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모범생의 삶2>
성적순이 아닌 뺑뺑이로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전까지 있었던 학력고사의 분위기는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살얼음판 같은 학력고사 시험날 나는 어머니가 데려다주신다는 걸 한사코 말리고 종혁이 아버지의 차를 얻어타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이미 경수가 자리 잡고 등 뒤로 건들지 말라는 아우라를 풍기며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 나와 종혁이는 좀 소란스러운 교실을 벗어나 복도 벽에 기대었다. 조금 홀가분해진 종혁이의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걸리는 게 있는지 차가운 복도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시험날마다 이런 분위기였다면···.’
“그래도 이번 시험은 너라도 옆에 있어서 편하네.”
“도움이 된다니깐 기쁘기는 한데. 뭐냐? 나 저번에 용돈 탈탈 털어서 복권 사고 먼지 하나 없다.”
“경수가 시험 전에 예민한 건 너도 봐서 알겠지?”
“그래···확실히 예민하네···바늘 떨어지는 소리에도 사람 죽일 분위기야.”
“그래서 시험 기간만 되면 괴로워.”
종혁이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뭐야? 시험 전인데 당연히 너도 마지막 정리해야지. 괴로울 틈이 어디 있어?”
“시험 기간은 괴로운 거지. 정리 안 되는 정리를 억지로 해야 하잖아.”
“네가 이상한 거거든? 성적 걱정은 안돼?”
“글쎄···그런 너는 왜 나랑 나와 있는데?”
“어차피 비 내리는 시험지 진정한 승부는 고등학교 때부터 보는 거지. 그러니깐 너도 잔말 말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바짝 붙어서 해.”
“뭐?”
“너 설렁설렁하는 거 다 티나 거든?”
‘사실은 미래에 네가 직접 나한테 하소연하는 모습을 봤다고 말할 순 없잖아?’
나는 장난스러운 말속에 진심을 숨기면서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꿈은 뭐였냐고···.
“내가 열심히 해서 너보다 성적 좋게 나오면 어쩌려고?”
“그럼 다음엔 내가 앞지르면 되는 거 아냐? 시험 한번 보고 말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내가 전교 1등이라도 하면?”
“열심히 노력해서 그렇게 된 거라면 당연히 너 님 대단해요~인정하고 축하하는 거지. 너랑 나랑만 경쟁이 아니라 같은 고등학교 아니지. 전국에 같은 학년 고등학생하고 경쟁하는 거거든? 그런 경쟁 사회에서 친구가 열심히 해서 1등 했다고 하면 더 좋아하고 축하하는 게 더 당연한 거 아냐? 그리고 나라고 못 할 것 있냐? 나도 고등학교 때는 열심히 달릴 거야. 목표가 생겼거든.”
“정말 친구가 자신을 앞질러도···괜찮은 거야?”
“괜찮겠냐?”
“역시 괜찮을 수가 없지?”
“친구라면 더 축하해줘야지.”
“뭐?”
“뻔히 알고 있잖아. 어떻게 했기 때문에 성적이 올랐다는 걸 그러니깐. 친구라면 잘 아니까 더 축하해주는 거야.”
“나는···.”
무언가 벗어나지 못할 미로에서 출구를 찾은 듯한 밝아진 종혁이의 모습과 동시에.
딩동댕동······
시험 시작종이 종혁이의 말을 막았다. 우리는 시험을 보기 위해서 교실로 들어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학력고사는 무사히 치르고 우리는 시험장을 나설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자 아이들이 우르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험 전 예민한 것처럼 시험이 끝나면 풀죽은 시금치 같은 경수 덕분에 우리는 마지막에 교실을 나설 수 있었다. 이미 시험이 끝난 학교 운동장을 썰렁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그런 운동장을 가로지르면서 우리는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지친다···지쳐.”
“···넌 뭘 했다고 지치냐?”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던 우리 앞을 막아서는 그림자에 지친 어깨에 들린 가방을 추켜세우면서 고개를 들었다.
“넌?”
“재민이 아니야?”
같은 반 재민이는 무리에서 가장 앞서 있었지만 당당해 보인다기 보다는 어딘가 주눅이 들어서 눈치를 본다는 느낌이었다. 재민이 뒤로 노는 아이들이라고 말하고 속칭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몰려있었다. 재민이 뒤에서 턱하니 어깨를 잡는 노란 머리는 처음 보는 아이였다.
