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은월의 미소에 일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시끄럽던 주위가 한순간에 정적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오직 은월의 부드러운 음성만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내가 멍하니 은월을 바라보자,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 위에 떨어진 꽃잎을 잡았다.
“은월…….”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다시금 날 향했다.
“왜?”
그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부드럽게 물었다.
너는, 성인식 날 여인에게 장신구를 선물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내게 이걸 선물한 거야?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외에도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머릿속이 하얘져서 입밖에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딘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뭘까…….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는 이 감정은.
“아리 님!”
그때,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정신이 들었지만, 은월과 조금 더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겠지.
“나, 이만 가볼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은월에게서 등을 돌린 순간, 따뜻하고 큰 손이 나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우리 아리 님께서 날 왜 불렀을까?”
귓가에 은월의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바로 옆에서 은월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 그게…….”
다시 한번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의 볼은 터질 듯이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내가 곤란해하자, 은월이 나를 뒤돌게 한 후, 손목을 놓아주었다.
은월이 나의 귀에 장식된 장신구를 만지작거렸다.
“저녁에 들려줘.”
“응? 뭘?”
“하려던 말.”
은월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의 미소에 심장이 진정될 틈이 없었다.
“나 또한 그리할 테니.”
누구보다 예쁜 눈으로 날 바라보던 은월은 말을 마친 후, 만지던 장신구를 손에서 놓았다. 이내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은월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한동안 두근거리던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
연회도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것 같았다.
“아리 님, 어디 가셨었던 거예요!”
“왜?”
“미호 님이 아리 님을 애타게 찾으셨어요.”
미호가?
자하의 말에 나는 의문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자하 또한 나를 부른 연유는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백령 님께선 미호 님의 소재지를 알고 계실 거예요.”
자하의 옆에서 나와 자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아루가 내게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아, 나도 알고 있어! 아리 님께 내가 말하려 했는데, 이런 비겁한 놈.”
“어디서 고양이가 우네.”
“뭐?”
자하와 아루는 여느 때처럼 옥신각신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 둘을 내버려 두고 백령을 찾아갔다.
백령의 기운이…….
궁 안에는 백령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노, 백령 못 봤어?”
“백령 님이요? 아, 백령 님이라면 궁을 나선 지 꽤 됐어요.”
“궁을 나갔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노를 향해 묻자, 여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령 님이 궁을 나서서 어디로 가신지는 저희도 잘…….”
여노가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궁을 나갔다.
지금 대문으로 나간다면 모두의 주목을 받을 것이 뻔하니, 몰래 담을 넘어 궁 밖으로 나갔다.
궁 밖에 나오자, 목적지가 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 같아.”
나는, 천천히 내가 생각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하원이 머무는 아름다운 강이었다. 때마침 청아한 바람이 불었다. 그에 따라 흐르는 강물의 맑은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백호제가 열릴 때마다 백령이 찾는다는 곳.
주위를 둘러 눈으로 백령을 찾았다. 얼마 가지 않아, 백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백령의 모습은 너무나도 독보적으로 아름다웠다.
세상에 저리 아름다운 이가 또 있을까, 의문이 들 만큼.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그는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에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흐르는 강물 소리와 적당한 바람은 지금의 그에게 퍽 잘 어울렸다.
보는 이마저 마음이 저릴 만큼.
“……아리?”
그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백령이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백령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미안, 방해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괜찮다. 다른 이도 아니고, 너이니.”
백령은 그리 말하며 다시 강물을 바라보았다.
“묘하구나.”
“뭐가?”
나의 물음에 백령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미소엔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네가 날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기쁘구나.”
어째서인지 슬프게만 보이던 백령의 표정은, 조금 후련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
조심스레 그에게 질문했다. 그의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던진 질문이었다.
백령은 잠시간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하자, 아주 잠시, 애달픈 마음이 들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응?”
“그러니, 그 짐 또한 달게 지고 가야겠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볼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리야.”
“어……?”
분명, 내게 말하는 것 같았는데.
아닌…… 건가?
“신국에 남아주어서 고맙구나.”
“백령…….”
“성인식을 축하한다, 아리야.”
그리 말하는 백령이 사무치도록 슬퍼 보이는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그의 표정엔 아무것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저 말이 너무나도 슬프게 들렸다.
