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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67)화 (167/167)

167.

아리의 성인식이 한창이던 때.

백령은 아리의 성인식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옮겼다. 그에 미호가 그의 뒤를 따라왔다.

“어디 가는 거야?”

미호의 말에 백령이 우뚝 멈춰 섰다. 백령은 어딘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아리와 은월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리가, 은월을 좋아하나 보네.”

미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둘을 바라보았다. 백령 또한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은월이라니. 아직 아리를 주기 싫은데.”

백령의 푸른 눈에 한기가 서렸다.

“뭐, 아직 둘 사이가 그리 가까운 것도 아니고. 그런 건 나중에 걱정해, 백령.”

미호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백령이 인상을 구기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시끄럽다, 미호.”

“어디가?”

“알 것 없다.”

그리 말한 백령이 향한 곳은, 하원이 머무는 강이었다. 나무 밑에 자리를 잡은 백령은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이곳은, 시호와 함께 자주 오던 곳이었다.

“시간이 그리 지났는데도, 이곳은 여전하구나.”

언제나 같은 이곳의 강물 소리를 들으며 백령은 눈을 감았다.

그날, 한없이 빛나던 한때를 떠올리며 백령은 감성에 젖었다.

“있잖아, 백령.”

시호가 흐르는 강물을 멍하니 보던 백령의 시야를 가리며 그의 앞에 앉았다. 이내 그녀는 백령을 올려다보며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나는 내 이름이 맘에 안 들어.”

시호의 입이 삐죽, 나왔다. 백령의 눈엔 그게 너무나도 귀여웠다.

“왜?”

백령이 무심히 묻자, 시호가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미호, 시호라니 누가 봐도 미호 동생이라서 시호라고 지은 것 같지 않아? 너무 대충 지었어.”

“그런가.”

그녀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백령은 실소를 터트리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백령, 넌 그렇게 생각 안 해?”

“난 시호라는 이름도 나쁘지 않은 거 같군.”

“치, 그래도 나는 이왕이면 좀 더 예쁜 이름이었음 좋겠어.”

백령이 시호의 보랏빛이 감도는 은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지금도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시호라는 이름도, 네 모든 게.”

“미호랑 비슷한 이름 말고!”

“그럼?”

백령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의문이 가득한 그의 푸른 눈동자에 시호가 급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음…… 그래, ‘아리’라는 이름 어때?”

“아리? 무슨 기준으로 지은 이름인지 모르겠군.”

“방금 예쁜 이름, 하고 떠올렸는데 나온 이름! 아무튼, 어때?”

“꽃의 이름이 바뀐다고 그 꽃의 향까지 변하진 않지.”

백령이 시호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에 시호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백령의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치, 하여간 이상하게 말은 잘해.”

“네 이름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

“응, 그냥 가끔 생각해. 이런 이름이었으면 좋겠다, 하고.”

“아리?”

“응. 예쁜 이름인 거 같아.”

백령은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시호가 그렇다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네가 다시 태어나고, 내가 네 이름을 짓는 날이 온다면 꼭 참고하도록 하지.”

“뭐어? 다시 태어난 후에는 난 네 연인이 아니잖아!”

“내가 잘 키워주도록 하지.”

백령의 농담에 시호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 백령은 시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니까 난, 지금 이대로가 좋아, 시호.”

“치, 알았어, 백령.”

‘그땐 정말 이리 될 줄 몰랐는데.’

백령이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아리가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령은 그 순간 체념했다.

연인인 시호는 가슴에 묻어두고, 이젠 이 아이의 행복을 기원하며 살겠노라고.

아리의 보호자로서, 끝까지 아리를 지키겠노라고.

***

나는 이랑이 준 서쪽 땅의 수호석을 들여다보았다. 예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서쪽 땅의 수호석은, 마치 이랑의 눈동자 같았다.

“예쁘다…….”

수호석 감상을 끝낸 나는, 목걸이에서 수호석을 빼내었다.

이제 이랑을 만나러 갈 준비가 끝났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비를 서다 잠들어버린 자하를 뒤로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이랑이 날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잊지 않았구나.”

이랑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내 기억력을 뭐로 보고!

인상을 찌푸리자, 이랑이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한동안 웃던 그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나 이제 서쪽 땅으로 돌아가, 아리야.”

이랑이 아쉬움이 뚝뚝 묻어 나오는 말투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어제 하원과의 수업이 마지막이었어.”

“그래…….”

살짝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이랑은 나의 좋은 친구고, 나를 많이 도와줬었으니까.

조금은 그의 자리가 공허할지도.

“그래서, 오늘 말해야 할 것 같았어.”

“뭐를?”

이랑이 한동안 대답하지 못한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조금 떨렸다.

