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백령의 집무실 안. 그곳에 있는 신수들은 여전히 묘연한 아리의 행방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단서가 없을 수가……!”
자하가 울분을 삼키며 말했다. 그에 어두운 분위기의 집무실에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단서가 이렇게까지 없다니……. 분명 아리를 데리고 동쪽 땅에서 벗어났다면 단서를 흘렸을 텐데.”
은월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자타, 아루. 다른 땅들의 상황은 어떻지?”
백령이 집무실 앞에 서 있는 자타와 아루에게 물었다. 자타와 아루는 밤새도록 다른 땅들을 돌아다녔다.
“남쪽 땅에는 별 이상이 없었습니다. 천강 님은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업무만 보고 계십니다.”
남쪽 땅은 여전히 불안정한 땅이었다. 그렇기에 천강은 업무 말고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
자타에 이어 이번엔 아루가 입을 열었다.
“북쪽 땅은…… 사화 님의 부재로 여전히 백성들이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사화 또한 이 일과 연루되어 있음에는 분명했다. 그런데, 은월은 사화뿐만 아니라 다른 자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서쪽 땅은?”
은월의 물음에 아루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서쪽 땅이…… 좀 이상하긴 합니다.”
“이상하다니?”
“아직 정확한 상황을 파악 못 해서, 확실해지면 보고 올리겠습니다.”
아루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백령은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알아 와라.”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아무런 단서도,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아루와 자타가 다시 조사를 위해 집무실을 나가기 위해 문을 열자. 그 앞엔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남쪽, 서쪽, 북쪽 땅 어디에도 아리의 흔적이 안 보였다는 말이냐?”
그는,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하원이었다.
자타와 아루가 고개를 숙이며 긍정의 대답을 하자, 하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내 하원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원 님이…… 개입하시려는 건가.”
“뭔가 달라. 단순한 개입이 아닌 것 같은데.”
자타와 아루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포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포포가 붉은 눈을 깜빡이며 의문을 표했다.
포포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무슨 생각?”
나래와 포포가 내게로 시선을 두며 집중했다. 그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탈출할 방법.”
“어떻게?”
“저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잖아, 우리한테는.”
나의 말에 나래가 고개를 기울이며 여전히 못 알아듣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래는 나래구나.
“포포 말이야, 포포.”
내가 포포를 가리키며 말하자, 나래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이 여우를 어디에다가 쓰려고?”
“우씨, 날 물건 취급하지 마, 너희 둘 다!”
포포가 노발대발하며 펄쩍 뛰었지만, 무시한 채 나래의 의문에 답을 주었다.
“나래, 네가 탈출을 시도했다는 건, 철창을 열 수 있다는 말이지?”
“가능하지. 저번에 훔친 열쇠가 있거든.”
나래가 자랑스레 말하며 품 안에서 쇠로 된 열쇠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손은 눈보다 빠른 법이지.”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나래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네.
나래가 내민 열쇠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나래가 급히 내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여길 나가서가 문제라고 내가 전에 말했잖아.”
“그래서, 포포가 중요하다는 거지.”
나래가 다시 한번 포포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작아도 저런 여우가 돌아다니면 들킬 텐데?”
나래의 말에 다시 한번 포포가 길길이 날뛰었다. 나는 포포를 진정시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당연하지.”
“그럼 어떻게…….”
내가 눈을 휘며 활짝, 웃자, 나래가 불안하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너랑 내가 미끼가 돼서 시간을 끄는 거야.”
“금방 붙잡히고 말 거야.”
“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
나래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국엔, 너와 난 붙잡힌다는 거잖아. 난 그렇다 쳐도, 넌…….”
“내가 왜?”
나래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날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붙잡힌 후에 학대당했던 고통을 나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난 괜찮아, 오히려 네가 걱정이지.”
나래는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한번 또 같은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뭐야? 기분 나빠. 날 뭐로 보는 거야. 난 탈출을 무려 세 번이나 감행했다고. 물론, 세 번 다 똑같은 방법으로 탈출해서 빠르게 잡혔지만.”
나래가 새침하게 답하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같은 방법으로 탈출을 세 번이나 감행한 나래를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그런데, 난 아직 밖의 상황을 몰라서. 경비가 허술해지는 시간대라던가…… 아는 게 있어, 나래?”
나의 물음에 나래가 어깨를 으쓱이며 태평하게 대답했다.
