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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61)화 (161/167)

161.

“세월이 이리 지났는데, 여전하군, 백령.”

“신수에게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사현의 말에 백령이 무심히 답했다. 그 두 신수를 감싸는 기운은 무엇보다 강력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라…….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사현이 무상하게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이미 다 지난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듯이.

“하지만 모든 건 변하기 마련. 시호의 곁으로 널 보내주마.”

“그랬으면 좋겠군.”

사현이 검은 기운이 도는 검을 백령에게 휘둘렀다. 백령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검을 피했다.

“널 떠나려 한 여자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다니, 정말 눈물겹군.”

사현이 비웃듯 속삭였다. 그에 백령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현이 백령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백령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네 연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 백령. 알잖아?”

사현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백령은 그의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시답잖은 수작은 이쯤 하지. 네 능력은 내게 안 통한다는 걸 잊은 건가.”

백령의 차가운 목소리에, 사현이 뒤로 물러났다.

“웃기는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사현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백령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구슬이 있다는 걸 잊은 건가.”

사현의 말이 끝나고, 백령의 눈앞에 시호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건…….”

백령이 처음으로 동요하며 사현을 바라보았다. 사현은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 백령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능력은 너도 알다시피 동요하는 자의 마음에 파고들어 환상을 보여주는 능력이지. 하지만 구슬의 힘으로 인해 제약이 사라졌다.”

당황한 백령을 여유롭게 바라보며 사현이 입을 열었다.

“네가 동요한 순간, 넌 이미 나한테 진 거다, 백령.”

백령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귓가에는 오랜만에 듣는, 시호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가라, 백령.”

사현의 검은 파편이 백령을 향해 날아갔다. 이내 검은 파편이 백령을 감싸고, 옥죄기 시작했다.

“아리의 구슬 또한, 내가 가져가마.”

백령의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나와 은월은 백령과 사현이 사투를 벌이는 제단 위로 향했다. 그런데, 두 신수의 기운으로 인해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건…….”

“사현과 백령의 기운이 부딪히면서 결계를 만들었어.”

은월이 고개를 숙여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그냥 부술까?”

“……결계 부수는 게 쉬워?”

“지금의 너라면 그럴지도?”

은월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에 긴장되었던 몸이 조금은 풀렸다.

“농담이야. 네가 다치는 건 내가 원치 않아.”

“결계를 부수면 다쳐?”

“모르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그리 말하며 은월이 은빛으로 빛나는 검을 들었다.

“잠깐만, 은월.”

“왜?”

‘왜’라니! 만에 하나 다칠지도 모른다며!

그러나,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은월은 결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내 결계가 갈라지고, 우리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생겨났다.

“갈까?”

은월이 칼을 집어넣으며 다시 한번 날 바라보며 눈을 휘며 웃었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너무 예뻤다.

“……가자.”

은월과 함께 결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제 오는군.”

결계에 들어서자마자 사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백령은?”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백령을 찾았다. 그에 사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죽었다.”

사현의 말에 눈이 크게 떠졌다. 이내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현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네 구슬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하는군, 아리.”

사현이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에 나는 제단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백령의 칼이 떨어져 있었다.

백령……!

“이건 신국의 모든 신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지.”

“그 구슬은, 네가 가져선 안 돼.”

나는 그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에 사현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동안 웃어대기 시작했다.

“정말 웃기는군. 난 너희들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들이 법인 것처럼 행동하는 꼴사나운 모습.”

사현이 점점 나와 은월에게 다가왔다.

“그 구슬도 곧 나의 것이 될 것이다, 아리.”

그가 검은 기운이 도는 검을 휘두르자 재빠르게 나의 앞을 막아선 은월이 그의 검을 맞받아쳤다.

“흑호.”

“또 보네.”

은월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사현을 향해 인사했다. 그러자 사현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사현이 다시 검을 휘두르며 달려왔고, 은월 또한 그의 검을 피하지 않고 다시 한번 맞받아쳤다.

사현의 기운과 은월의 기운이 부딪히면서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은월을 돕기 위해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의 앞을 막아섰다.

“바랑…….”

바랑이 아까와는 달리 텅 빈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사현이 다시 한번 늑대의 심장을 사용한 거야?

바랑이 내게 검을 휘둘렀다. 나는 가까스로 그의 검을 피할 수 있었다.

“바랑을 다치게 할 순 없는데……!”

그가 원해서 날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의식은 사현에게 조종당하고 있었으니.

나는 물의 힘을 사용해 그의 검을 맞받아치면서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검에 신경이 쏠린 새를 틈타 바랑이 다른 한쪽 손으로 날 붙잡았다.

