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내 의식에 들어온 또 다른 자……. 나는 그를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또한 백란과 같은 신선이라는 것을.
“당신은……,”
은월과 똑 닮은 밤하늘처럼 어두운 검은 머리칼. 아름다운 회색빛 눈동자. 다른 점이 있다면 장발이라는 것 정도.
“은월의…… 아버지?”
백령의 아버지가 백란이듯, 은월의 아버지는 이분인 건가?
“네 힘을 해방하기 위해선 휘월이 필요하지.”
백란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에 휘월이 백란의 옆에 앉았다.
그가 은월과 똑 닮은 회색빛 눈동자로 날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퍽 다정했다.
“오랜만이구나, 아리야.”
“절 아세요?”
“지난번에 무릉도에 오지 않았느냐.”
무릉도에서 내가 휘월을 봤었던가?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기억을 되짚자, 휘월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신수는 신선을 보지 못해도, 신선은 신수를 볼 수 있는 법이지.”
그리 말하며 휘월은 어느새 가득 차 있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향이 좋구나.”
“그런데, 저의 힘을 해방한다는 게…….”
조심스레 백란과 휘월에게 물었다. 그러나, 백란과 휘월은 날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때가 되면 다 알 것이다.”
아, 예…….
그들은 내게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은월이 도착했군.”
백란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은월이…… 도착했다고?
내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그에, 깜짝 놀란 나는 백란을 바라보았다.
“쯧, 이렇게 느려서야, 자격이 없군.”
휘월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자격? 무슨 자격?
알 수 없는 휘월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자, 휘월이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곤 날 바라보았다.
“네 남편이 될 자격 말이다.”
“예, ……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휘월의 말에 크게 당황하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내 반응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은월을 욕하며 혀를 찼다.
아, 아니, 보통은 반대 상황이어야 맞지 않나?
“그래도 다행이군. 덕분에 시간 좀 벌 수 있을 테니.”
“사현은 구슬 하나를 손에 넣었고, 의식으로 아리의 신력도 어느 정도 흡수했으니……. 자신의 힘을 되찾았겠군.”
휘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백란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들이 걱정되는가.”
“그럴 리가. 누구 아들인데. 저런 족보도 없는 놈한테 지면 호족 파야지.”
백란의 물음에 휘월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강하게 키우시는구나.
“하긴, 자네 아들이니 어지간히 알아서 하겠지.”
난 두 신선의 대화에 끼지 못한 채, 멀뚱멀뚱 그들을 지켜만 보았다.
“그것보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휘월의 낮은 읊조림이 끝나자마자, 나의 의식 안에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
왠지, 누군지 알 것 같아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다들 나만 빼고 여기 모여 있는 거야? 섭섭하게.”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나타난 청풍이 어느새 옆에 앉아 있었다.
“꺼져.”
“꺼져라.”
백란과 휘월의 반응 또한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청풍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누군가와 퍽 닮아 있었다.
“나 여기 있어도 괜찮지?”
나는 최대한 밝은 미소로 그에 화답했다.
“나가주세요, 당장.”
***
“호오, 꽤 하는구나.”
사현이 은월의 검술에 감탄하며 말했다. 은월은 그의 말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해 그를 상대하고 있을 뿐.
그를 몰아붙였다간, 아리가 위험해지니까.
“사법관이란 자리는, 괜히 네게 맡겨진 게 아니었군.”
사현이 은월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때 이 호랑이가 사법관 자리에 있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르겠군.’
사현은 전대 사법관을 죽인 장본인이었다. 그렇기에 사법관을 무서워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다.
“역시 신선의 자식 중 하나란 말인가……. 빌어먹을 것들.”
사현은 증오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신선의 자식.
사현의 증오 대상이었다. 신국에 대부분은 자연 발생한 신수거나, 신수끼리 부부의 연을 맺어 낳은 자식이지만, 간혹 신선의 자식이 나타났다.
사현은 그것들이 자신의 것을 뺏어가는 걸 보는 것이 끔찍이도 혐오스러웠다.
“너와 내가 다른 것이 무어란 말인가.”
사현이 은월을 노려보며 읊조렸다.
은월은 답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에게 답할 생각이 없었다.
‘열등감에 찌들었군.’
은월은 그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신선의 자식이 아니어도 자신의 능력만큼 인정받는 곳이 이곳, 신국이었으니까.
“놀아주는 건 여기까지다, 흑호.”
사현이 은월을 향해 칼날을 휘둘렀다. 은월은 가볍게 그의 공격을 피한 후, 그와 칼을 맞대었다.
“누가 누굴 놀아주고 있다는 건지.”
