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성인식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애초에 더는 방해할 자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까.
모든 일이 좋게 해결되었다. 사현은 완전히 소멸했고, 눈엣가시였던 사화 또한 소멸했으며, 날 위협하던 가휘 또한 이제 더는 이곳에 없다.
그런데, 뭔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뭘까…….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힘을 개방하며 시호의 기억을 볼 수 있었지만, 내 꿈에 나왔던 그 남자의 기억은 보이지 않았었다.
게다가, 백령과의 기억도 없어…….
나는 적적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푸른 달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달빛을 바라보고 있자, 백령에게 처음 물려왔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때, 백령은…….
날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가 준 아름다운 푸른 보석처럼 보이는 동쪽 땅의 수호석을 바라보았다.
푸른 보석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역시 말해야겠어.”
나의 말이 설령 그의 깊은 상처를 들쑤시는 것이라고 해도.
나는, 큰 결심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백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백령의 집무실 앞에 서자, 다시 한번 내 결심이 흔들렸지만, 나는 결국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작은 마찰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나는 애써 살금살금 조심히 백령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백령이…….
잔다?
백령이 책상에 엎드려 선잠을 자는 모습이 나의 눈에 담겼다.
그가 잠을 청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백령이 누군가의 이름을 애달프게 부르기 시작했다.
“시호…….”
여전히…… 시호를 그리워하고 있구나, 백령.
겉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어쩌면 누구보다도 사무치게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는 그였다.
백령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도 애잔하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자는 백령의 손을 잡았다. 크고 흰 손을 잡자, 백령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아리……?”
그의 아름다운 푸른 눈이 나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그제야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래, 백령은…… 단 한 번도 날 시호로 착각한 적이 없었어.
“여긴 어쩐 일이냐.”
백령이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나는 그의 손을 살포시 놓았다.
“그게…….”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렇게 말하는 백령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그런 거 없어.”
나의 표정을 본 백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마 지금 내 표정이 상당히 어둡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것이 아니면…… 혹, 성인식 때문인 것이냐.”
“백령.”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푸른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넌 여전히 내가 신국을 떠났으면 좋겠어?”
나의 물음에 백령은 눈을 감았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해 보였다.
뭐, 뜯어 말린데도 난 이곳에 남을 거지만.
나 때문에 시호가 생각나서 괴로운 거라면,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처신을…….
“성인식은…….”
감정이 뒤숭숭해, 말끝이 흐려졌다. 그러자, 백령이 눈을 한번 깜빡이곤 입을 열었다.
“가지 말 거라, 아리야.”
“응?”
“이곳에, 신국에 남아라.”
백령이 내가 놓았던 손을 다시 한번 잡았다.
“내 널 지켜줄 테니.”
백령의 푸른 눈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뭐, 뭔가 상당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백령…….
난 신국을 떠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나 안 떠나.”
나의 말에 백령의 호랑이 귀가 바짝 세워졌다. 백령이 나의 손을 조심스레 놓았다.
“그럼 무슨 일로 날 찾은 것이냐.”
백령이 처음으로 뻘쭘해 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백령은 금방 원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나, 궁금한 게 있어, 백령.”
나의 말에 백령이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궁금한 것이냐.”
“뭐든 대답해 줄 거야?”
백령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든 답해주마. 약속하지.”
백령의 약속에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그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넌, 알고 있었지?”
백령은 덤덤히 나의 물음을 들었다.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뜻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의 대답을 듣기 위해.
“내가 시호의 환생이라는 것.”
그를 보며 또박또박 말하자,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다 이내 눈을 감았다.
아마 내가 눈치챌 줄 몰랐을 것이다.
“……그래.”
한참을 대답을 망설이던 백령의 짧고 간결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다는 건…….
“나보고 신국에서 떠나란 한 건…… 어째서 그런 거야?”
“시호는 자유를 원했으니. 너 또한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백령이 담담히 말했다. 나는 아주 조심스레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넌…… 시호에 관한 소문을 믿었어?”