“어? 그러고 보니 그런 걸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어.”
나는 조용히 머리에 손을 짚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기자. 시간이 없어.”
무슨 의식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나래를 제물로 바치기 전에 이 일을 백령과 은월에게 알려야 한다.
나와 나래는 곧장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야.
“포포, 알겠지? 네가 지금 뭘 해야 하는지.”
“하, 하지만 나는 출구를 몰라.”
포포가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내가 알려줄게. 딱 한 번, 끌려올 때, 출구를 본 적이 있어.”
나래가 포포에게 출구에 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 지하에서 위로 올라가면 빛이 새어 나오는 곳.
그곳이 출구라고.
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포포가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선 최대한 늦게 들켜야 한다.
천천히, 아주 조금만 문을 열어보았다. 틈새로 보이는 보초는 두 명이었다.
나는 빠르게 문을 열고 두 신수를 공격해 단번에 기절시켰다.
그런데, 오늘 유독 신력 소모가 많았던 탓인지,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괜찮아?”
나래가 걱정스러운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서두르자.”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래의 표정이 어두웠다.
복도를 지나자, 나는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 몇 명이야……?
하나, 둘, 셋…… 열.
다 세어 보니 족히 열 명이 복도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건…… 무리야.
“그런데, 감옥을 지키는 녀석들이 너무 조용하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신수 둘이 점점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들키겠어.”
나래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그에 나는 포포를 꼭 끌어안았다.
“포포, 여우로 변해봐.”
“여우?”
나의 말에 포포가 한번 폴짝, 뛰어오르더니 작은 여우로 변했다.
“여기부터 혼자 가야 해, 포포.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경비가 허술해지면 곧장 이곳에서 나가.”
“그냥 내가 잡혀 있는 게 낫지 않을까? 나 아리로 둔갑할 수 있…….”
“안 돼. 들킬 위험이 커.”
포포의 귀가 축, 처졌다. 그에 나는 포포를 꼭 안아주었다.
“꼭 백령과 은월에게 알려줘.”
포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붉은 눈망울은 걱정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나는 품에서 포포를 놓아준 후,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에 지하 감옥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놀란 얼굴로 일순간 굳어 버렸다.
“어,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그때 어느 신수 한 명이 내게 칼을 들이밀었다.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흑기의 편에 선 신수라 해도, 막상 동쪽 땅의 작은 주인인 내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도망가려는 게 아니야.”
침착한 나의 목소리에 복도가 술렁였다.
“날, 너희들의 주인에게로 안내해.”
나의 말에 경비병들은 웅성거리기만 할 뿐, 그 아무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이것에 내 계획이었다. 나를 주인에게로 데려가기 위해선, 경비에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저들은, 내 말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모든 게 두려운 자들이니.
“뭣들 하는 거야, 빨리 다시 감옥으로 넣어!”
한 남자가 다급하게 소리치자, 다른 이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흠칫하며 망설이기 시작했다.
“내가 탈옥했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맞아 죽을 건지, 아니면 날 너희 주인에게로 데려갈 건지.”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말하자, 그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갈등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가, 가휘 님에게로.”
“난 분명 너희의 ‘주인’이라고 했어.”
“하, 하지만, 아리 님…….”
“하지만?”
나의 물음에 그들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결국, 그들은 나를 에워싸며 어딘가로 데려갔다. 나의 뒤에 있던 나래도 함께 끌려오게 되었다.
그들이 나와 나래를 데리고 향한 곳은, 이곳의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차라리 지하 감옥이 더 밝겠어.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에 옷소매로 코를 막았다.
토할 것 같아…….
이건…… 뱀 비린내야.
사화의 뱀 냄새는 그래도 역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우아하고 고혹적인 향이 났었다.
하지만, 이 냄새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너무나도 지독했다.
“이게 대체 뭔 냄새야…….”
나래 또한 냄새 코를 막으며 경악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크고 웅장한 문이 보였다.
여기구나.
“이곳입니다, ……아리 님.”
잔뜩 겁먹은 그들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열어.”
그들에게 명령하자, 어느 한 신수가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주, 주인 님. 계십니까?”
“방해하지 말라 했을 텐데.”
날 데리고 왔던 그 남자의 목소리…….
문 안에서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리 님이 뵙기를…….”
끼이익.
이내 문이 스스로 열렸다. 나는, 망설임 없이 어두운 방 안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