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이상하리만큼 햇살에 눈이 부시던 날. 그 햇살은 얼마 가지 않아 구름으로 뒤덮였다.
“당신은…….”
검은 머리의 황금빛 눈동자. 내가 아는 누구와 닮은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이내 그 남자는 나의 모든 걸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트려 버렸다.
***
“야, 이 바보야! 일어나!”
누군가의 외침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철창과…… 꿈에서 본 것과는 다른 밝은 황금빛 눈동자였다.
타오를 듯 붉은 머리의 소녀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 소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래……?”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둡고 칙칙한 이곳은, 생전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 남자가 나한테 이상한 걸 먹여서 정신을 잃었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제야 정신이 들었어?”
그녀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더러워진 옷과 단장되지 않은 모습을 훑어보았다. 예상대로 나래는 훨씬 전부터 흑기한테 잡혀 있었던 모양이다.
“나래, 그 꼴은 뭐야……?”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내 편지 안 읽었어?!”
“편지?”
“그래!”
나래의 편지라면…….
“아, 나보고 만나자고 한 그거?”
그거 네가 보낸 함정이잖아?
나래가 정말로 여기 잡혀 있었던 거라면, 만나자고 하는 그 편지는 날 꾀어내기 위한 함정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래는 적반하장이었다.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이 머리를 헝클였다.
“너, 너, 내가 기껏 목숨 걸고 보낸 편지를 안 읽었단 말이야?”
“목숨을 걸긴 무슨, 네 목숨을 부지하려고 보낸 거 아니야?”
이게 내가 바보로 보이나.
팔짱을 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래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그녀의 말이 너무 가관이었다.
“……너, 내 편지 제대로 읽은 거 맞아?”
“당연하지. 네가 만나자고 했잖아. 날 꾀어내려는 속셈인 거, 모를 줄 알았어?”
“바보야, 그거 말고!”
나래가 반박하며 소리쳤다. 나는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흠칫했다.
“그럼 무슨……. 아! 자타한테 보여주라는 거?”
“그래! 왜 자타한테 내 편지를 안 보여준 거야?”
나래가 잔뜩 인상을 구기며 날 노려보았다.
“자타랑 시간이 너무 안 맞았어.”
“자타 녀석, 네 옆에 꼭 붙어 있으라고 내 누누이 일렀건만!”
누누이라고 해봤자…… 편지를 전달해줄 때뿐이지 않아? 그때 말곤 자타랑 만난 적이 없잖아, 너.
아주 간단한 상식 문제였다. 자타가 나래의 말을 따를 리가 없다는 것. 분명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것이다.
“그래서, 자타가 왜?”
“……됐어!”
나래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어쩔 거야, 이제.”
나래가 작은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나래, 여긴 어디야?”
이곳을 탈출하려면 정보를 얻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정보를 얻을 방법은 나래가 유일했다.
“바보.”
바보한테 바보라는 소리 들으니까 기분이 나쁘네.
나래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긴 동쪽 땅이야.”
“……동쪽 땅이라고?”
잠시만, 흑기의 은신처 아니야, 여기?
내가 놀란 토끼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동쪽 땅에 그들이 숨어 지내고 있는 줄 꿈에도 몰랐어. 하지만 이곳은 동쪽 땅이 맞아. 확실해.”
“설산이 아니었단 말이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엿들은 바에 의하면 설산에 있었던 건 분명해. 하지만 언젠가부터 거처를 옮긴 거야. 그들은 ‘모든 준비가 끝난 후.’에 옮겼다고 했어.”
모든 준비가 끝난 후?
그렇다면…… 내 성인식 이후에 거처를 옮겼다는 건가?
그땐 아직 설산 조사를 할 수 없었으니까,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리고 우리는, 설산을 중심으로 조사했으니, 흑기의 은신처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근데, 그건 왜 달고 온 거야?”
나래가 내 허리춤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 허리춤을 보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포포?”
포포가 정신을 잃은 채 내 옆에 붙어 있었다.
“아, 아리야아…….”
네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서둘러 포포를 똑바로 눕혔다. 이내, 포포가 천천히 눈을 떴다.
“포포, 네가 왜 여기 있어?”
“으, 응?”
포포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헉, 여긴 어디야?”
“포포, 그것보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나의 물음에 포포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한 남자가 아리 널 데려가려고 하길래……. 몰래 너한테 붙었는데, 그 후로 정신을 잃어서 기억이 안 나.”
나는 두 신수를 번갈아 보았다.
나래와 포포라…….
정말 환장의 조합이구나.
이 두 신수를 데리고 탈출을 감행해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 여기에서 나가야 해.
