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어머니라는 이름의 무게>
은영아, 처음 본 그날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너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었어.
“아줌마···도망쳐요.”
그 당시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어. 사실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저 이 기회가 한줄기 동아줄이라고 생각했거든.
시골에서 상경해서 제대로 해본 것도 없이 가진 은수는 나에게 축복과 동시에 커다란 족쇄였단다.
은수에게 밉다고 말했던 과거의 순간을 지울 수 있다면 뭐든지 했을 거야.
하지만 당시에 미혼모는 죄인이었고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단다.
그 대상이 은수였다는 건 나의 바닥이고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죄인 거지.
그 죄의 대가를 이번 선택으로 조금이나 벗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
이번 일로 내 딸들은 자유롭게 살게 되면 좋겠어.
많이 배우고 알아서 나 같은 그런 못 배운 여자가 아닌 자유롭고 꿈많은 그런···.
-은수의 엄마이자 은영의 엄마가 되고 싶었던···-
“은수 엄마 원망해요?”
“모르겠어. 그 ×새끼를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갑자기 자기가 죽여버리고 나한테 은수나 떠넘기는 그런 여자 모르겠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집 밖에 나와서 울고 있어요?”
“모르겠는데 그냥 슬퍼···어리석고 바보 같은···그냥 너무 슬퍼.”
“엄마는 은수랑 누나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거에요.”
“어떤 엄마?”
“······두 분 다요.”
“그럴까?”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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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제를 지내기 위해서 산을 타면서 앞서가는 어머니의 등을 바라본다.
좁다. 저 작은 어깨에 두명의 아이의 인생이 걸려있다. 무겁다. 내 손에 들린 단출한 상차림보다 더 무겁겠지?
아버지의 무덤가에 돗자리를 펴고 간단한 상차림을 차리자 어머니가 산을 타면서 힘이 빠진 듯 바로 자리에 앉는다.
‘산을 타느라 힘드셨을까?’
내내 앞서 걷고 돗자리를 펴자 나를 등지고 무덤가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정신이 흐릿해진다고 생각한 순간.
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인상 깊었던 골짜기가 나타났다.
계곡물을 따라 물안개가 신비한 빛을 내면서 흐르고 있었다.
오래된 오두막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정겨움을 느낄 수 있는 그림으로 그린듯한 오두막 앞에는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붉은 피부의 노인이 구부정한 자세로 나를 향해 있었다. 맑은 계곡물 위 안개속 숨을 쉴수록 몸과 마음 한 부분이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노인과 나의 거리가 상당히 멀다고 생각했지만 단 세 걸음 만에 노인은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노인은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백공?’
‘오랜만이네···어린 친구.’
‘어?’
‘허허, 제대로 연결이 되었나 보군.’
‘그게 무슨 뜻이시죠?’
‘지기가 약해진 상태에서 강제로 연결한 상태여서 걱정했는데 이제 지기가 안정되었다는 말일세···.’
‘아···그래서···그런데 저번에 저와 같은 땅에 선자 중 악한 마음을 먹은 자가 있으면 알 수 있도록 술법을 걸어놨으니 이번에는 좀 수월 할거라고 하셨는데 악한 마음의 기준이 뭔가요?’
‘자네에게 앞에서 말하는 것과 다른 의도를 비추는 걸 보여줄 거야. 그게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상관없이. 악한 마음보다 더 넓은 의미로 술법이 걸린 상태이지. 당시에 범용성 있도록 걸었지. 연결이 제대로 안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자네를 어떻게든 보호해야 했거든···어떻게 불편하면 조금 술법의 강도를 조절해 줄까?’
‘아니요. 지금이 좋아요. 아니 술법의 효과를 더 크게 해줄 수는 없나요?’
‘음···이 술법은 뭐랄까 인간의 오감을 극대화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네. 청각이 너무 강해져서 작은 소리도 다 듣게 된다면 인간의 뇌가 감당하지 못하지. 지금보다 술법을 강하게 하면 너무 많은 마음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계속된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환영과 환청 속에서 현실과 괴리된 삶을 살수도 있지. 그래서 지기가 보충되자 자네의 육체부터 강화한 거라네. 안 그럼 술법에 먹혀 버릴 수도 있거든.’
‘아···.’
‘뭐든지 과하면 안 좋은 법이지.’
‘그럼 지금보다 제 몸을 더 강화할 수 있나요?’
‘음···어린 친구가 욕심이 나는가 보군. 해주려고 하면야 가능하다네. 지기만 좀 더 보충된다면 가능하지. 그렇지만 주의해야 할 게 있어.’
‘네?’
‘다른 이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된다네. 이 부분은 절대적이야. 난 토지신이고 다른 이의 영역을 탐하는 것에는 그 대가가 필요하지.’
‘그게 무슨 뜻인가요?’
‘쉽게 말해서 강화된 육체로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딴다고 하면 자네가 아니었다면 금메달을 얻었을 사람의 인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세. 그걸 피할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추천하지는 않겠네. 그건 자네 아버지와의 계약에 어긋나거든.’
‘아버지와의 계약이요?’
‘그 부분은 언급할 수 없네···자네를 후회하고 있던 삶에서 벗어나게 해준 힘이지. 그리고 그런 큰 힘에는 대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주 세밀하고 예민하게 계약되어 있어서 언급하면 어떤 여파가 미칠지 알 수 없지.’
돌아가셨지만 아버지가 나를 지켜주신 건가?