은월이 가볍게 그의 칼을 튕겨냈고, 사현의 칼이 제단 밑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사현은 칼이 떨어졌어도 아무렇지 않게 검은 파편을 은월에게로 날렸다.
“아직 안 끝났다, 흑호.”
“이건 내게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텐데.”
은월은 검은 파편을 검으로 모두 갈라냈다. 그런데, 그의 뒤에 다가온 가휘가 은월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이런.’
검은 파편이 쉴 틈 없이 계속해서 날아오는 상황 속에서 빠르게 날아오는 가휘의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가휘가 곧장 사현에게 달려가 그의 앞에 섰다.
“지난번에 진 빚을 갚아주지, 흑호.”
사현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검은 파편을 은월에게 날렸다. 은월은 검은 파편을 가르며 가휘의 칼날을 받아쳐야만 했다.
‘저건 너무 불리해.’
바랑이 그 광경을 지켜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바랑이 괜히 나섰다가 늑대의 심장으로 조종당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대참사였다.
하지만 바랑의 걱정도 잠시.
전혀 밀리지 않는 은월을 보며 바랑은 저게 신수인지 신선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은월의 체력도 한계가…….’
물론, 은월을 잘 알고 있는 바랑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저대로 가면 결판이 나지 않았다.
‘도울 방법이…….’
그때, 바랑의 귓가에 익숙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아리를 향해 소리치고 있는 나래의 목소리가.
“정신 차려, 아리야!”
바랑은 소리치는 나래에게로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를 묶고 있는 검은 파편을 풀어주었다.
“바, 바랑?”
나래가 화들짝 놀라며 바랑을 바라보았다. 그런 나래의 목소리에 바랑이 검지를 입에 갖다 댔다.
“쉿.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은월을 가서 돕는 게 어때?”
바랑이 나래를 향해 말했지만, 나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바랑의 시선을 회피했다.
“나, 나 싸움 못 하는데…….”
“너 봉황 아니냐?”
“맞는데.”
바랑이 이마를 탁, 쳤다. 나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납득하려 애썼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게.”
나래는 곧장 제단으로 달렸다. 그러자, 모든 이의 시선이 나래에게로 꽂혔다.
“저 쓸모없는 계집이!”
나래는 단숨에 제단을 올라 아리를 묶은 검은 파편을 끊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래의 목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고, 나래는 그대로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물에 손대는 건 안 되지. 가뜩이나 의식도 덜 끝났는데 말이야.”
그녀의 목덜미에 칼을 댄 자는, 다름 아닌 사화였다.
“역시 내 딸이란 말이야. 등장하는 순간이 기가 막히는군.”
사현이 낮게 읊조렸다. 그러자, 사화는 눈을 크게 뜨고 사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은월은 모든 일을 망친 바랑에게로 눈길을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바랑은 그런 은월의 눈길을 살며시 피했다.
“당신은……!”
사화의 황금빛 눈동자가 커졌다. 칼을 든 사화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렸다.
“아……버지?”
사화의 표정은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상봉한 딸의 표정이 아니었다. 사화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경악에 찬 표정으로 사화는 사현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사화.”
“당신이 어째서 살아 있는 거죠? 이건, 이건 꿈이야.”
사화의 표정은 곧이어 절망으로 물들었다. 사화는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흔들었다.
“널 만날 수 있어 아주 기쁘구나, 사화.”
이내 사현은 은월을 지나쳐 사화에게로 향했다. 사현을 막으려던 은월은, 가휘의 방해로 인해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오, 오지 마. 당신은 죽었어. 백령 님이, 당신을, 당신을 죽였어.”
사화의 외침에 가휘가 호탕하게 웃었다. 가휘의 반응을 본 사화는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깨달았다.
사현이 사화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사화가 경기를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사화는 마지막 정신으로 나래의 목에 대고 있던 칼을 들었다. 그녀의 칼날은 사현이 아닌, 아리에게로 향했다.
“안 돼.”
그 모습을 본 은월이 곧바로 움직이려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저지되었다.
“어딜 가려고?”
가휘가 은월의 칼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은월은 아무 망설임 없이 칼을 놓았다.
“이런.”
은월은 당황한 가휘를 뒤로 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사화를 제압하는데 시간이 부족했던 은월은 자신의 팔로 칼을 받아냈다.
“으, 은월…….”
나래는 은월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지키는 그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또 다른 칼날이 사현에게로 향했다.
“사현, 거기까지다.”
사현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칼날을 피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칼을 휘두른 자를 바라보았다.
“백령, 이제야 오는군.”
백령의 주위에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어느 때보다 강력한 기운이었지만, 사현은 그런 백령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복수의 시간이 찾아왔구나, 백령.”
사현에게는 구슬 하나가 있었으니까.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사현의 눈길이 아리에게로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