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사현의 의도를 알아챈 은월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은월의 오른쪽 팔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흑호, 그 팔로 싸우겠다는 거냐.”
“아니, 안타깝게도 너와 싸우는 건 다른 이의 몫이지만, 네가 아리에게 손대지 못하게 막는 건, 이 팔로도 충분하지.”
백령이 사현을 향해 푸른 검을 휘둘렀다. 사현은 백령의 검을 피하느라 아리와 멀어지게 되었다.
“한눈팔 시간 없을 텐데.”
백령이 차갑게 사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현이 그에 손을 뻗자, 바닥에 떨어졌었던 검은 검이 사현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래, 어차피 네 녀석을 죽인 뒤에 구슬을 가져가도 늦지 않을 테니.”
“넌 아리한테 손끝 하나 못 댈 것이다.”
백령의 푸른 검에서 빛이 일렁였다. 이내 백령과 사현이 격돌하며 제단이 흔들렸다.
“이 파편, 빨리 끊어내야 해.”
나래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은월이 파편을 손으로 잡았다.
‘이 파편 때문에 아리의 신력이 계속 줄어들고 있어.’
은월의 손에서 짙은 보라색의 빛이 새어 나왔다. 이내 파편은 하나둘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한 거야?”
나래가 화들짝 놀라며 은월에게 물었지만, 은월은 그저 아리를 자신의 품에 안을 뿐이었다.
“글쎄.”
은월이 아리를 안고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해 움직였다. 팔이 욱신거렸지만, 지금 이런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리 님!”
자하와 포포가 은월과 아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아, 아리야!”
아리를 본 포포가 아리에게 곧장 달려왔다.
“싸, 싸부, 아리 괜찮아?”
포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은월은 어찌 설명해야 좋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은월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포포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보 여우, 아리 안 죽었어.”
“알아.”
나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내 포포는 여우로 변신하더니, 아리를 안고 있는 은월을 올려다보았다.
“아리를 내려줘, 싸부.”
포포의 붉은 눈망울이 빛났다. 그에 은월이 포포의 앞에 아리를 내려주었다.
포포가 아리의 옆에 섰고, 이내 푸른 빛이 일렁이더니 포포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 이건?”
자하가 그 모습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은월은 놀란 기색 없이 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다가온 이는 사화였다.
“너만, 너만 신국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사화는 검은 뱀들을 거느리고 쓰러져 있는 아리를 노려보았다.
“가서 저년의 목을 뜯어라.”
사화가 뱀들에게 명령하자, 뱀들이 아리에게로 빠르게 달려들었다. 아리의 곁에 서 있던 은월과 자하가 뱀들을 하나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뱀을 죽이고 또 죽여도. 뱀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사화……!”
자하가 사화를 노려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사화는 통쾌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아리를 죽이고 난 뒤엔 네 목부터 뜯어주마, 자하.”
사화가 아리에게로 다가갔다. 은월과 자하는 뱀들을 상대하느라 사화가 아리를 공격한다면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 오지 마!”
그런 사화를 막은 건 나래였다. 사화는 나래를 하찮게 바라보았다.
“비켜라. 날지도 못하는 새 주제에.”
“시, 싫어!”
“웃기는구나, 나래. 언제는 아리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었으면서.”
사화의 입에서 나온 나래의 과거에 나래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맞아, 내 실수로 아리는 죽을 뻔했고, 나 또한 그걸 바랐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나래가 사화를 노려보았다.
“아리는 그런 날 살렸어. 그러니까 나 또한 아리를 살릴 거야.”
나래가 비장한 표정으로 사화를 바라보았다. 은월은 나래를 보며 때를 기다렸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나래.”
사화가 단도로 나래를 찌르려는 그때, 나래의 날개에서 빛이 나더니, 그녀의 깃털이 주위의 모든 뱀에게 꽂혔다.
그때를 틈타 은월의 칼날이 곧바로 사화에게 향했다.
“사법관으로서, 널 처단한다, 사화.”
그때, 가휘의 목소리가 은월의 귓가에 들려왔다.
“재밌네.”
가휘가 흥미롭다는 듯 상황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근데 아직 그 여자는 쓸 일이 남아서 말이야, 사법관 나으리. 그 처단, 조금만 미뤄주겠어?”
가휘가 곧바로 은월을 공격했고, 은월은 하는 수 없이 가휘의 칼날을 받아쳤다.
***
“백령이 왔군.”
백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에 휘월과 청풍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가 됐구나.”
휘월이 낮게 읊조리자, 나의 의식에 누군가가 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기운은…….”
“아리야!”
여우 모습의 포포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이내 푸른 정원에 도착한 포포는 나의 품에 쏙, 들어왔다.
“포포?”
네가 왜 여기 있어?
눈살을 찌푸리며 포포를 바라보자, 포포는 그저 헤실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이로써, 네 힘을 해방할 수 있겠구나. 잠시지만.”