‘자네는 조상신의 도움으로 잘살고 있다고 보면 되네. 그런데···자네에게 큰 특이점이 발생해서 어린 친구 앞에 나타난걸세.’
‘특이점이요? 특이점이란 게 뭔가요?’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볼 정도로 영향을 미치는 일이 발생했다네. 그런데 그걸 무사히 넘겼지 그럼 그에 따르는 상벌이 있기 마련이지. 그래서 내가 모습을 드러내고 어린 친구 자네와 대화할 수 있는 거라네.’
‘그렇다면···이번에 그···사건?’
‘아마도 자네를 통해서 막혀있는 흐름이 흐르면서 특이점이 발생한 것이겠지. 이 특이점을 또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자네의 몫일세. 순간 떠오르는 숫자가 있을걸세. 잘 활용해보도록 하게.’
‘아···이건 아버지와 어머니 생신일? 혹시 복권번호인가요?’
‘글쎄, 그건 자네가 활용해야겠지.’
특이점이 발생해야만 대백공과 대화할 수 있다면 내가 받은 술법과 대백공이 가진 능력에 대해서 파악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토지신 다른 지역에서는 성황당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보통 묘지 주변에서 귀기를 다스린다고 들었는데요.’
‘허허, 정확하게는 인간의 기운을 흐름이 막히지 않게 땅으로 하늘로 흘려보내는 중간자 역할이라고 보면 된다네.’
‘인간의 기운이요?’
‘그렇지. 이번에 지기를 얻게 된 땅도 어떻게 보면 많은 인간이 살 장소였기 때문에 얻은걸세.’
‘죽은 사람의 귀기만 다스리는 게 아니군요?’
‘그렇지 다만, 귀기가 흐르지 않고 멈춰있으면 산 사람에게 해가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인과에 따라 흐름이 멈추지 않도록 주시하는 것이지.’
‘산사람의 기운이 더 좋은가요?’
‘음···이건 개념이 사람의 기준과 땅의 기준이 달라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 천, 지, 인이라고 하면 알아들을까?’
‘네?’
‘땅은 하늘과 닿아있고 그 기운은 서로 상행하지 그 사이에 인간과 다른 동식물들이 있고 그들은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아 번성한다네. 그런데 인간의 기운이 아주 강하거나 약해져서 동식물들이 급격한 흐름 속에서 죽는 경우가 허다하지 그래서 나와 같은 토지신은 기운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흐르게 만든다네.’
‘뭔가 제가 원하는 설명하고 다른 느낌인데요.’
‘이 이상 설명이 필요하다면 어차피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부분이니···인연이 아닌 게지.’
‘네?’
‘계속 이해 못 할 대답이 나올 질문보다는 자네가 정말 필요한 걸 물어보는 게 어떤가? 어린 친구. 이왕이면 지기를 늘리는 방법이라던가.’
‘아···이번에 산 땅은 제 이름으로 된 땅이 아닌데도 지기가 늘어난 건가요?’
‘하하하. 그렇다면 이 선산은 자네 이름으로 되어있나?’
‘우문에 현답이시네요. 그럼 토지계약 같은 건 상관없다는 말씀인가요?’
‘그건 아니네. 인식의 문제이지. 이 땅과 그 땅의 주인이 자네라고 주변에서 인식하면 그게 바로 계약인 거네.’
‘그럼···.’
‘인간의 종이계약서와는 다르지. 인식의 문제랄까. 그런데 지금의 기준에서는 땅을 산 사람을 주인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편할 수 있어.’
‘과거에는 땅 주인으로 인식되는 게 힘든가요?’
‘과거에는 그 땅의 실제로 농사짓는 농민이라 해도 지주가 따로 있고 왕이 별도로 세금을 물리면 그 땅의 주인을 찾기 힘들 정도였지. 그래서 당시에 많은 혼란이 찾아왔을 거야.’
‘지켜보신 건가요?’
‘정확하게는 잠들어 있는 것이지. 지기가 약해지면 할 수 있는 게 없거든.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아···.’
‘그러니 자네가 할 일은 지기를 강화하는 것일세. 그게 자네 아버지와의 계약조건 중 하나였기도 하고. 지기가 약해지면 나의 술법도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 지기가 좀 더 충만해진다면 다른 쓸만한 술법도 하나 걸어줄 테니 노력하도록 해보게. 그리고 무서운 기운에 잡아먹히면 안 된다네. 그럼 자네가 가진 지기가 오염되어서 더욱 큰······.’
나는 멍한 상태로 완성된 묘에서 하염없이 아버지 비석만 쓰다듬고 있는 어머니 옆에 서 있었다. 대백공과의 대화는 특이점의 힘이 다한 것인지 누군가 우리의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갑자기 단절되고 덩그러니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는 그 자세로 정신이 점차 돌아왔다.
‘무서운 기운?’
대백공과 제대로 끝내지 못한 대화가 마음에 걸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어머니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어머니를 일으켰다.
‘어머니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나야. 그리고 무너트리게 만들 수 있는 사람도 나겠지.’
과거 후회되었던 회귀 전 삶을 생각하면서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기운이 날 수 있게 큰 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덤가를 보던 어머니의 표정이 어떤지 나는 과거에도 알지 못했고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어머니는 단출한 상차림을 정리하고 이내 굳건히 일어나 내 손을 보드랍게 쥐고 천천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다 크지 않은 나의 작은 손이 어머니에게 단단한 버팀목이 되게 한다는 걸 어렸던 나는 몰랐지만 지금 나는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