’누구지?‘
백신중학교는 학교 분위기 자체가 학업에 전념하게 만든다는 취지로 조금 불량하다 싶으면 전부 학주에서 찍혀서 학교생활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속칭 노는 아이들 일진이라고 해도 머리를 염색하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같은 학교는 아닌 것 같은데?‘
종혁이가 작게 경수에게 이야기 하는 게 들렸다.
“저거 재하 아니야? 문재하?”
“전학 간 거 아니었어?”
“소문에 전학이 아니라 자퇴했다고 하던데···.”
노란 머리가 재민을 밀치면서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잘 아네. 그럼 내가 찾아온 이유도 알겠다?”
“뭐?”
“남주인 너 만나러 왔다고.”
“나를?”
나는 당황해서 반문하고 말았다.
’내가 문재하 하고 연관될 일이 있나?‘
“네가 재민이 좀 손 봐줬다고 하던데···꼴에 내 친구라는 놈이 맞고 다니는데 그럼 되나?”
“뭐?”
종혁이와 경수의 당혹스러운 반문에 대답할 틈이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는데 너무 소란스럽게 찾아온 거 아니야? 난 시끄러운 거 딱 질색인데.”
“나도 짭새 뜨고 그런 건 귀찮아서. 그냥 오늘은 경고해주러 온 거야. 내가 너 찍었다고. 그러니깐 앞으로 잘해.”
“뭘 찍었는지 모르겠지만 나 바쁜 사람이거든? 온 김에 볼일 해결하고 가지? 여긴 너무 눈에 띄니깐 조용한 곳에서”
“아하하핫···재미있는 친구였네? 말이 잘 통해.”
“몰려다니면서 눈에 띄고 싶은 마음 없거든 안남대교 아래서 만나자. 그 정도면 되겠지?”
“너무 늦게 오지 말라고 그럼 내가 열 받아서 무슨 짓을 할지 알겠어?”
“너나 늦지마.”
노란 머리가 자기 무리를 이끌고 사라지자. 재민이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나와 일행을 보더니 이내 노란 머리를 쫓아서 사라졌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 대충 일이 꼬인 것 같은데 정확한 건 나도 모르겠다. 종혁아 우선 주신이 데리러 가줄래?”
“뭐? 그건 그런데···괜찮겠어?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좀···내가 전학생인데···. 교실에서 재민이랑 한번 시비가 있었잖아···.”
“시비? 그런 일이 있었나?”
“별것도 아닌데 시비라고 느꼈나 보자.”
“아니면 나랑 네가 맘에 안 들었는데 전학 오면서 친해진 주인이를 노린 걸 수도 있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너야 전교 1등이지. 나도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교수인 거 소문이 나서 다들 알고 있고 그러니깐 만만한 주인이를 노린 거지.”
“학교에서 아무런 느낌도 못 받았는데···.”
“주인이가 왜 소각장 위치를 어떻게 알고 있나 했더니···.”
“뭐···좀 마찰이 있기는 했는데 좋게 마무리했어.”
“좋은 마무리가 뭔지 궁금하기는 한데 늦게 가면 재하가 말도 안 되는 트집 잡을 거야. 우선 주신이 데리러 가자.”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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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혁이와 경수에게 주신이와 내 가방을 부탁하고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그러면서 시험을 대비해서 단단히 준비하고 왔던 경수에게 빌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자연스럽게 인파에 섞여서 약속한 장소를 향해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해가 빨리지는 동절기라서 그런지 아직 시간이 이른데도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려고 했다. 그런 하늘을 일별하고 안남대교 아래서 담배를 물고 자기네들끼리 좋을 대로 앉거나 서 있는 불량해 보이는 무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올···혼자 왔어? 안 오거나 친구들 데려올 줄 알았더니.”
“그래도 꼰대 들 안 데려온 것 보면 난 좀 마음에 드는데?”
노란 머리 옆에 서 있던 짧은 치마 입은 여학생의 말에 심기가 뒤틀린 듯 사나운 표정의 노란 머리가 나를 향해서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어깨를 툭 치면서 더러운 심사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좋게···좋게 가면 나도 너 같은 놈한테 그렇게 볼일 없거든?”
