이 아버지가 무관심했다면 종혁이는 종혁이 어머니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정도의 마마보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애정 하는 아들과 그 친구들이 집에 놀려왔는데 아무런 말 없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간 어머니 모습에 종혁이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일 있으신 건가?”
“오늘 어디 갔다 오신 건데?”
“동창 모임.”
“동창회는 아니고 모임?”
“동창 중에 아는 사람들만 소규모로 모이는 거라고 들었어. 몇 번 나가셨는데 이렇게 일찍 들어온 건 처음이라서.”
“종혁이한테 그런 표정 지으시는 거 처음 봤어.”
“나 조금 소름 돋았는데. 나만 그런 거?”
“아니 주신 이도 놀랐는지 딸꾹질이 안 멈추네”
나는 주신이에게 물을 조금씩 먹이고는 말했다.
“동창이 고등학교 동창?”
“아니, 대학교.”
“뭐? 너희 어머니 대학 나오신 거야?”
“응, 말 안 했나? 화이여대라고···.”
“몰랐어. 유명한 대학 아니야?”
“보통 자랑할 만도 한데 너희 어머니도 대단하시다.”
“어머니는 자기 일에 대해서 잘 말 안 해서. 나도 아버지한테 들어서 알았는데.”
“화이여대면 여자대학교에서는 수위를 다투는 대학 아니야?”
“그것보다 더 놀란 건 따로 있어.”
“뭐?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게 있다고?”
“엄마 언론고시도 합격했데···,”
“뭐?”
“아니···그럼 방송국에서 일해야 하는 거 아니야?”
“기자일 하시는 거야?”
“합격하고 바로 아빠랑 결혼했다고만 들었어.”
“아쉽다···언론고시 정말 힘든 거 아냐?”
“그러니깐.”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흐지부지 끝나고 이내 졸린듯한 주신이의 모습에 나와 경수는 각자 집으로 향했다. 경수를 골목길 끝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종혁이가 입술을 한번 물더니 나한테 말했다.
“엄마는 너무···.”
“응? 너희 어머니가 왜?”
“뭐라고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이번에 네가 말해준 보험 이야기···.”
“그거 다 같이 들고 끝낸 거 아니었어?”
“그거야···그렇지. 그게 아니라 우리 엄마가 보험 많이 들었다고 했잖아.”
“응”
“아버지하고 내 앞으로는 중복된 것도 많은데 정작 본인 건 하나도 안 들었어. 이번에 네가 강제로라도 들게 안 했으면 보험이 아예 없었을 거야.”
“뭐?”
보통 이 당시 보험의 주 가입 주체가 가장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특별하지는 않지만 다른 가정은 여유가 없어서 가장 필요한 가장이 들었다면 종혁이네는 중복해서 들더라고 종혁이 아버지나 종혁이만 들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어머니가 보험 관심 많다고 하지 않았어?”
“경수 어머니가 말해준 거야. 너는 알고 있으라고···.”
“아니···왜?”
‘설마, 보험금을 노리고? 하지만 회귀 전에 종혁이 어머니는 소식 들을 때마다 계속 잘 지내신다는 말만 들었는데?’
당혹스러워하는 내 표정에 자신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믿음이 생겼는지 나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엄마는···잘 모르는 것 같아.”
“뭘?”
“나하고 아빠한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모르는 것 같아.”
“혹시, 외할아버지하고 외할머니 댁이 좀 엄한 곳이야?”
“응, 듣기로 종갓집이라고 들었어. 다행히 엄마는 딸이어서 출가외인 취급이라 제사는 지낸다고 부르거나 하지는 않는데 아직도 거기서는 큰집 식구들이라고 집에서 한복 입고 생활한다고 들었어.”
“가본 적 없는 거야?”
“엄마가 가더라도 나는 안 데리고 가시더라고. 보기 좋을 것 없다고.”
“···.”
“너 뭔가 촉이 온 거지?”