이랑이, 처음으로 긴장하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대답을 아는데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네.”

이랑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와 함께 서쪽 땅으로 가지 않을래, 아리야?”

한참을 망설이던 말을 내뱉은 이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의외의 물음에 살짝 당황했다.

“뭐?”

“나와 결혼하자는 소리야.”

이랑의 목소리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으며, 그는 그 누구보다 진지했다.

“아, 이랑…….”

그렇기에 나는 쉽게 그의 마음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미안해.”

의외로 나의 대답에 이랑이 활짝 웃었다. 그의 그런 행동에 나는 그를 조심스레 살폈다.

“이랑?”

“알고 있다고 했잖아, 네 대답. 네게 전하고 싶은 내 이기심이었어.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이랑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랑에게 돌려주려고 서쪽 땅의 수호석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돌려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이랑이 슬픈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네가 이미 누굴 좋아하는지 알아,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어. 하지만, 내 마음을 전해야만 널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응? 무슨 소리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이랑을 바라보자, 이랑이 눈을 깜빡였다.

“왜 그렇게 봐?”

“내가 누굴 좋아한다고?”

나의 물음에 이랑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생하겠네, 은월.”

이랑이 작게 읊조렸기에, 정확히 듣질 못했다.

“뭐? 누가 고생해?”

“아니야, 아무것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이랑이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난 이만 가볼게. 시간 내줘서 고마웠어. 앞으로는 친구로서, 언제든 널 도와줄게, 아리야.”

이랑이 환히 웃으며 내게 인사하곤, 자리를 떠났다. 나는 떠나는 이랑의 모습을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랑이 떠나고 난 후, 정신을 차린 나는 청화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은월과…… 만나기로 했으니까.

어째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꾸만 긴장되는 탓에 입이 바싹 말랐다.

나는 청화관 앞에 도착하자, 은월을 찾으려 까치발을 들고 주위를 살폈다.

은월이 어디 있지…….

“뭘 그렇게 찾아, 아리야?”

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익숙하지만, 너무나도 두근거리는 목소리가.

“……은월.”

은월이 날 내려다보며 눈을 곱게 접었다.

“그래서, 뭘 그렇게 찾으셨습니까?”

은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의 미소에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 아무것도.”

“그래?”

은월이 자신이 걸치고 있던 도포를 벗어 내게 둘러 주었다.

내 어깨에 걸쳐진 도포에서 은월의 은은한 향기가 났다.

“들어갈까?”

은월이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월의 손에 이끌려 청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청화관에 들어오고, 우리 사이엔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몰래 은월을 흘끗, 바라보았다.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칼, 신비하고도 예쁜 회색빛 눈동자, 아름다운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을 감상하던 중, 은월이 날 돌아보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왜? 보던 거, 마저 봐도 되는데.”

은월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얼굴 안 보여주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리야?”

은월이 너무나도 자상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또야, 또…….

왜 은월 앞에만 서면 이러는 건지.

“몰라…….”

“뭐를?”

은월이 다시 한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여전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은월이 내 머리칼을 매만졌다.

“보고 싶었어. 그 짧은 순간마저도.”

그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얼굴 좀 보여줘, 아리야.”

은월이 애원하듯 내게 말했다. 그에 나는 아주 조심스레,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매우 가까워진 그를 향해.

“은월……. 혹시 성인식 때 장신구를 선물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어?”

나의 물음에 은월이 눈을 휘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나는 붉어진 얼굴로 은월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은월이 내 귀에 장식된 장신구를 만지며 말을 덧붙였다.

“‘당신을 연모합니다.’라는 걸.”

떨렸다. 이렇게 떨리는 건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무언가가 벅차오르면서도 설레는 기분.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은월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은월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날 봐주네.”

가까워진 은월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제가 당신을 연모해도 되겠습니까, 아리 님?”

은월의 예쁜 회색빛 눈에 오로지 나의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은월……. 나…….”

은월은 가만히 나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나와 눈을 계속해서 마주한 채로.

나는 처음으로 은월의 눈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러고선 나지막이 내뱉었다.

“좋아해, 은월…….”

어느샌가 나 또한 널 연모하고 있었나 봐, 은월.

나의 대답에 은월이 눈을 휘며 웃었다. 내가 언제나 좋아하던, 그 웃음을, 나는 떨리는 눈망울로 내 눈에 담았다.

은월이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은은한 향기가 청화관을 가득 채웠다.

“앞으로도, 너만을 연모할 거야. 내 모든 건 네 것이니까.”

은월의 말에 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의 얼굴을 만졌다. 그러자, 은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이번엔 나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그 입맞춤은, 향과보다도 더욱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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