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으, 은월…….”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밤하늘을 닮은 흑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무슨 일이야?”
은월의 물음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 그냥……. 지나는 길이라서. 은월은 어디 나가?”
“나는 누구한테 가는 길인데.”
그리 말하며 은월이 고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미소에 잔뜩 상기된 뺨을 어루만지며 진정하려 애썼다.
“누구한테 가는 길인데?”
그를 향해 묻자, 그가 내 입안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익숙한 달콤한 맛과 향.
이것은 향과였다.
“보다시피, 네게 가는 길이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정지된 것만 같았다. 나는 푸른 눈을 크게 뜨고 은월을 바라보았다.
“근데 운이 좋았네, 만나려던 상대가 ‘마침’ 지나가는 길이라서.”
은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의 예쁜 미소에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
“어? 그런데, 향과라면…… 남쪽 땅에 갔다 온 거야?”
“그래, 갔었지.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사현이 죽었는데도 은월은 여전히 바쁘구나.
은월을 올려다보자, 그의 예쁜 회색빛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래서, 날 찾아온 용건이 뭐야, 아리야?”
은월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꽂혔다. 당황한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알고 있었어?”
“넌 말하지 않아도 다 티가 나니까.”
은월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머리를 빠르게 굴려 보았지만,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기에 솔직하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냥……. 뭐 하나 궁금해서.”
나의 대답에 은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왠지 부끄러워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일단 들어갈까?”
은월의 큰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를 따라 청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보아도 참 예쁜 곳이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서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아, 그런데 청화관은 누가 관리하는 거야?”
차를 마시며 청화관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은월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청화관은 스스로 관리가 되는 곳이야.”
“그게 가능해?”
“가능하게 만들었지.”
은월이 별것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화관 나무의 밑으로 갔다.
항상 여기에 은월이 누워 있었지.
과거를 회상하며 멍하니 서 있는데, 누군가가 나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으악!”
나는 손목을 잡아당긴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은월이 눈을 휘며 웃고 있었다.
은월의 손길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겼다.
왜, 왜 잡아당기고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나무에서 열매 하나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떨어졌다.
아, 저거 맞았으면 많이 아팠겠네.
“……고마워.”
나는 애써 은월의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러자 은월이 나의 보랏빛이 도는 은발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손길이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곳이 마음에 들어, 아리야?”
은월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너무 가까운 탓에, 그의 숨결마저 들리고 있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부정하려던 나는, 은월이 방금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말하지 않아도 다 티가 나니까.”
그 말이 떠오른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음에 들어…….”
이곳엔, 은월이 항상 있었으니까.
뒷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나는 은월을 보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예쁜 회색빛 눈동자에 나의 모습이 비쳤다. 은월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뒤로한 채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리야.”
그가 듣기 좋은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은월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때였다.
“은월 님!!!”
누군가가 은월의 이름을 부르며 이곳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은월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곧이어 은월을 찾아온 이가 나타났다. 그는 바로 산이었다.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난 이만 가볼게, 은월.”
더 있다가는 심장이 터져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
산이 자신을 지나쳐 가는 아리를 보고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어라, 아리 님도 여기 계셨…… 헙.”
산이 갑자기 말을 아끼며 표정을 굳혔다. 그에 은월이 눈을 휘어 웃으며 산을 바라보았다.
산은 알고 있었다. 저 웃음은 은월이 상당히 화가 났다는 것을 뜻하는 것임을.
“그래서, 날 찾아온 용건이 뭐지?”
아까 아리에게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으나, 아리에게 부드럽게 물었던 때와는 달리 그의 말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산은 식은땀이 흘렸다. 자신은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아리 님, 제발 돌아와 주세요.’
산은 이미 떠난 아리를 속으로 울부짖으며 찾았지만, 이미 아리는 청화관을 나선 뒤였다.
“대답 안 할 건가?”
은월의 냉기 어린 말에 산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산이 은월을 찾아온 용건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홍화관의 재건에 관한 일.
그러니까, 은월에게는 언제 와서 물어봐도, 100년 뒤에 와서 물어봐도 무방한 것이었다.
산은 제게 지금 이런 일을 맡긴 비천이 원망스러웠다.
“어, 음……. 그러니까.”