“확실한 건 아니야.”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닌데···혹시 너. 엄마가 옆에서 일수 거 일투족 안 도와주면 안 되는 거냐?”
“뭐? 미친 그런 거 완전 간섭받는 것 같아서 싫거든. 너도 주신이한테 작작 좀 해. 보는 내가 안쓰럽더라.”
“나 정도면···.”
‘네가 21세기 치맛바람을 안 봐서 모르는 거지.’
“너 완전 장난 아니거든. 그러다가 주신이가 형 싫다고 도망 다니고 그래야 정신 차리지?”
“윽···.”
‘내가 좀 심했나?’
“주신이는 아직 어리다고. 어쨌든 너나 나는 고등학생이니깐 이제 좀 스스로 할 시기고 그러면···.”
내 설명을 듣던 종혁이는 그런 생각을 못 했다는 듯 놀란 표정이었지만 부정적인 반응은 아니였다.
“뭐? 엄마가?”
“왜? 오히려 차고 넘치는 능력자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그건···생각도 못 해봤어.”
“이렇게 일을 시작하는 게 너희 가족 그러니깐 어머니한테 오히려 좋은 자극이 될 거야. 너하고 너희 아버지만 괜찮다면 나는 당장 맡겨도 괜찮아.”
“그건···.”
어스름하게 노을이 깔리는 골목길 덕분에 나와 종혁이는 우리 뒤로 천천히 다가오는 발걸음과 긴 그림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나와 종혁이의 의견이라니 들어볼 수 있을까?”
“아빠.”
“아···.”
우리 뒤로 서 있던 긴 그림자의 주인공의 종혁이 아버지였다. 추운 골목길에서 길게 이야기할 주제는 아니어서 우리는 종혁이 아버지 서재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종혁이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풀어서 말했다.
“아내에게 재단설립을 맡기자는 건가? 이왕이면 재단 이사까지?”
“종혁이 어머니만 괜찮다면요. 그리고 거절하신다면 재단 홍보만이라도 맡기면 어떨까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오늘 종혁이 어머니가 기운이 없으신 것 같아서요. 종혁이도 다 크고 주변에 모임에 나가서 대화할 소재가 떨어진 게 아닐까요? 재단을 운영 하다 보면 바쁘기는 해도 분명 보람차고 친구분들하고 대화할 소재도 많아지고 기분이 좋아지신다면 일석삼조가 아닐까 해서요.”
종혁이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셨다.
‘사실은 오늘 종혁이 어머니의 어린 시절 모습을 봤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내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종혁이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재의 분위기는 바뀔 줄 모르고 종혁이는 이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나의 본심을 숨겨봤자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날 것 같아서 진심을 조금 드러냈다.
“종혁이 어머니가 대학교도 졸업하시고 언론고시도 합격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집에서 종혁이만 바라보고 헌신적으로 키웠죠. 그리고 종혁이도 잘 컸고요. 힘든 일을 잘 이루어냈다고 생각해요. 그런 능력자가 옆에 있는데 도와 달라고 하지 않는다면 인력 낭비 아닐까요? 교수 직분으로 시간 내기 어려운 아저씨보다는 능력도 되고 이제는 시간도 될 종혁이 어머니한테 도움을 구해 보는 거죠. 본인만 괜찮다면요.”
종혁이 아버지는 종혁이를 지긋이 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종혁이 어머니와 대화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종혁이한테 힘내라고 등을 한번 쳐준 다음 집으로 향했다.
“넌, 정말 우리 엄마가 그 일을 잘할 거라고 생각해?”
“얌마, 가장 힘든 육아를 했는데 그깟일을 너희 어머니가 누워서 TV보면서도 다 하실 거다.”
“그런가···.”
“그리고 우리가 좋은 일 한다고 돈을 모아서 만드는 재단인데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이사로 미는 게 뭐가 잘못인데?”
“정확히는 네가 얻은 복권 당첨금이지.”
“그거나 이거나. 저녁 맛있게 먹고. 싸주신 반찬으로 저녁 잘 먹겠다고 전해줘. 나 간다.”
