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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62)화 (162/167)

162.

모든 일이 끝나고,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신국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위치로 돌아갔다.

단, 사현에게서 빼앗은 구슬 하나만은 빼고.

“그래서, 이 구슬을 어떻게 하고 싶은데?”

미호가 날 보며 물었다. 나는 구슬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호, 네가 맡는 게 좋지 않을까?”

“왜?”

미호가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그야…… 신국의 절대자니까?”

“흐응…….”

미호는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듯 턱을 괬다.

“난 이 구슬을 가질 자격이 없어.”

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 그녀의 표정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아리야, 잘 생각하고 판단해. 네가 지금은 이 구슬의 주인이니까 결정권이 있는 건 맞지만, 이건 아주 중대한 사안이야.”

그리 말하며 미호는 백령의 집무실을 나갔다. 집무실을 나가는 미호를 보며 백령이 혀를 찼다.

“고집하고는.”

“미호…….”

“신경 쓰지 마라. 여전히 시호가 죽은 걸 자기 탓이라 여기는 것 같으니.”

……그렇게 말하면 안 쓰이던 신경도 쓰이겠는걸?

백령의 무미건조한 말에 오히려 더욱 미호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시호는…… 미호를 전혀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는데.”

“저 아둔한 여우는 그걸 모르니 문제지.”

하원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남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야, 그냥 저거 갖다 버려.”

하원이 구슬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저걸 어떻게 갖다 버려!”

나의 외침에 하원이 손가락을 내리며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긴 하지.”

저게 진짜……!

나는 하원의 주인이 되었지만, 하원이 날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가끔 내가 정말 이 수달의 주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님 미호의 말대로 조금 더 고민해 보는 건 어떠냐, 아리야.”

백령이 아까와는 정반대의 자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백령의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구슬을 손에 쥐었다.

“알았어, 조금 더 고민해볼게.”

“그리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백령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곧 네 성인식이 다시 치러질 예정이니, 그것 또한 생각해보아라, 아리야.”

“아, 성인식…….”

결국, 아직 제대로 된 성인식을 치르지 못했었지, 참.

백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살짝 걱정됐는지, 백령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네 의사를 묻는 것이다. 성인식을 하기까진 시간이 있을 테니.”

“응, 알았어.”

백령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성인식은 다시 한번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것이고, 백령은 그저 그것을 알려주려 한 것뿐이라는 것을.

“아 참, 백령.”

나는 집무실을 나가기 전, 무심코 백령의 이름을 불렀다.

백령이 집무실을 나가려던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지금 백령에게 하려는 말이, 어쩌면 그의 상처를 다시 들쑤시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리 니임.”

집무실을 나오자, 자하가 이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자하?”

자하의 몸에는 사화와 싸울 때 생겼던 상처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 상처를 본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하를 바라보았다.

“왜 치료 안 받고 여기서 알짱대고 있어? 게다가 뛰면 상처가 벌어지잖아.”

“헤헤, 제게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아리 님의 호위인데 그런 것 따윈…….”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치료 안 받아?”

팔짱을 끼고 자하를 노려보았지만,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곧 아리 님의 성인식이 다시 치러진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치료를 받아요!”

“그건 여노가 도와줄 거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가.”

내가 자하를 향해 단호히 말하자, 자하가 실망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아리 님이 절 이리도 생각해주시니, 어쩔 수 없죠.”

“그건 아닌…….”

“하지만, 전할 말이 있어서요.”

자하의 예쁜 노란빛의 눈이 예쁘게 반짝였다. 청아한 바람이 불어와 자하의 황록색 머리칼이 흩날렸다.

“지금이 아니면, 왠지 못 말할 것 같아서요.”

나는 그의 눈빛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가려던 길을 멈추고, 자하와 정자로 향했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니, 설명보단 사죄가 먼저겠죠.”

“응? 사죄?”

“그날, 아리 님을 지키지 못한 절,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아리 님.”

자하가 무릎을 꿇고 내게 말했다.

그날이라면…….

내가 사현에게 납치된 그 날을 말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자하. 그거에 관해서 질책할 생각 없어.”

나는 부드럽게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날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하고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내게 과거에 관해 알려줄 수 있을까? 물론, 네가 원한다면.”

내 물음에 자하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내 자하의 입이 열렸다.

“제겐……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자하의 노란빛 눈동자가 짙어졌다.