“예?”
백란의 말에 나는 포포와 그를 번갈아 보며 물음을 표했다.
“그 아이가, 네 기억과 힘을 열 수 있는 열쇠다.”
“……예?”
포포가…… 열쇠라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포포를 바라보았다. 포포는 여전히 헤헤, 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 아이는 언젠가부터 눈치챘었나 보군.”
휘월이 팔짱을 끼며 포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 곁에서 떨어지면 포포의 신력이 불안정해졌던 거야?”
그제야 나는 모든 게 이해가 갔다. 포포가 나와 떨어지면 아팠던 이유, 가끔 툭툭 내뱉는 이상한 말들.
“네가 다시 신국에 내려가기 전까지 이 아인, 방황하고 떠돌며 자신의 존재를 몰랐지.”
백란의 말에 포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널 만나고 많은 게 달라졌어, 아리야.”
“자신의 존재를 모른 이 여우는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여우 신수들의 무리에서 따돌림당하고,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단다.”
“힘든 나날이었어…….”
과거를 떠올린 포포의 여우 귀가 아래로 처졌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포포의 귀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덕분에, 싸부랑 만날 수 있었고, 싸부가 날 구해줬고, 싸부를 따라다니다 보니 아리, 널 만나게 된 거야.”
포포의 붉은 눈망울에 나의 모습이 비쳤다. 포포가 날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널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기뻤어, 아리야.”
‘다시’ 만나게 됐다니?
포포의 말에 고개를 기울이며 영문을 몰라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포포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제 때가 됐구나.”
휘월이 눈을 휘며 웃었다. 이내 휘월이 손짓을 하자, 포포의 모습이 흐려졌다.
포포가 내 품 안에서 빠져나갔다.
“아리야, 고마워.”
“포포……?”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포포가 소멸하고 있다는 것을.
“안 돼…….”
손으로 잡으려 했지만, 나의 손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이내 포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푸른 정원과 신선들 또한 사라졌다.
“여긴…….”
푸른 들판이 나타났다. 나는 광활한 푸른 들판에 서 있었다.
눈앞에는 나와 굉장히 비슷한 모습을 한 여인이 나무 밑에 앉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시호…….”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 여인이 시호라는 것을.
“왔구나, 아리야.”
청아한 바람이 나와 시호 사이를 가로질렀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와 시호의 머리칼은 퍽 닮아 있었다.
시호를 마주 보고 있자, 시호의 모든 기억이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날의 진실까지도.
“넌…… 인간 세계로 갈 생각이 없었구나.”
“그래, 가휘가 하는 말은 정말 흥미로웠지만, 난 소중한 이들을 두고 이곳을 떠날 생각은 없었어.”
시호는 온화한 미소로 먼 들판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항간에는 내가 이곳을 떠날 거란 소문이 떠돌고 있었지.”
천강이 말했던, 그 소문.
“미호는 날 믿지 못했어. 그래서 난 사랑하는 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내 구슬 중 하나를 언니에게 맡겼지.”
시호가 나와 닮은 눈동자로 날 바라보았다.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그 구슬말이야.”
“시호…….”
“원래 사현의 계획은 나와 구슬을 다 없애는 것이었어. 자신의 권력에 방해되는 것들이니까.”
시호가 그날을 회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가휘는, 나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사현의 달콤한 말에 속아 그렇게 되어 버렸지. 가엾은 인간이야.”
“왜? 널 죽였잖아.”
난 시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자, 시호는 그런 날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날 죽인 건 맞지만, 그 또한 사현의 희생양일 뿐이야. 가휘가 원해서 신국으로 흘러들어온 것도 아니었고.”
“시호…….”
“그 죄로 흑기가 되어 영원히 고통받게 되었잖아.”
시호는 정말로 가휘를 가엾게 여기고 있었다.
시호는, 가휘를 탓하지 않고 있구나.
그것이 시호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죽기 전, 내가 소멸해버리기 전에 그에게 나머지 구슬을 넘겼어. 단, 예전의 순수했던 모습을 되찾으면 비로소 보이는 조건으로.”
그래서 이연이…… 구슬을 가지고 있었던 거구나.
“그때 죽기 전, 우리 싸움에 말려든 작은 여우가 하나 있었어.”
“포포…….”
“나는 죽기 전, 그를 살려주었고, 그 여우는 자처해서 나의 열쇠가 되어 주었지.”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시호의 기억은 옛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내겐 하나도…… 와닿지 않아.
내 표정을 본 시호가 미소를 띠며 날 바라보았다.
“당연해. 넌 나고 난 너지만, 너와 난 다른 삶을 살았고, 다른 이를 가슴에 품었으니까.”
시호의 푸른 빛이 나를 감쌌다. 그녀의 모든 힘이 내게 흘러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 가, 아리야.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넌,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 말하는 시호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