나의 물음에 백령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단지 생각에 잠겨 있었을 뿐.
나는 그런 그의 속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백령……?”
백령의 눈에 슬픔이 비쳤다. 하지만 그는 끝내 내게 무언가를 더 말해주지 않았다.
내게 말 못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그에 관해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럼, 날 인간 세상으로 보내려 했던 이유는…….”
시호의 소문을 믿었고, 내가 떠날까 봐……?
하지만 이내 들리는 대답은 아까 전과 같을 뿐이었다.
“그저 네가 신국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지길 원했다, 아리야.”
그의 말에서 진심이 묻어나왔다. 그는 한 치의 거짓도 내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후에 후회하지 않도록.”
백령은 뒷말을 일부러 삼킨 듯했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같은 운명이 반복되지 않도록.’
나는, 시선을 다른 곳에다 두고 그에게 하려고 했던, 그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를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시호는…… 인간 세계로 가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
구슬의 힘을 개방하며 보았던 시호의 기억 속에, 그녀가 인간 세계로 가겠다 마음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가휘의 이야기를 듣고 인간 세계에 흥미를 느낀 것은 사실이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시호의 이야기를 들은 가휘가 멋대로 그리 생각했을 뿐.
“시호에겐 자유보다, 사랑하는 이들이 더 소중했어. 언니와 친우, 그리고 연인.”
백령은 무던히 내 말을 받아들였다. 그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시호는…… 죽기 전, 너를 참 많이 보고 싶어 했어.”
백령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 또한 나를 바라보았다. 나의 푸른 눈과 백령의 푸른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쩌면…… 지금도.
나의 의식 속에서, 시호를 만났을 때 그녀가 작게 읊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만일…… 한 번이라도,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널 만나고 싶어, 백령.”
그녀가 눈물을 삼키며 했던 말을 나는 온전히 그에게 전해줄 수 없었다.
“……그랬군.”
백령의 푸른 눈이 아주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백령이 시선을 돌렸다.
“백령, 그러니까 내가 신국을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난, 시호처럼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소중하고, 이곳이 나의 집이었다.
그러니, 어떤 짐을 지게 되더라도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백령을 보며 확고하게 말했다. 그에 백령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알았다, 아리야.”
백령이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아름다운 미소에 나는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
아리가 떠나고 혼자 남은 집무실에서 달빛을 보며 백령이 사색에 잠겼다.
아까 전, 아리가 했던 질문을 생각하며 백령이 눈을 감았다.
“넌…… 시호에 관한 소문을 믿었어?”
백령이 시호를 떠올리며 낮게 읊조렸다.
“어찌 내가 너를 그리 생각하겠느냐, 너의 다정함을, 너의 솔직함을, 너의 숭고함을.”
백령은, 단 한 번도 시호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다만,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을 뿐.
말하지 않아도 시호는 알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말을 해야만 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뒤늦은 후회라는 걸 백령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백령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백령은 이번에 또 다른 아리의 질문을 떠올렸다.
“나보고 신국에서 떠나란 한 건…… 어째서 그런 거야?”
그에 대한 백령의 대답은 ‘자유를 위해서’였다. 자유 또한 어느 정도 그의 진심이었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널 닮은 아리를 보는 게, 때로는 괴롭구나, 시호.”
시호와 행복했던 때를 떠올렸다. 아직도 시호와의 모든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시호의 향, 시호의 기운, 시호의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자신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마저도.
백령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사무친 시호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니, 후회는 없다.”
새로운 삶을 사는 시호를, 아리를, 같은 악몽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주는 것.
그것이 백령이 아리를 보자마자 선택한 길이었다.
어쩌면, 아리를 보기 오래전부터 결심했던 길.
“네가 행복하다면, 그것이 나의 행복이니.”
백령은 작게 읊조린 후,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말을 내뱉은 후 백령은, 조금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러니, 끝까지 널 지킬 것이다, 아리야.’
달빛이 창가로 새어 들어와 백령을 비쳤다. 달빛을 받은 백령의 모습은, 슬프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