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일단 포포부터 숨겨야겠어.
포포가 딸려왔다는 걸 알면 저들이 포포를 없애려 할지도 모르니까.
마침 옆에 이불 같은 천이 하나 있었다. 나는 포포 위에 그것을 씌웠다.
“포포, 절대 여기서 나오면 안 돼.”
“왜?”
“설명할 시간 없어. 일단 숨죽이고 가만히 있어. 알았지?”
포포를 숨기자, 이내 또각또각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 소린…….
“오랜만에 뵙는군요, 아리 님.”
“사화…….”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 고혹적인 파충류의 황금빛 눈동자. 사화는 여느 때보다 밝은 표정으로 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듯이.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니, 참으로 유감입니다.”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가히 가증스러웠다.
“할 말은 그게 다야?”
침착을 유지하며 그녀에게 묻자,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리 님은, 자신이 가진 것에 어찌 그렇게 만족을 못 하십니까? 생긴 것도, 하는 짓도, 참으로 시호 님과 판박이로군요.”
사화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시호 님도 그랬죠.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세계로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도 언젠가 그러겠죠. 가엾은 우리 백령 님.”
어이없는 그녀의 말들에 실소를 터트렸다.
“왜 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하며 자신을 정당화시키는지 모르겠네. 결국, 네 욕심인 거잖아.”
그녀를 똑바로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흠칫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만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과 판단. 그리고 그것을 위해 저지른 악행. 그걸 정당화시키지 마.”
분에 차오른 사화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우리 귀하신 동쪽 땅의 작은 주인님께선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가 봅니다?”
그녀가 한기 어린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지만, 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사화가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미안한데, 내가 한두 번 이런 일을 겪은 게 아니라서. 알잖아?”
사화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네, 아주 잘 알고 있죠. 그때마다 누가 도와줬는지도요.”
사화가 그리 말하며 손을 튕겼다. 그러자, 검은 뱀 무리가 나타나더니 철창 앞에서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모든 게 제 뜻대로 됐다고 생각할 때, 당신이 나타났죠. 그것도 시호 님의 구슬을 가진 채로요.”
사화가 날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구슬은 당신 같은 하찮은 것이 가질 게 아닙니다.”
그리 말하며 사화는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도 제가 느낀 고통과 아픔을 느껴보시길.”
그녀가 뒤돌아섰다. 이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사화가 풀어놓은 검은 뱀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꺄악. 저리 가!”
나래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난 뱀이 정말 싫단 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분명 사화가 푼 뱀에게 물린다면 강력한 독이 몸에 퍼질 것이다. 그렇기에 뱀을 하나둘 처치해나가기 시작했다.
신력을 아껴둬야 하는데…….
“나래, 넌 그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나, 나는 권능을 잃은 뒤로 신력을 쓸 수가 없단 말이야.”
벌벌 떨며 나무작대기만 휘두르는 나래를 보며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여간, 한심한 닭이라니까, 쯧쯧.”
포포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포포.
몇 시간 째 뱀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내 신력도 거의 바닥나버렸다.
더 이상은…….
그때,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황급히 포포에게 눈짓을 하자, 포포는 재빠르게 다시 이불 속으로 숨었다.
“허, 재밌는 짓을 벌였구나, 사화. 분명 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는 이 목소리를 분명 들어본 적이 있다. 이 낮은 목소리는…… 가휘의 목소리다.
가휘가 잔뜩 짜증을 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내, 그가 뱀들에게 다가가자, 뱀들이 기운을 잃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제물들이 다치면 무쓸모라고.”
제물?
무슨 제물을 말하는 거지?
이내 가휘가 철창 안으로 들어오더니 나와 나래를 번갈아 보았다.
“다친 데는 없어 보여서 다행이네. 난 누굴 고치는 데에는 재주가 영 없거든.”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에 나래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제물이라니? 우릴 제물로 쓰겠다는 거야?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리는 미호가 가만히 놔두지 않을걸?”
앙칼진 나래의 목소리에 가휘가 곧바로 나래의 오른쪽 뺨을 내리쳤다.
얼마나 세게 친 건지, 그 반동으로 나래가 넘어지며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나래!”
가휘가 섬뜩한 눈으로 나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주위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쫑알쫑알 시끄러워. 다친 여우가 지금 우리한테 위협이나 될 것 같아? 하긴, 머리에 든 게 없으니 네가 지금 여기 이러고 있는 거지.”
가휘가 앉으며 나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 위압감에 나래가 덜덜 떨었다.