“윽.”

“삼촌, 그만해!”

그때, 이랑이 나타나 바랑을 뜯어말렸다. 이랑이 나와 바랑을 갈라놓으려 했지만, 바랑은 날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방해꾼이 나타났군. 하지만.”

사현이 다시 한번 늑대의 심장을 사용했다. 이내 이랑의 눈 또한 공허해졌다.

“이랑!”

바랑과 이랑이 텅 빈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안 돼…….

그때, 사현의 칼을 피한 은월이 재빠르게 바랑과 이랑을 걷어찼다.

“지금이야, 아리야.”

바랑과 이랑이 나가떨어지고, 은월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뜻을 이해한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 둘을 물 안에 가두었다.

사현이 나와 은월에게 다가왔다.

“물의 권능이라……. 그래, 하원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나 보군.”

사현이 노골적으로 날 노려보자, 은월이 나의 앞을 막아섰다.

“꺼져라, 흑호.”

사현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고, 은월은 그의 검을 정확히 맞받아쳤다.

“그 팔로 잘도 싸우는구나.”

사현이 일부러 칼을 돌려 은월의 다친 팔을 노렸다. 그에 은월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너라도, 그 팔로는 날 이기지 못해, 흑호.”

사현이 안타깝다는 듯 연기하는 투로 말했다.

“구슬을 내놔라, 아리. 저 흑호가 다치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에 은월이 사현에게 다시 검을 겨누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낸 상처도 아니면서, 유세 떨긴.”

“흑호……!”

은월의 말에 잔뜩 진노한 사현은 곧바로 은월에게로 돌격했다. 그에 은월은 이때다 싶어 나를 안고 제단 꼭대기로 올라갔다.

“은월!”

제단 꼭대기로 올라왔지만, 백령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까 봤던 백령의 검이…… 어디 갔지?

“도망치는 거냐, 흑호.”

꼭대기까지 쫓아온 사현이 은월을 보며 말했다. 그에 은월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리가.”

사현이 나와 은월을 향해 검은 파편을 날렸다. 그에 은월이 검으로 파편을 모두 갈라냈다.

은월이 내게 신호를 주듯 날 바라보았다. 그에 나는 사현을 바라보았다. 날아오는 파편 사이로 그의 목에 매달린 ‘늑대의 심장’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물의 권능으로 활을 만들었다. 이내 물로 이루어진 활을 잡아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활시위에서 손을 떼자 빠르게 날아간 물의 화살이 정확히 늑대의 심장에 꽂혔다.

“명중이야.”

은월이 낮게 읊조렸다.

“이런.”

사현이 인상을 구겼다. 이내 늑대의 심장에서 노란빛이 새어 나오며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산산조각이 난 늑대의 심장이 반짝이며 사라졌다.

그에 날아오던 검은 파편이 잠시간 멈추고 은월이 그를 향해 뛰었다.

사현은 정신을 차리고 은월의 검을 받아쳤다.

“어차피 너희는 날 이기지 못해. 내게 구슬이 있는 한.”

“글쎄.”

은월의 말에 사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뒤를 찔렀다.

저 검은…….

“크헉.”

사현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에 은월이 내 옆으로 돌아왔다. 나와 은월은 바닥으로 떨어진 사현을 바라보았다.

이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현의 곁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네 능력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 사현.”

그는 백령이었다.

백령의 푸른 검에는 사현의 검은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검에 묻은 사현의 피는 정화되듯 사라져버렸다.

“백령, 네가 어떻게……!”

백령은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사현을 내려다보았다.

“네 긴 일생도, 이제 막을 내렸군.”

백령이 검을 집어넣었다. 이내 사현의 기운이 점점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죽어가고 있어.

“백령……!”

사현이 백령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전과 같은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영원히 고통받아라, 사현.”

백령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현은 마지막 힘으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 내 것이었는데.”

그는 그리 말하며 눈을 감았다. 이내 그는 사화가 그러했듯, 소멸하기 시작했다.

그가 소멸한 자리엔 구슬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구슬은, 그와 함께 소멸하지 않았다.

“구슬은 끝까지, 사현을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

나는 사현이 소멸한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구슬을 손에 쥐었다.

“애초에 그의 것이 아니었으니. 모든 것이.”

은월이 그리 말하며 사현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내 길었던 밤이 지나고, 해가 뜨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은 구슬이 푸른 빛으로 빛났고, 나는 손수건으로 그것을 감쌌다.

“하지만 내 것도 아니야.”

그에 백령과 은월이 의아하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난 아리니까.”

나의 말에 두 호랑이는 미소를 지으며 나의 말을 인정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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