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아리 님!”
들려서는 안 되는, 들을 수 없을 목소리.
이건…… 이미 인간세계로 돌아갔어야 할 이연의 목소리였다.
그가 어떻게 이곳에…….
“아리 님…… 어떻게 이럴 수가.”
이연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이연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네 역할은 이미 끝났을 텐데……. 어째서 여기에…….”
가휘였다. 가휘와 이연이 마주 보자, 이연의 형체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연은 눈물을 머금고 가휘를 올려다보았다. 이연의 팔목에, 익숙한 구슬로 이루어진 팔찌가 찰랑거렸다.
저건…….
그때 서고에서 본 구슬이었다.
이연이…… 가휘의 기록을 일부러 없앤 거였어.
하지만 어째서?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더 이상 눈을 뜰 힘조차 없었지만, 최대한 버티려 노력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다니.”
이연이 입술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러자 가휘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말이 많구나. 고작 내 꼭두각시 주제에.”
“꼭두각시도 깨달은 것을, 못 깨달은 네가 안타까울 뿐이야.”
이연이…… 가휘의 꼭두각시라고?
이연이 가휘를 노려보았다. 선했던 그의 눈망울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증오만이 남아 있었다.
“난 네 꼭두각시고, 난 너나 다름없지. 그래서 너의 모든 기억을 볼 수 있었어. 나의 과거이기도 한, 모든 기억을.”
이연의 독기 어린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의 말에 가휘는 듣기 싫다는 듯, 굳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때, 마른하늘에 비가 쏟아지던 날. 시호는 널, 아니, 우릴 인간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해 커다란 나무로 향했지.”
“닥쳐라. 꼭두각시 주제에 감히!”
가휘가 이연을 향해 검은 파편을 날렸다. 이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린 누군가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시호를 설산으로 유인했었지.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다고 말하며.”
“닥쳐.”
“시호는 흔쾌히 들어주었어, 우리의 부탁을.”
이연의 눈에서 다시 한번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는 괴로워하며 입을 열었다.
“그 후, 시호는 죽었지. 넌 사현의 속임수에 넘어갔고, 지금까지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어.”
가휘가 또다시 그를 향해 공격을 가했다. 어째서인지, 그 공격은 모두 이연을 빗나갔다.
“시호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건 결국 우리면서, 모든 걸 되돌린다니.”
가휘의 압박에도 이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연은 모두 부질없다는 듯, 힘없이 말했다.
“그리고 또다시 네 인간의 모습인 나를 이용해, 아리를 죽이려 했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어.”
“너……!”
“내가 꼭두각시라고? 아니, 난 네가 외면하고 있는 본심이자 본체야. 넌 모든 걸 알면서도 욕망에 물든 괴물일 뿐이고.”
이연이 그리 말하며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그곳에는, 푸른빛으로 빛나는 구슬이 있었다.
저건…….
“그러니, 이 구슬은 네게 넘겨줄 수 없어, 가휘.”
시호의 두 개의 구슬 중 하나.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간과했었다. 시호의 구슬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시호와 함께 소멸했을 구슬이…… 어째서 네게!”
가휘가 놀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이 구슬 덕분에 이곳으로 돌아왔으니까.”
이연이 차분히 말했다. 그에 가휘는 서둘러 이연이 가진 구슬을 빼앗으려 몸을 움직였다.
“이 구슬은, 나와 함께 소멸하는 거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의식을 집행하던 사현 쪽을 돌아보니, 사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이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연이 구슬과 함께 완전히 흐려지기 전, 누군가의 칼이 그를 베었다. 칼에 맞은 이연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구슬이 하나 더 있었다니, 이거 정말 행운이군.”
사현……!
이내 이연의 형체가 완전히 흐려졌지만, 구슬은 사현의 손안에 있었다.
“고마워해라, 아리야. 이 아이 덕에 네 의식은 일단 뒤로 미뤄졌으니.”
사현의 얼굴을 감싸던 어두운 기운이 걷히고, 그의 민낯이 완전히 드러났다.
“사현……!”
나는 이를 악문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는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주인님, 방금…….”
가휘가 덜덜 떨며 말하자, 사현이 그런 그를 쓰다듬었다.
“시호는, 네 탓에 죽은 게 아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모든 건 호랑이들 때문이라고.”
“…….”
사현의 세뇌에도 가휘의 안색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사현이 가휘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내, 가휘는 편안한 안색을 되찾았다.
“역시 꼭두각시가 절 속인 거였군요. 그럴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가휘가 갑자기 안색을 되찾은 거지?