“이 철창, 잘하면 뚫을 수 있지 않을까?”
“탈출하려고? 꿈 깨. 여기서 나간다고 해도 삼엄한 경비를 어떻게 뚫으려고?”
“삼엄한 경비라니? 흑기들은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없는 족속들이잖아.”
나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소매를 걷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경악에 찬 표정으로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만졌다.
“이게…… 무슨.”
나래의 고왔던 피부는 온통 검은 멍으로 물들어 있었다.
“탈출을 감행한 대가. 이곳은 흑기만 있는 게 아니야. ……그들을 따르는 신수도 있어.”
“흑기를 따르는 신수라고?”
나래가 소매를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들을 따른 것 같진 않아. 들어온 지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진 않았으니까.”
설마, 미호가 쓰러졌던 날…….
몇몇 신수가 흑기에게 붙어먹은 거구나. 미호가 쓰러졌으니, 신수 쪽에 승산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거야.
물론, 미호는 내가 가져온 천도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이미 이곳에 발을 들인 신수는 흑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런 방도가 없어. 이곳에서 백령이나 은월이 구하러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백령과 은월이…… 이곳을 찾아낼 수 있을까?”
“찾아낸다 해도, 그자들과 붙어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 방법밖에 없어.”
그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도 분명히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나가야…….
끼이익.
그때, 어딘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뻔하지. 그들 중 하나겠지.”
나래와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침을 꿀꺽, 삼켰다.
***
백령의 집무실 안. 그곳은 여느 때보다 적막감이 흘렀다. 집무실에 모인 자들은 모두 아리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리 님…….”
자하가 입술을 깨물며 괴로워했다.
“백령 님, 곳곳을 뒤져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아리 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루가 고개를 숙여 백령에게 보고했다. 백령의 낯빛이 어두웠다.
“이게 무슨 소리야, 백령?”
그때, 누군가가 황급히 백령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숨을 쉴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들어온 그녀는 미호였다.
“아리가…… 아리가 납치됐다니? 어떻게 네 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
미호가 떨리는 음성으로 백령에게 물었다.
“누구야? 네 궁에 몰래 들어올 정도라면 보통내기가 아니란 건 알겠어. 대체 누구야?”
미호의 악에 받친 물음에 백령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 사실을 미호에게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누구냐고!”
백령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화가 잔뜩 난 미호의 눈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진정해, 미호.”
그런 미호를 말린 건 은월이었다. 은월에게서 느껴지는 중압감에 미호가 고개를 돌렸다.
이내 그녀의 눈이 본래의 자색으로 돌아왔다.
“은월, 넌 누구인지 알아?”
미호가 한껏 힘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은월은 백령의 모습을 보고 누구인지 진작에 눈치챘지만, 미호에게만큼은 말을 아꼈다.
“아리를…… 아리를 당장 찾아야…….”
미호가 움직이려 하자, 백령과 은월이 마루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미호에게로 다가간 마루가 미호의 눈을 가렸다.
이내 미호가 스르륵 쓰러지고, 마루가 그런 미호를 받아들었다.
“죄송합니다, 미호 님.”
전의 상처도 아직 다 회복하지 못한 미호가 함부로 움직였다간 미호마저 흑기들에게 붙잡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리가 붙잡힌 상황에 미호까지 위험하다면, 신수들에겐 가망이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미호를 조용히 피신시켜야 했다.
“흑기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은월?”
“내가 아는 건 설산이 함정이었다는 것밖에 없어. 함정인 걸 알아채고 내가 돌아왔을 땐 이미 아리는 여기 없었고.”
은월이 날카롭게 대답했다. 두 신수는 겉보기에는 침착해 보였지만, 누구보다 아리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백령은 손 쓸 틈도 없이 눈앞에서 아리를 놓쳐 버린 것이 떠올랐다.
‘사현…….’
백령의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백령이 그를 놓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그자가 궁에 들어왔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린 탓이고.
두 번째는 백령조차 그자의 존재에 놀라 순간 멈칫했기 때문이었다.
백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과거를 후회해봤자 소용없다는 거, 알고 있겠지, 백령?”
은월에게는 아리를 구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렇기에 냉정하게 백령에게 물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는 걸 알 텐데.”
“그래, 그런데 어떻게 사현이 살아있는 거지, 백령?”
사현. 백령이 죽였다던 신수 이름이었다. 두 신수의 대화를 들은 아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백령을 바라보았다.
“사현……. 사현 님이라고요?”
아루는 그제야 왜 백령이 미호한테 말을 아꼈는지, 왜 자하가 계속해서 자책감에 괴로워하고 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