산은 점점 더 차가워지는 은월의 눈빛을 보며 땀을 뻘뻘 흘렸다. 열심히 변명거리를 찾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리 님…… 이 호랑이를 지금 말릴 분은 당신뿐입니다.’
산은 속으로 떠나는 아리를 붙잡지 않은 것을 죽도록 후회했다.
산은 결국, 은월에게 석고대죄를 하며 잘못을 빌었다. 은월은 그렇게까지 다그칠 생각은 아니었지만, 제 발 저린 산이 자처한 것이었다.
이후 산은 함부로 청화관에 들락거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서쪽 땅으로 돌아갔다.
아, 물론 홍화관 건은 조금도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은월은 한숨을 내쉬며 남은 공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낮의 일이 떠올라, 도무지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처음인 은월은 잠시 일을 놓고 머리를 식히며 사색에 잠겼다.
‘이리 깊게 빠질 줄 몰랐는데…….’
은월이 눈을 감았다. 언제부터 아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머릿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은월은 그저 시호가 그러했듯, 아리를 이끌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보고 싶네.”
은월은 아리를 떠올리며 다시 눈을 떴다. 은월은 한참 전에 깨달은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인정했다.
자신이 아리를 좋아한다는 것을.
은월은 이런 자신이 마음이 참으로 신기했다.
***
청화관을 나오고 내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뜻하지 않은 이를 만나게 되었다.
“아리야!”
“이랑?”
이랑이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날 바라보았다. 그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디 갔었어?”
이랑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행선지를 물었다.
말해야…… 하나?
내가 답하기를 망설이자, 이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날 내려다보았다. 마치 약 올리듯이.
“어딜 갔다 왔길래 그렇게 얼굴이 붉어진 거야?”
이랑이 장난기 가득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랑을 바라보았다.
“놀리지 마.”
“들켰네.”
이랑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에 나는 팔짱을 끼고 이랑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언제나 있지.”
이랑이 다시 한번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뭔데?”
“보고 싶었어.”
“헛소리하지 말고.”
나의 단호한 대답에 이랑의 늑대 귀가 축, 처졌다.
“언제나 난 예쁜 아리를 보고 싶은걸?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
그리 말하는 이랑이 강아지를 닮은 불쌍해보이는 눈을 하고선 날 바라보았다.
이 작은 똥개가 어디서 이런 쓸데없는 연기를 배워온 거야?
물론, 내게 먹힐 리는 만무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날 기다렸다는 건 이유가 있다는 거잖아.”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나의 완고한 대답에, 이랑이 졌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통하네.”
“알면 빨리 말해.”
이랑이 잠시간 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 성인식에 관해 들었어. 다시 치른다는 것도.”
그가 ‘성인식’에 관해 말하자, 나는 그가 날 찾아온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기억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
나의 말에 이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날 바라보았다.
“똑똑하네, 아리.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른 거야.”
그런데, 어딘가 이랑의 표정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내 착각인가?
“아무튼, 기억해줘서 고마워. 그럼 성인식 마치고, 그곳으로 와줘.”
“그곳?”
이랑이 말하는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자주 담소를 나누던 곳.”
“아.”
이랑의 설명에 나는 그제야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이랑이 뿌듯하다는 듯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날 계속 바라보았다.
그 별채 쪽인가…….
이랑이 항상 나를 끌고 가던 곳.
그곳밖에 없다.
“그럼, 성인식 때 봐, 아리야.”
“응?”
성인식은 아직 정확한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이랑은 마치 얼마 뒤에 성인식이 열리는 것처럼 말을 했다.
의아해하는 내 모습을 보자, 이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못 들었어?”
“뭐를?”
“네 성인식, 삼 일 뒤라던데?”
“뭐?”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이랑에게 재차 물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같았다.
“내 성인식이 삼 일 뒤라고?”
아니, 근데 왜 이 사실을 남한테서 들어야 하는 건데!
분명 백령이 ‘곧’이라고 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빠르잖아.
“어라, 분명 자하가 자진해서 전달한다고 했었는데…….”
자하, 또 네놈이냐.
나는 이마를 탁, 쳤다. 이젠 익숙해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아니, 그럴 수 없어!”
“아, 아리야, 진정해…….”
이랑이 나를 진정시키며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자하는 아직 환자잖아.”
“걘 항상 환자야.”
“그것도 그렇네.”
나의 말에 이랑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