“미호가 아까 널 찾더구나.”
“아, 응……. 맞아.”
“미호는 저 숲에 있을 것이다.”
백령이 손가락으로 숲을 가리켰다. 이제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백령이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나는, 뒤를 돌았다.
그렇기에 나는, 슬픈 눈을 하고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백령이 일러준 대로 가다 보니, 미호의 기운이 확연히 느껴졌다.
“아, 아직 난 부족한 건가…….”
백령은 미호가 어디 있는지 기운으로 찾은 거겠지? 더 분발해야겠어.
“왔어?”
내가 도착하자, 미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미호…….”
“기다렸어, 아리야.”
미호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호의 자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응, 맞아.”
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이건…….”
미호가 건넨 건 손수건에 싸인 구슬이었다. 나는 구슬을 보자마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미호를 바라보았다.
이 구슬을 왜 내게……?
나의 물음을 듣지 않아도 안다는 듯, 그녀가 곧바로 답을 들려주었다.
“그 구슬, 네 거야.”
“이건, 내 거가 아니야.”
내가 부정하자, 미호가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리야. 그건 네 것이야.”
“미호, 나는…….”
“네가 시호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아리야.”
미호가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 마음 정리가 다 된 것 같았다.
“구슬이 널 선택했으니까. 전에 내가 네게 줬던 구슬도, 지금 네 손에 들린 그 구슬도.”
구슬이…… 날 선택했다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미호가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 내가 네게 구슬을 준 건, 내 자의가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구슬이 시켰어. 자신을 너에게 넘기라고.”
미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이 너무나도 다정했다.
“나는, 그때는 알지 못했어. 구슬이 네게 가길 원했고, 그래서 내가 너에게 구슬을 주었다는 것을.”
“그 말은…….”
“지금 이 구슬도 같아. 너에게 가길 원하고 있어, 아리야.”
미호의 말에 나는 구슬을 바라보았다. 내가 구슬을 바라보자, 구슬이 약하게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이 구슬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네 것이어야만 해, 아리야.”
미호가 차분하고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네게 구슬의 의무를 지게 하지 않을 거야. 원래 그것이 나와 백령의 계약이었으니까.”
“계약?”
“그래, 널 자유롭게, 구슬의 의무에서 풀어주겠다는 계약. 기억 안 나?”
그러고 보니 백령과 미호를 처음 본 날, 두 신수가 그런 논쟁을 벌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받아줘, 아리야.”
“미호…….”
미호가 환하게 웃었다. 이내 나의 결심이 서자, 구슬이 찬란한 푸른 빛으로 반짝이더니,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느껴졌다. 나의 몸 안에 구슬이 두 개가 존재하는 것이.
“고마워, 아리야. 받아줘서.”
미호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개운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시호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
미호가 말했다. 그녀는 차분하고, 또 침착한 표정이었다. 내게서 시호의 모습을 투영하고 갈망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 이상, 두 구슬이 모두 네게 향하지 않았을 테니까.”
“미호…….”
그녀는 심호흡을 내쉬고는, 큰 결심을 한 듯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네가 시호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
“맞아. 지금의 나는, 과거의 시호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어. 경험도, 감정도, 모든 게 달라.”
“그래……. 하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아리야?”
여태껏 무덤덤했던 미호가 슬픔을 머금고 날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미호는 그저 무덤덤한 척한 것이라는 것을.
“부탁……해도 돼.”
나의 말에 미호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껴안았다.
“한 번만…… 시호와 제대로 된 이별을 하고 싶었어.”
미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미호는…… 시호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못 했었구나.
“시호, 미안해, 정말로. 그리고, 내가 많이 사랑해.”
그리 말하는 미호의 음성은 가늘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무엇보다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미호가 나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시호는…….”
왜인지 이젠 미호에게 말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언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내가 본 시호의 기억을. 미호를 생각하는 시호의 마음을.
“그러니까, 이제 편해져, 미호. 시호에게 미호는, 언제나 사랑하는 하나뿐인 언니였으니까.”
그리 말한 후, 나는 그녀를 두고 뒤돌았다. 미호가 혼자의 시간이 필요할 거란 것을 알고 있기에.
뒤에서 미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듣지 못한 척했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그건, 아마 미호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 곪은 상처에, 딱지가 앉고 있는 것과 같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