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57)화 (157/167)

157.

가휘의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엇이든 할 것 같은 광기 어린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가휘는, 이미 흑기 그 자체가 되어 버린 듯했다. 오로지 본인의 욕망만을 좇는.

가휘가 점점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여전히 검은 파편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였다.

“가휘…….”

그를 노려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내 오랜 염원이…… 드디어.”

그가 하늘을 보며 벅차오르게 말했다.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제물이 되고 말 거야.

나는 이연이 쓰러진 자리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그게 네 염원이야? 모든 걸 되돌리는 게?”

나와 눈을 마주한 가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내게로 다가왔다.

“그래, 내 염원. 언제나 변함없어.”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와 다르게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가 점점 더 내게로 다가오더니, 검은 칼을 빼 들었다.

“이제 의식을 집행하죠, 주인님.”

이내 그는 내 목에 칼을 가져다 대었고, 차가운 칼날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챙.

그때, 누군가의 일격으로 가휘의 칼날이 튕겨 나갔다. 그 반동으로 가휘는 칼을 놓쳤고, 칼은 바닥에 떨어졌다.

“내 주인한테서 떨어져.”

그렇게 말한 이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하원……!”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인 하원을 바라보았다. 하원은 아까 쓰러져 있던 때와 달리, 기운을 회복한 것 같았다.

“그러게, 물의 주인을 너무 만만하게 보지 말라니까.”

바랑이 어깨를 으쓱이며 가휘에게 낮게 읊조렸다.

바랑의 빈정거림에 가휘는 이제 내가 아닌, 하원을 노려보며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하원에게 겨누었다.

“귀찮게 하는군, 하원.”

가휘의 주위로 검은 기운이 일렁였고, 하원은 그에 질세라 푸른 물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네겐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지, 가휘. 지금 모든 빚을 갚아주지.”

하원과 가휘가 이내 격돌했다. 이상하게도, 비등했던 전과 달리 지금은 하원이 우세했다.

물로 된 칼날이 가휘의 뺨을 스쳤고, 이내 검은 피가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휘는 하원의 공격을 피하느라 바빴다.

“전과…… 무엇이 달라진 거지?”

“많은 게 달라졌지.”

하원이 또다시 가휘에게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그때, 검은 파편이 하원을 속박했다.

“겨우 저런 것에게 지는 것이냐, 가휘.”

“주, 주인님.”

가휘가 곧장 사현을 향해 납작 엎드렸다.

사현……!

사현이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제단에서 내려왔다.

“물의 주인, 하원. 결국, 아리를 주인으로 받아들였나 보군.”

하원의 남색 빛의 눈에 한기가 어렸다. 하원은 사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사현, 네놈이 감히!”

“넌, 결국 네 주인을 단 한 번도 지키지 못하는구나.”

사현이 비웃음 섞인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원의 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이번에도 넌, 아무것도 막지 못해. 주인 잃은 가엾은 물의 주인은 결국 이리될 운명인 거지.”

“사현…….”

내가 그를 노려보며, 그의 이름을 낮게 부르자 그가 날 돌아보았다.

“아쉽게 됐어, 아리. 널 주인으로 받아들인 이 가엾은 신수는 곧 죽을 테니까.”

사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원의 신력이 검은 파편으로 빨려 들어갔다.

“혼자 안일하게 이곳을 왔으니, 대가는 치러야지.”

사현은 그리 말하며 다시 제단으로 올라갔다.

“하원!”

숨죽여 괴로워하는 하원을 보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이내 하원은 정신을 잃었다.

“이제 방해꾼도 다 사라졌으니 미뤘던 의식을 마저 집행하지.”

사현의 말이 마치자마자, 내 몸을 조여오는 검은 파편들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리야, 안 돼, 정신을 잃으면 안 돼!”

나래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그녀의 외침에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안 돼! 정신 차려, 아리야!”

***

푸른 정원. 너무나도 편안한 이곳은 아까의 슬픔과 고통이 사라진, 너무나도 안락한 곳이었다.

“이곳은…….”

그곳에는 푸른 빛이 도는 은발의 아름다운 남자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왔느냐.”

“백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날 돌아보았다.

“앉거라, 얘기가 길어질 터이니.”

그의 말에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가 내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어떻게 된 거죠? 제가 왜 여기…….”

난 분명 검은 파편에 묶여서…….

그런데 어째서 백란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거지?

그에 관한 대답은 곧이어 들을 수 있었다.

“할 얘기가 있어, 내 널 이리 부른 것이지.”

아니, 그럴 거면 좀 빨리 부르면 안 되나?

그를 보며 인상을 짓자, 그가 내 속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말하지 않았느냐. 신선들은 신수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

“그런데 지금은 왜 여기…….”

“누군가가 불러서 말이다.”

누군가라니?

나는 백란을 보고 떠오른 신수의 이름을 곧바로 내뱉었다.