“재민이 일로 왔다면서?”
“뭐···겸사겸사···그런데 진짜 내가 짱 된 거냐?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런 거에 관심 없어.”
그제야 얼굴이 펴진 노란 머리가 자기네 무리를 향해서 크게 외쳤다.
“봐봐···이 자식 백신중학교 짱 아니라잖아. 재민아 우리 대화가 좀 필요한 것 같은데?”
재민이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양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아니야. 제가 우리 학교 짱 이라고 그걸 자기가 인정 안 하는 거지.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고. 그러니깐 네가 말한 걸 난 할 수 없다니까.”
머리가 지끈거리는 순간. 나는 익숙해지지 않는 아찔한 두통과 귀속에서 울리는 이명을 참으면서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집중했다. 흐릿한 오래된 사진 속 장면처럼 느끼는 것과 동시에 사진이 움직이는 듯한 이상한 부유감이 느껴진다. 이명이 섞인 듣기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점차 대화 소리가 선명해진다.
변재민과 문재하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장소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대화가 엿가락 늘어지는 느낌과 함께 천천히 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못한다고.”
“나한테 반항하는 거야? 내가 자퇴했다고 ×× 네가 뭐가 된 것 같아? 내가 뭐 어려운 거 시켜? 이번에 간단하게 내 모임에서 축제를 하니깐 입장권 좀 팔아달라는 거잖아. 뭐가 어려워?”
“그래도 한 장에 만원이면···너무 비싸···그리고···.”
“너와 나의 관계에서 이 정도 의리도 못 보여주면 내가 서글퍼서···엉···.”
퍽.
쿠당탕.
“악···저번에도 강매해서 진짜 살 애들이 없어. 정말이야.”
“그럼 여자애들이라도 데려와.”
“그건······.”
“안되면 네 ×치라도 데려오라고 너 진짜 이번에 말 안 들으면 정말 죽여버린다? 나 어차피 자퇴해서 이제 꼰대 말도 들을 필요가 없거든? 장난 아니니깐 둘 중에 하난 꼭, 지켜 알았냐? ××아? 내가 없을 때 어깨에 힘 좀 준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나한테 잘 보여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주워 먹을지 생각하란 말이야? 알겠어?”
“그렇지만···나 이제 짱도 아니고···.”
“뭐? 내가 자퇴하면서 너한테 넘긴다고 그렇게 알렸는데 무슨 헛소리야? 도전하는 놈들도 내가 다 죽여놨는데.”
“이번에 새로 전학 온···.”
“아···××···새로 온 놈한테 넌 지치지도 않고 얻어맞았다는 거냐?”
“···.”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깐 어디 사는데?”
“그게···종혁이네랑 같이 살아서···.”
“뭐? 사글세야? 아···귀찮게···아닌가? 뒤에서 꼰대 짓 할 놈들도 없겠네···학교 근처는 내가 못가니깐 녀석이 밖에 나설 때 시간 하고 장소 빨리 잡아 와 알겠어?”
“으···응···.”
아찔한 감각과 함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들리던 대화가 엿가락처럼 느려지면서 감각이 점차 안남대교 아래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재하가 재민이의 뒷덜미를 잡고 머리를 장난스럽게 치더니 점차 강도가 강해지고 있었다. 재민이는 나를 향해 도와달라는 듯 필사적인 표정으로 나를 애타게 쳐다본다.
‘무슨 일인지 정리하고 물어봐야겠네···.’
나는 재민이를 향해 단단히 각오하라는 눈빛을 던지면서 재민이를 툭하고 때리고 있는 재하의 손목을 잡았다. 재하는 피식 웃더니 내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만만치 않은 힘으로 단단하게 붙잡고 있자. 표정이 굳어지면서 한 소리했다.
“야. 넌 뭔데 끼어들어?”
“몰랐는데 그것 짱 내가 맞는 것 같아서.”
“뭐? 무슨 헛소리야?”
“최소한 나랑 같은 반 같은 학교 학생이 맞고 있는데 가만히는 못 있겠는데 그럴 명분이 짱이라면 그깟 짱 내가 해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