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눈을 떴다. 흐렸던 시야가 이내 선명해지고, 주위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긴…….”
나의 귓가엔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싸우는 모습들이 눈에 보였다.
“이제 끝이다. 흑호.”
가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휘와 은월이 칼을 맞대고 싸우고 있었다. 가휘의 말에, 어두운 기운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흑기의 기운이야.
“아리, 너 괜찮아?”
나래가 깨어난 나를 발견하고 황급히 내게로 달려왔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하원 쪽을 바라보았다. 기력이 바닥난 하원은 여전히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권능은…… 내 몸 안에 있어.
“백령은……?”
내가 백령을 찾자, 나래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제단 위에서 푸른빛과 검은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빛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백령과 사현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들에게 집중했다.
사현이 가져간 구슬……. 그것 때문에 백령이 밀리고 있어.
“쿠어어.”
이내 이상한 굉음이 들렸다. 흑기가 마침내 이곳에 도착해버린 것이었다.
흑기를 발견한 나래가 황급히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리야, 일단 피해야…….”
“아니.”
나래의 말에 나는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깨달았으니까.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몰려드는 흑기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예상치 못한 나의 행동에 다들 당황하며 날 바라보았지만, 은월만은, 날 믿는 듯 그저 묵묵히 지켜보았다.
“너희들 자리로 돌아가.”
흑기를 향해 신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푸른 빛이 새어 나와 흑기들을 소멸시켰다. 뒤이어 따라오던 흑기들은 그 광경을 보고 도망가기 바빴다.
“이건…… 시호의 힘인데. 시호, 의식이 성공한 거야?”
가휘가 기쁨에 차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은월의 칼을 피한 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보고 싶었어, 시호.”
그의 눈에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의 기대를 채워줄 수 없었다.
나는 시호가 아니니까.
“난 시호가 아니야.”
“뭐?”
나의 대답에 가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의 반응이 어떻든 내 대답은 변치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가 시호가 아니라니! 그 힘은 시호의 것이야!”
가휘가 진노하며 소리쳤다. 그의 눈에는 광적인 집착이 어려 있었다.
그가 이내 내 두 팔을 붙잡고 애원하듯 말했다.
“시호, 거짓말하지 마, 이 힘, 이 기운, 다 너잖아. 난 아직도 네가…….”
내게 시호의 기억이 흘러들어온 지금, 조금은 그의 모습이 가엾게 느껴졌다.
“그러니, 너도…….”
“아니, 넌 시호여야만 해.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돼.”
그가 칼을 높이 들었다. 그는 아무 망설임 없이 내게 칼을 겨눴다.
챙.
그런 가휘의 칼을 튕겨낸 건, 은월이었다.
“아리는, 아리야. 다른 그 누구도 아닌.”
“흑호, 네 녀석이 또……!”
은월의 말에 가휘의 눈동자가 분노에 부르르 떨렸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싫고, 널 용서할 수 없어. 하지만, 시호는 달랐지.”
“이게 뭐 하는 짓……!”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고, 그는 그 빛에 힘이 빠진 듯, 털썩 주저앉았다.
“시호는 널 용서했어. 그러니 난 널 단죄할 자격이 없지. 너 또한 긴 시간을 고통받고 있었으니.”
가휘의 검게 물들었던 모습이 점점 본래의 인간 모습을 되찾아갔다.
“그러니,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야. 그리고 이게, 나와 시호의 마지막 자비고.”
이내 가휘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왔고, 그는 완전히 본 모습을 되찾았다.
“시호……, 내가 시호를…….”
가휘는 이윽고 외면했던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했다. 아마 이연이 가휘의 본체라 했으니, 인간의 모습을 되찾으며 이연과 합쳐진 것 같았다.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게 두려워 줄곧 외면해왔던 진실.
그 진실을 받아들인 가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난 그저…… 시간을, 시호를, 모든 걸 돌리고 싶었어. 내가 지은 죄를 돌리고 싶었어.”
가휘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눈물 때문인지 그의 검은 눈은, 어느새 빛나고 있었다.
그가 괴로워하고 있었다. 줄곧 외면했던 진실은 그의 숨통을 조였고, 그는 괴로움에 발버둥 칠 수밖에 없었다.
“과거를 받아들이고 속죄한다고 지난 과거가 바뀌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래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 가휘.”
나의 말에 가휘가 눈을 감았다. 그는 그 나름대로 시호에게 속죄하고 있는 듯했다. 이내 그의 모습이 흐려졌다.