“제물이 싫으면 방법은 하나라니까. 우리와 손을 잡는 거라고. 분명 말했잖아?”
“나, 난 너희랑 절대 손 안 잡을 거야. 죽어도 그렇게 하진 않아!”
나래는 벌벌 떨면서도 가휘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에 가휘가 나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지금이야, 그를 죽여야…….
뒤에서 그를 공격할 준비를 하자, 가휘의 낮은 목소리가 감옥 안에 울려 퍼졌다.
“날 건드리면 이 여잔 지금 당장 죽어, 아리야.”
가휘가 나래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벌벌 떠는 나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자, 가휘가 나래를 놓아주며 철창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다시 철창의 문이 잠기고 철창 밖에서 가휘는 입을 비틀며 입꼬리를 올렸다.
“곧, 내가 꿈에 그리던 그 날이 오는 거야. 그렇지, 시호?”
……미친놈.
하나만은 확실했다. 시호는 절대로 저놈을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장담해.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킥킥거리며 정신이 나가버린 것처럼 웃더니, 이내 어디론가 가버렸다.
“쟨 진짜 미쳐버린 게 확실해.”
나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래의 말에 극히 공감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세상에…….
나래의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 다른 곳도 성치 않다는 걸 알고 있던 나는, 나래가 걱정되었다.
사실, 아까 흑기와 손을 잡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고.
“푸아, 나 이제 나와도 돼?”
포포가 이불 속에서 기어 나오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뭐, 뭐야, 닭 뺨이 왜 저래?”
포포가 소스라치며 놀라며 꼬리를 바짝 세웠다.
“포포, 혹시 연고 같은 거 있어?”
“연고? 그런 거 없는데…….”
포포가 주머니를 뒤적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리 네 소매 봐봐!”
“응? 내 소매?”
나는 팔을 뻗어 내 소매 안쪽을 뒤적거렸다. 그러자, 작고 동그란 통이 하나 나왔다.
“이건, 은월의 연고잖아?”
“헤헤, 저번에 싸부가 너한테 전해주라길래 네 소매에 몰래 넣었어.”
대체 그걸 왜 몰래 넣는 건데?
어찌 되었든, 다행히 연고를 입수한 나는 나래의 볼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아, 따가.”
나래가 자꾸만 내 손길을 피했다.
“좀 가만히 있어. 그런데, 제물이라는 게 무슨 소리야?”
나래가 따가움에 눈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의식 같은 걸 하려나 봐. 나도 정확한 건 모르는데, 내용이 좀 이상해.”
“이상하다니?”
“그 의식 자체는 남쪽 땅의 것이라서, 저번에 책에서 봤었거든. 만약 저들이 정말로 시호를 부활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죽은 자를 살리는 의식을 할 거 아니야?”
“그렇겠지.”
그녀의 말에 수긍하자,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리는 의식 같은 건 없어. 애초에 우리가 신선도 아니고, 어떻게 생명을 다시 살리겠어.”
나래의 말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신수가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다 한들,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런데, 그 미친놈은 시호를 살리는 줄 알고 있고, 사화는 너를 소멸시키는 의식이라고 알고 있단 말이지.”
“소멸?”
“물론, 소멸 또한 우리 영역이 아니야. 신선의 영역이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건, ‘신선’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둘 다 누군가한테 속고 있다는 거야. 아마 그 미친놈이 말하는 ‘주인님’이겠지?”
그렇다면 이 의식의 목적은 무엇인 거지?
나와 나래가 제물로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 주인이라는 자는 가휘와 사화, 둘에게 똑같이 ‘의식’을 언급했으니까.
“그렇다면 그 의식 내용은 뭔데?”
“그건 모르겠어.”
하긴, 나래가 이 정도로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포포가 눈을 크게 뜨고 나래를 보았다.
“저, 저거 내가 알던 닭 맞아?”
“그러게. 근데 무슨 책을 본 거야, 나래?”
그에 나래가 살며시 내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그에 나는 나래가 이 내용을 누구에게 배웠는지 알 수 있었다.
“……노군한테 배운 거야.”
……정말로 수업 열심히 들었구나, 나래.
나래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뿌듯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내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호가 무서운 것도 있었지만…… 난 나 스스로 너무 부끄러웠어. 주인 자격을 박탈당한 것도, 내가 한때 무시했던 노군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도, 모든 게 다.”
나래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처음으로 예쁘게 빛났다.
“나는, 다시는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을 거야.”
그녀의 굳은 다짐에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이곳에서 나가게 해줄게.”
내가 알던 나래가 맞나……?
그녀의 말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에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