*
종혁이의 범상치 않은 친구 주신이가 나간 서재의 문을 지긋이 보면서 문진명은 과거를 회상했다.
오래전 캠퍼스에서 만났던 아내 백지희는 그 많은 학생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였다. 학과 일에도 솔선수범해서 자신이 다니는 대학 캠퍼스까지 방문한 것이었다.
그렇게 웃음이 많고 밝았던 아내의 재능은 힘들다는 언론고시를 한 번에 합격했다는 사실에서 증명되었다. 그렇지만 힘들게 언론고시를 합격하고도 기쁘게 웃지 못하는 모습에 나는 의문이 들었다. 아내가 나에게 말해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나에게 말했던 첫마디를 잊을 수 없었다.
‘진명씨 우리 결혼할래요?’
‘네?’
‘너무 갑작스러웠나요?’
‘아니···.’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지만 당시에 나는 캠퍼스에서 술한잔하고 꿈을 꾸고 있는 중인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나는 당황스럽지만 기쁜마음을 감추고 당시 아내의 심정을 헤아려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론고시도 합격했는데···이렇게 갑작스럽게 꿈을 접고 결혼해도 괜찮은 건가요?’
‘꿈을 이루고 싶어서 결혼제안하는거에요.’
기쁜마음이 가라앉고 당혹스러움만 남은 상태로 아내를 쳐다보자.
‘제 꿈은···.’
나는 인형이었네···
아내의 결혼제안을 받고 아내의 친정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아내의 고향까지 먼 길을 향하면서도 사귀는 사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색한 동행시간이었다.
현실 같지 않은 상황을 깨우는 건 날 것과 같은 매쾌한 코와 눈을 자극하는 날카로운 최루탄의 흔적만이 내가 가고 있는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게 해줬다.
도착해서 본 아내의 친정집은 오래되었지만, 관리가 잘된 대감댁 같은 대문을 지나 캠퍼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한복을 입고 잡일을 하고 있는 며느리들이 한눈에 보였다. 다들 아내가 데리고 온 사람이 어떤 놈팽이인지 살피겠다는 듯 눈에 불을 켜고 쳐다보았지만 시선을 마주치거나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고 일어나려고 하니 기억 속 고운 아내가 슬픈 듯···허공의 매쾌한 연기에···눈가를 찌푸리면서 말했다.
자신은 들어갈 수 없으니 대화가 끝나면 사랑방으로 건너오라고 말이다.
종갓집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불편한 속내를 숨기고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에게 힘내라는 말이라도 한마디 건냈어야 했나? 라는 생각하기 무섭게 인사하고 앉은 자리에서 질문이 공격처럼 들어왔다.
아직 아내의 친정아버지라는 분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엉덩이 붙이기 무섭게 날카롭게 귀를 찌르는 노회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자네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교육자 집안 이구만···저 계집애가 그래도 제대로 된 사람을 잡았구만.”
“지희씨도···대학에서 훌륭한 재원으로···.”
“계집애가 공부를 하겠다고해서 얼마나 말썽을 부리는지 어쩔 수 없이 보내놨더니 그래도 대학 간 보람이 있겠네.”
“······.”
매쾌한 최루탄의 향이 떠도는 공기에 다들 인상을 찌푸렸지만···나는 익숙하다는 듯···불편한 속내를 평소에 무뚝뚝하다고 자주 핀잔을 주는 아내의 말처럼 얼굴을 굳히고 어떠한 표현도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깊게 침잠하듯 침묵하는 것밖에 없었다.
깊어지는 회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서재에 놓인 양주를 한잔을 원샷하고 소파에 몸을 눕히듯 몸을 기대였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생각도 못 했는데···.’
아내가 젊은 시절 꿈을 이야기하면서 주었던 플라타너스 잎에 곱게 적어 놓은 시구 중 한 줄만이 붉고 푸르게 적혀있었다.
나는 사람이라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