“흑기의 힘으로 생명을 유지했으니…… 그 욕망이 끝나면 생명도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지.”
은월의 말이 끝나자, 가휘의 몸이 완전히 소멸하고, 그 자리에는 검은 깃털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는 그 검은 깃털을 집었다.
인연의 끝은, 이토록 짧은데…….
“남은 건…….”
나는 사현과 백령, 그리고 사화와 자하 쪽을 바라보았다.
사화와 자하 또한 피 튀기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하의 상대는 북쪽 땅의 주인인 사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윽.”
자하가 사화의 힘에 밀려 바닥을 뒹굴었다.
“자하!”
사화가 우아한 자태로 자하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는 자하를 내려다보며 실소를 터트리며 비웃었다.
“네가 그 모양이니, 네 어머니가 그리 죽은 것 아니겠느냐.”
“입 조심해, 사화.”
자하가 사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하의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은월, 저게 무슨 소리야?”
나의 물음에 은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아끼려 하는 것 같았다.
시호의 기억에는 자하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하는 시호가 죽고 나서 백령과 만났다는 얘기인데.
“넌…… 내 어머니를 이용했어.”
“이용당할 만큼 머리가 나쁘면,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난 알 수 없는 두 신수의 이야기에, 둘의 대화만을 듣고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너도 아버지의 족쇄에서 풀려났잖아? 그러면 고맙다는 말이 먼저 아니니?”
아버지의 족쇄?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사화가 지금 뻔뻔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미 사과도 했을 텐데.”
사화의 눈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담긴 건, 오로지 비웃음뿐.
“하찮은 목숨으로 너와 날 살렸으니, 그 정도면 남는 장사가 아니냐?”
“사화……!”
자하가 이를 악물었다. 사화는 그런 자하를 여전히 비웃고 있었다.
“그날, 넌 모든 걸 알면서도……!”
“그래서, 내가 죽였다는 것이냐? 네 어머니의 숨통을 끊은 건 아버지야, 내가 아니라.”
사화가 천천히 자하에게 다가갔다. 나와 은월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더러운 사생아 주제에.”
사생아? 사생아라고? 자하가?
사화의 말에 난 눈을 크게 뜨고 둘을 바라보았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신수를.
그리고, 서로를 죽도록 미워하는 두 신수를.
“네가 뱀으로 태어났어 봐, 네 어머니는 그리 안 죽었을지도 모르지.”
“모든 게 다 네 계략이었잖아!”
자하의 외침에 사화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자하는 그 모습을 가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한동안 자하를 보며 비웃던 사화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 네가 저년의 호위가 되다니, 참 묘한 일이야.”
사화가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로 내 눈을 바라보며 자하를 향해 칼을 겨눴다. 어두운 검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기다려. 자하를 처리한 뒤엔, 네 차례일 테니까.”
“자하!”
내가 자하의 이름을 부르자, 자하는 자신에게 꽂히는 칼을 가까스로 피했다.
“아직도 힘이 남아 있다고?”
사화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자신의 칼을 피한 자하를 바라보았다.
자하의 황록색 머리가 흩날렸다. 그는 자신의 칼을 들어 당황한 사화를 찔렀다.
“마, 말도 안 돼.”
자하의 칼에 찔린 사화는 그 자리에 쓰러지며 몸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사화는 자신이 자하에게 진 게 믿기지 않는 듯했다.
“자하, 네가 감히……!”
사화가 자하를 노려보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
“사화, 넌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은월이 사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었다.
‘소멸.’
사화는 소멸하면서도 나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죄에 대해 조금도 속죄하지 않았다.
사화는, 자신의 죄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내 사화의 눈은 내가 아닌, 사현과 여전히 사투를 벌이는 백령에게로 향했다.
“어째서, 어째서 제겐 한 번의 눈길도…….”
사화가 완전히 소멸하고, 가휘와는 달리 그녀가 사라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자하!”
사화가 소멸하고, 기력을 다한 자하는 그대로 쓰러졌다.
내가 자하에게로 다가가자, 자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리 님, 제게 올 때가 아니에요.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자하는 그리 말하며 백령과 사현이 싸우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여전히 푸른빛과 검은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백령…….
“아리 님이라면, 이 일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이에요.”
그렇게 말한 자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목숨에는 지장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마 마.”
자하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내 머리 위에 은월의 큰 손이 얹어졌다. 그에 나는 은월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신비롭고 아주 예쁜 회색빛 눈을.
“은월…….”
“갈까, 아리야?”
은월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사현과 백령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그곳으로 향했다.
이 긴 악연을 끝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