가휘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시호를 되찾을 때입니다, 주인님.”
***
포포는 두루마리를 물고 백령의 궁으로 향했다. 포포는 달리며 전의 상황을 회상했다.
“읍, 으읍, 읍.”
‘이 똥개가 흑기들과 한패였다니.’
포포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표출하며 바랑을 올려다보며 난동을 부렸다. 이내 궁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어두웠던 시야가 트였다.
그제야 바랑은 포포를 놓아주었다.
“너, 너! 네가 어떻게!”
포포가 큰 소리로 바랑에게 무어라 하자, 바랑이 재빨리 포포의 입을 다시 막았다.
“조용해, 아리를 살리고 싶으면.”
바랑의 낮은 목소리에 발버둥 치던 포포가 얌전히 그의 말을 따랐다.
바랑이 포포의 입에 가져다 댔던 손을 거두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여우야. 난 지금 너희들을 도울 수 없어. 지금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만, 언제 또 조종당할지 모르니까.”
바랑의 말에 포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바랑은 예상한 일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그냥. 어찌 됐든, 이 두루마리를 백령과 은월에게 전해.”
바랑이 검은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가서 봐, 시간 없으니까.”
바랑이 포포의 입에 두루마리를 물렸다. 포포는 바랑을 잔뜩 경계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가라, 여우야.”
“어, 어디로?”
이곳은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땀을 흘렸다.
“이쪽으로 쭉 가면, 익숙한 곳이 나올 거야.”
그리 말하며 바랑은 발걸음을 돌려 사현의 궁이 있는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포포는 잠시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포포는 한동안 계속 그렇게 달렸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곧이어, 포포의 눈에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푸른 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백령의 궁이.
포포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궁 안으로 들어갔다. 포포가 궁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저, 저 여우는!”
“아리 님의……!”
궁에 도착한 포포는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이내 체력을 몽땅 소진한 포포는 차츰 눈이 감겼다.
“백령 님!”
하인이 급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포포, 포포가 왔습니다!”
하인의 보고에 백령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자하와 여노가 백령의 뒤를 따랐다.
백령이 다가오자, 포포를 둘러싸고 있던 하인들이 길을 비켰다. 포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
“포포!”
쓰러진 포포를 본 여노가 곧장 달려가 여우 모습의 그를 품에 안았다.
“탈진했어요. 영아 님을 부를게요.”
여노가 포포를 궁 안으로 들이고, 포포가 쓰러졌던 자리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건…….”
백령이 두루마리를 들었다. 두루마리를 유심히 살펴보자, 바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서쪽 땅이, 뭔가 이상합니다.’
“역시 바랑이었던 건가.”
백령이 두루마리를 펼치자, 그곳에는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궁의 약도군.”
“근데, 처음 보는 곳입니다. 대체 어딜 의미하는 것인지…….”
약도가 있어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백령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알아, 백령.”
그때, 이랑이 백령과 자하에게로 다가왔다.
“내가 안내할게, 그곳까지.”
“이랑 님?”
자하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랑이 대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령은 그런 그의 태도에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안내해라.”
백령의 낮은 목소리에, 이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요, 백령 님.”
바로 떠나려던 백령을 가로막은 건, 영아였다.
“이 아이를 금방 치료할 테니, 괜찮으면 데려가시지요.”
영아가 품에 안은 포포를 보여주며 말했다. 백령은 그런 영아의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럴 시간 없다.”
“이 아이가,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완고한 영아의 말에 백령은 잠시간 망설였다. 그녀의 감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할 때가 많았으니.
***
“은월 님!”
산이 포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황급히 청화관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청화관 어디에도 은월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은월 님, 대체 어딜 가신 거…….”
‘설마?’
산이 불현듯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머리를 짚었다.
며칠 전 서쪽 땅에 갔을 때, 은월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던 것이 떠올랐다.
“이제야 알겠네. 어디에 있는지.”
“예?”
산이 영문도 모른 채 은월을 바라보자, 은월이 다시 한번 영문 모를 말을 내뱉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설마, 은월 님은 그때 어디 있는지 알아채고 혼자 가신 건가? 시간이 없으니까?”
산은 한순간에 머리가 띵해졌다.
‘말씀은 하고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은월 님!’
은월이 혼자 움직이는 게 훨씬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아무런 언질도 없이 이리 홀로 갈 줄은 몰랐던 산이었다.
“대체 어디로 가신 겁니까!”
산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은월이 향했을 곳을 생각해 보았지만, 산은 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