“백령?”

“백령이 날 부를 수 있었으면 무릉도를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그렇다면 대체 누가…….

내가 아무것도 모르겠단 듯한 표정을 보이자, 백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물의 주인, 하원 말이다.”

“하원……! 그는 살아 있나요?”

“아직까진.”

백란의 말에 초조해졌다. 얼른 깨어나서 하원을 구해야 했다. 그렇기에,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넌 이곳에서 나가지 못해.”

백란의 단호한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푸른 정원 밖으로 손을 뻗었다.

“이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디죠?”

“네 의식이다.”

백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내 의식이라면…….”

“넌 지금 정신을 잃었지. 사현의 의식은 계속해서 진행되는 중이고.”

백란이 남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엄연히 따지면 남의 일인 건 맞긴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에 서운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런데, 어째서 하원은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거죠?”

“물의 주인이 날 부를 수 있는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이다.”

그가 아래를 바라보자, 아래에는 갑자기 강물이 흘렀다. 이내 나와 백란은 강물 안으로 빠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으읍!”

“이곳은 네 의식이란다, 아리야.”

백란의 말에 나는 편히 숨을 쉬어보았다.

숨이…… 쉬어져.

물속인데도 나는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이제 보이는군.”

강물 안으로 들어오자. 푸른 빛으로 빛나는 구슬이 있었다.

이건…… 내 구슬이잖아?

나는 구슬을 손에 들었다. 그러자, 강물이 내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하원과의 계약이다.”

“계약?”

“그는 널 주인으로 받들기로 했고, 나는 너희 둘의 계약을 지켜보는 역할을 하지.”

“하원이…… 절 주인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인가요?”

“그래, 하지만 하원 혼자의 생각으로는 둘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지. 네 마음도 그와 같아야 하니.”

백란의 말에 그를 바라보자, 그는 팔짱을 끼며 그저 날 지켜볼 뿐이었다.

“하원과 계약하면 물의 권능이 언제나 널 지킬 것이다.”

“하지만 의식은 이미 진행 중이잖아요.”

물의 권능으로 내 몸을 지키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물의 권능을 너무 얕잡아보는구나, 아리야.”

“네?”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친절히 내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여태껏 하원이 가진 물의 권능은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 그의 권능은 오직 주인을 위한 권능이니.”

그렇다는 말은…….

“이 계약은, 하원을 살리고, 너 또한 살리는 길이다, 아리야.”

백란이 말을 마치자마자, 내 주위를 감싸던 강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원과 계약하겠느냐, 아리야?”

백란의 물음에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구슬이 반짝이며 빛났다.

“물의 주인 하원과 계약하겠습니다.”

이내 솟구치던 강물이 구슬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왔다.

정신을 차리니 구슬과 강물은 온데간데없고, 아까의 푸른 정원에 서 있었다.

“이로써, 물의 주인인 하원의 진정한 힘이 해방되었구나.”

백란이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네 힘 또한 해방될 때가 오겠지.”

“내 힘이…… 해방?”

“그래. 백령이 곧 이곳에 도착할 테니.”

백란은 그리 말하더니, 다시 자리에 앉아 차를 마셨다.

“너도 차나 한잔 하지. 백령이 오기까지 시간이 꽤 남았으니.”

백란의 말에 나는 눈만 깜빡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이내 내 의식 속에, 다른 누군가가 또 나타났다.

당신은…….

***

“의식이, 드디어 성공하는구나.”

사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환희에 찬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들 사이로 누군가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사현.”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칼,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회색빛 눈동자. 흑색 호랑이, 은월이었다.

제단에 도착한 은월은 재빨리 눈으로 아리를 찾았다. 정신을 잃은 아리를 본 은월은 무언가가 식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은월의 예쁜 회색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그는 안정을 찾았다.

‘아직 목숨은 무사해. 이건…… 하원의…….’

아리는 의식으로 인해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계약을 위해 정신을 잃었을 뿐.

상황을 눈치챈 은월은 검을 들고 사현에게로 다가갔다. 은월이 다가오는 걸 눈치챈 사현이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네가 이렇게 컸구나, 흑호.”

“날 알고 있나 보군.”

은월의 한기 어린 말에 사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백호와 더불어 내 모든 걸 앗아간 호랑이를.”

사현이 은월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마치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이.

“그런데 어쩌나, 의식은 성공했고 내 힘은 돌아온 것 같은데.”

“상관없어. 그래봤자 넌 네 뜻을 이룰 수 없을 테니.”

은월의 확신 찬 말에 사현의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그때 널 죽였어야 했어. 그때 어리다고 널 만만히 본 것을 죽도록 후회한다, 은월.”

사현이 증오 어린 눈으로 은월을 바라보았다. 은월은, 그의 시선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은월은 오로지 하나만을 생각했다.

아리를 지킬 것이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