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한동안 이 편지는 들고 다닐 필요가 없겠구나.
나는 소매에 넣어놨던 나래의 편지를 목함에 넣었다. 혹시나 자타를 만나면 보여주려 했지만, 자타는 당분간 못 만날 것 같으니.
“아리야, 뭐 해?”
그때, 익숙하고 싱그러운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이랑?”
너 또 왜 거기 있어!
창문에 머리를 빼꼼 내민 이랑을 보자,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지만.
“나 보고 싶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창문으로 머리 들이미는 버릇이나 고쳐.”
나의 면박에도 불구하고 이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꿀 떨어질 듯한 황금빛 눈동자로 날 바라보았다.
“……거기 그렇게 있지 말고 들어오기나 해, 이랑.”
“역시 나 보고 싶었구나?”
그럴 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이랑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네 맘 알겠으니까, 그런 표정으로 나 보지 마.”
곧이어 이랑이 심호흡을 내쉬며 뛰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면 죽어.”
나의 엄포에 잠시간 이랑의 몸이 굳었다. 이내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방문으로 들어왔다.
“하하, 누가 몰상식하게 창문으로 들어간다고.”
불과 몇 개월 전의 너 말이야, 이 작은 똥개 녀석아.
이랑이 내 옆에 앉았다. 그가 신기하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그런데 웬일이야?”
“뭐가.”
“네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할 줄 몰랐어.”
“이랑, 바보야?”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약속 잊었어?”
“결혼하기로 한 거?”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어!”
이랑의 늑대 귀가 축 늘어지더니 실망에 잔뜩 잠긴 표정을 지었다.
작은 똥개는 연기를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속아 넘어가겠어.
물론, 내겐 전혀 통하지 않는 수법이었다.
“왜, 우리 오래전에 약속했잖아. 밤하늘과 별을 바라보며 그 앞에서 우리 손 잡고 사랑의 맹세를…….”
“소설 쓰지 마.”
“안 통하네.”
……쫓아낼까, 그냥?
진지하게 그를 쫓아낼지 말지 고민하던 중, 이를 눈치챈 이랑이 빠르게 말했다.
“알아, 네가 말한 약속.”
“또 헛소리하면…….”
“저번에 말해주기로 한 거. 맞지?”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라도 알아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내 얘기를 듣기 전에 한 가지만 약속해줘. 그리고, 나는 네게 자세히 알려주지 못해.”
“알았어.”
이랑이 갑자기 진지해진 말투로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약속했다.
무슨 일이길래…….
나의 약속에 안심한 듯한 이랑이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너무 복잡해서.”
“말할 수 있는 만큼만 말해줘도 돼, 이랑.”
나의 말에 이랑이 힘없이 미소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대략 상황을 정리해서 말을 하자면, 삼촌은…… 아무것도 모를 거야.”
“아무것도 모른다니? 뭘 모른다는 거야?”
나의 물음에 이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확인해 보면 알 거야.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니까.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어. 내가 말한다는 건 그걸 인정하는 셈이니까.”
이랑 또한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참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이건 아마 바랑을 말하는 거겠지.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이랑의 상황이 상당히 복잡한 것 같았다.
이랑의 말을 유추하자면…… 바랑이 흑기와 연관이 되어 있는 건 분명한데.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고 나는 모든 걸 다 알면서도 침묵했어. 침묵할 수밖에 없었어. 난 누구에게도, 무엇도, 말할 수 없으니까.”
이랑이 전에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떤 신수는 모든 것을 알면서 침묵하고 있다고.
그건…… 자신을 지칭한 거였구나, 이랑.
무슨 사정이 있는 건 분명한데……. 그 사정 속까지 파헤치기엔, 이랑은 내게 알려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미우나 고우나, 삼촌과 나는 가문에 묶여 있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랑…….”
“선조가 잘못한 일을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만 하니까.”
왠지 모르게 그의 말에서 쓸쓸함이 느껴졌다. 어쩐지 그는, 외로운 길을 택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해, 아리야.”
“응?”
너희 가문 일이라며? 그걸 내가 어떻게 도와?
이랑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에 이랑은 의미심장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라면…… 보자마자 알 수 있을 거야. 어느 것이 진짜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이랑.”
“네겐 보일 거야. 난, 널 처음 본 순간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이랑의 황금빛 눈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유독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아름답게 나를 비추고 있었다.