“어머니는 홀로 저를 키우셨죠. 전 그때까지만 해도 제게 아버지란 존재가 있는 줄 몰랐어요.”

자하가 과거를 회상하듯 연못을 바라보았다. 연못에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제가 성체가 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을 때, 그러니까…… 아리 님이 발걸음을 떼셨을 때 정도였을 거에요.”

자하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갑자기 아버지란 자가 저와 어머니를 찾아왔죠. 옆에는 검은 머리에 아주 예쁜 뱀이 있었고.”

사현과 사화구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내 표정을 힐끗, 본 자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리 님의 예상이 맞아요. 사현은 제게 사화를 누이라고 소개했죠.”

자하가 담담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저 말에 담긴 증오를.

“사현은, 자식들을 학대하는 신수였어요.”

학대……?

신수가 신수를? 그게 가당키나 한 건가?

놀란 나의 표정을 본 자하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밖에 나가는 건 철저히 금지되어있었어요. 만약 그것을 어기고 나가게 된다면, 궁의 하인들에게 잡혀 와 매를 맞았었고.”

입술을 깨물었다. 자하의 과거가 이렇게 어두울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신국의 전통놀이는 하나도 모르고 클 수밖에 없었어요.”

그제야 자하가 전통놀이를 하며 그토록 즐거워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하…….

자하에게 무례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안쓰러운 감정이 일었다.

그걸 자하도 아는지, 일부러 입꼬리를 올렸다.

“감사해요, 아리 님.”

“응?”

“늦게라도 아리 님과 전통놀이를 즐길 수 있었잖아요. 그게 제게 어떤 의미인지 아세요?”

그리 말하며 자하가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슬프면서도 너무 예쁜 미소였다.

“그러니 저는 평생을 다해, 아리 님만을 지켜드릴게요.”

자하가 날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에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하.”

그의 이름을 부르자, 자하가 기대에 찬 눈망울로 날 바라보았다.

“네, 아리 님!”

“누구 마음대로 평생을 지키래?”

“예……?”

아니, 아기라서 말 못 할 때는 그냥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이번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자하가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이내 자하가 고개를 기울이며 고양이를 닮은 귀를 만지작거렸다.

분명 자하는 귀를 만지며 ‘내가 잘못 들었나……?’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평생 호위는 필요 없어.”

나의 단호한 말에 자하가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리 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자하가 조심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그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휘며 자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분간은 잘 부탁해.”

나의 말에 자하의 노란빛 눈망울이 커졌다. 이내 자하가 환히 웃으며 답했다.

“네, 아리 님!”

자하의 우렁찬 외침에 지나가던 하인들이 전부 다 이쪽을 바라보았다.

자하, 단순한 녀석.

당분간이라고 했으니 이제 언제든지 자하를 떼어낼 수 있겠지?

안심하며 자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하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자하의 우렁찬 외침을 듣고 이곳으로 달려온 이가 있었으니.

“너 대체 왜 여기 있냐?”

아루가 자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아, 아리 님이랑…….”

“시끄럽고, 하인들이 너 찾느라 지금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 알아? 잔말 말고 따라와.”

아루가 자하의 목덜미를 잡고 날 바라보았다. 목덜미를 잡힌 자하가 발버둥 쳤지만, 다친 자하가 말끔한 아루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리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루, 이제 궁에서 근무하는 거야?”

“아마 당분간은 그럴 것 같아요. 아리 님 덕분이죠.”

아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네, 그럼 전 이만.”

아루가 자하를 질질 끌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정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나도 이제 내 목적지로 가볼까나…….

자하의 이야기를 듣느라 생각보다 지체되긴 했지만, 그래도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더 늦은 시간에 간 적도 있으니까, 뭐…….

나는 옷가지를 챙기고 목적지로 향했다.

목적지 근처에 도착하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날 이후로 만나는 건 처음인데……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지?

아니, 그것보다 무슨 용건 때문에 왔다고 해야 할까?

대체 어떻게 하면 은월한테…….

그렇게 청화관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기를 몇 분. 나를 발견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

이 목소리는…….

하필이면 이제 막 청화관을 나온 은월과 마주쳐 버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은월이 눈을 휘며 예쁜 회색빛 눈을 반짝였다.

호랑이도 제 생각하면 온다더니…….

나는 제 생각하니 달려온 은월을 보고 그대로 사고가 정지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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