***
설산을 조사하던 은월은, 이상함을 눈치챘다.
“은월 님, 왜 그러시는 건가요?”
“뭔가 이상해. 설산의 모든 게 지워진 것만 같은 느낌이야.”
“네?”
청아는 은월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범인이 모든 걸 지우고 도망간 것 같이, 깔끔하기 그지없어.”
“이번에도 허탕인 건가요?”
산이 실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렇게 깔끔하단 건, 오랫동안 이곳에 없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럼 대체 어디에.’
은월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작게 내뱉었다.
“설산은 함정이었어.”
“네?”
은월은 청아와 산에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만 했으니까.
“아리가 위험해.”
***
“흐음…….”
“아리야, 왜 그래?”
이랑이 돌아가고, 나는 방에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 나를 포포는 이상하게 보았다.
“요즘 너, 이상해.”
“너도 만만치 않아.”
짧고 간결하게 포포의 말을 받아친 나는, 그를 잠깐 돌아보았다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바랑과 이랑……. 바랑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랑은 알면서 침묵한다라.
흑기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한데.
나는 계속해서 생각하느라 불을 켜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늘은 날이 어두워서 그런지 방에는 금방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리 님, 아까 백령 님이 찾는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갑자기 어느 시녀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령이?”
이상하다, 백령이 날 이렇게 찾는 경우는 드문데…….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일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왜 그래, 아리야?”
“……아냐.”
포포가 날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런 포포를 한번 내려다본 뒤, 방을 나가려 문 앞으로 향했다.
……기분 탓이 아니야.
진짜 뭔가 이상해. 마치 방 밖에서 누군가가 날 기다리는 것만 같아.
그때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흑기의 기운이 아니었다. 흑기보다 훨씬 꺼림칙하고 소름 돋는 기운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기운. 이건 대체…….
“포포, 뒤로 물러나.”
“응?”
“어서!”
쾅.
그때, 방문이 부서지고,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황급히 포포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히익. 뭐, 뭐야!”
“포포, 괜찮아.”
여긴 백령의 궁이야. 그러니까, 별일 없을 거야.
그런데 자꾸만 마음이 불안해졌다. 아마 처음 느껴보는 이 기운의 탓일 것이다.
“내가 굳이 움직여야 한다니, 쯧.”
누군가가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어둠에 가려져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가 다가올수록 뒤로 물러났다.
구슬의 힘을…….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구슬의 힘에 집중했다.
“어림없다.”
그때, 그가 내게 재빠르게 돌진했다. 나는 너무 놀라 주춤해버리고 말았다.
안 돼…….
“아리 님!”
어느새 달려온 자하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돌진하던 남자가 멈춰 섰다.
“아리 님은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어. 내가 있는 한.”
자하가 어둠에 가려진 남자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남자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웃기는구나. 자하.”
“당……신은.”
자하의 동공이 커졌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자하?”
자하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그는 그런 자하의 모습을 예상했다는 듯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아는 사이인 거야?
“자하!”
아무리 자하를 불러보아도 자하는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어둠에 가려진 남자가 그런 자하를 비웃듯 천천히 자하에게로 다가갔다.
“여전히 넌 살 가치가 없구나, 자하. 그때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남자가 자하를 향해 칼을 들어 올렸다.
“내가 죽여주마, 자하.”
나는 최대한 빠르게 달려가 자하를 밀쳤다. 가까스로 칼은 자하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 튕긴 것 같았다.
“이런.”
내가 끼고 있던 동쪽 땅의 수호석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그에 남자는 칼을 집어넣었다.
“여전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그의 짜증 섞인 낮은 음성에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내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윽.”
나는 최대한 먹지 않으려 버텼지만, 그는 내 입을 붙잡고 억지로 삼키게끔 했다.
“아리에게 손끝 하나 손댄다면, 네 목숨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 목소린…… 백령?
남자의 뒤로, 백령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의 주위에는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내 결계를 어떻게 뚫은 거지?”
결계라고……?
이제야 내가 느꼈던 그 이상한 기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뭐, 상관없을 것 같군. 너무 늦어버렸으니.”
남자의 말이 끝나자, 의식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한테 대체 뭘 먹인 거야…….
이내 힘없이 쓰러지는 날 받아든 건 그 남자였다.
“백령…….”
나는 마지막 힘으로 백령의 이름을 힘없이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