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이내 은월이 모든 것을 내게 말해주었다.
어떻게 사화가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그러니까…… 애초에 사화가 아니었다고?”
“꼭두각시였던 거지.”
“그게 가능해?”
애초에 꼭두각시인 걸 눈치 못 챘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능해. 필요한 게 하나 있지만.”
“필요한 거라니?”
“고결한 신수의 피.”
고결한 신수라면……….
“……미호?”
나의 물음에 은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미호와 하원, 그리고 백령과 나. 네 신수중 하나야.”
신선들의 자식들…….
한마디로 무릉도에서 태어난 신수의 피가 필요했던 건가?
“그들이 피를 언제 얻었을 것 같아?”
머릿속에 미호가 뱀에게 물렸던 때가 떠올랐다.
“그 뱀…….”
미호의 목을 물었던, 그 검은 뱀.
“맞아, 흑기에게 그날은 일석이조도 아니고 일석삼조였던 거지.”
“사화는 다 알고 그랬던 거였어.”
그에 은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두각시는 타락한 주술이야. 고결한 신수의 피와 자신의 피를 꼭두각시의 입에 바르면,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꼭두각시가 되지. 발산하는 기운, 외모, 성격. 모든 게 똑같은 꼭두각시가.”
그래서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었던 거야.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꼭두각시의 기한은 딱 일주일. 미호의 궁에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니, 그전에 손을 써놨던 거겠지.”
일주일. 딱 사화가 잡히고 재판까지 걸린 시간이다.
“지금 사화는 흑기와 함께 있을 거야. 그녀를 찾아야 해. 덤으로 나래도.”
나래는 덤이라는 거야, 은월……?
그런데, 그들이 어딨는 줄 알고 찾는다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자, 은월이 미소를 지었다.
“남은 곳은 하나야. 지금 한창 조사 중인 그곳.”
“……설산?”
은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내가 직접 나서야 하는 건 맘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지.”
그의 말에 절로 기분이 안 좋아졌다.
“우리 다정한 아리 님께선 제가 또 걱정되십니까?”
내 표정을 본 은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에 부정했다.
“걱정도 되지만, 그것보단…….”
당분간 못 만난다는 거니까.
은월이 눈을 휘며 웃었다. 나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은월이 얄미워 고개를 돌렸다.
이내 은월의 부드럽고 큰 손이 나의 오른쪽 뺨을 감쌌다. 그에 나는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매일은 힘들더라도 널 보러 올게, 아리야.”
“으, 응?”
“나랑 못 만날 게 서운한 거 아니야?”
그의 말에 크게 당황한 나는 황급히 소리쳤다.
“그, 그런 거 아니야!”
나의 부정에 은월이 또다시 눈을 휘며 웃었다. 그의 신비로운 회색빛 눈이 아름다웠다.
“난 네가 보고 싶을 것 같은데.”
그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붉어진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
“싸부가 당분간 안 계신다니, 이럴 수가.”
포포가 좌절 섞인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했다. 그의 귀와 꼬리가 축 처졌다.
얼씨구. 입에 넣은 과자나 다 삼키고 말해, 포포.
나는 그 모습에 기가 차,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포포, 과자나 더 먹어.”
포포의 입안으로 과자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포포가 오물거리며 맛있게 먹었다.
“그래서 싸부는 언제 돌아온대?”
“몰라.”
이제 또 ‘아리, 너 혼자 치사하게 싸부 만나러 가다니, 나빠!’라며 씩씩거리겠지.
안 봐도 훤한 포포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흠, 싸부니까 금방 해결하고 오겠지, 뭐. 싸부오면 보러 가야지, 헤헤.”
저 여우가 과자를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저러지?
설마, 드디어 우리 포포가 철이 든 건가?
“아리야, 형님 만나러 가자!”
……그럴 리가 없지. 그냥 꿩 대신 닭인 건가.
나는 포포와 함께 백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문을 열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어, 백령?”
“그래.”
“내 잘못이야.”
미호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내가, 그때 좀 더 주위를 살폈더라면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거야.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그녀의 자책에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백령과 미호의 시선에 내게로 향했다. 미호는 눈물을 글썽였던 건지, 재빨리 눈가를 닦았다.
“아리, 왔구나.”
그녀가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애써 밝은 척하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떻게 하면, 미호는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때, 포포가 미호의 앞으로 총총거리며 달려갔다.
“누님, 잘 지내셨습니까!”
눈치 없는 포포의 밝은 인사에 미호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작게 미소를 띠며 포포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너도 잘 지냈니, 여우야?”
“저는 여우가 아니라 뽀뽀라고 합니다!”
뽀뽀 아니고 포포야, 이 여우 녀석아.
긴장한 탓에 발음이 세진 건지, 포포가 자신의 이름을 뽀뽀라고 칭했다.
으휴, 바보.
그래도 포포 덕분에 미호의 표정이 많이 풀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아리야. 자타를 찾는다고 들었어.”
미호가 포포를 안으며 날 바라보았다.
“응, 자타를 찾고 있는데…….”
의외의 인물의 입에서 자타가 나오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포포가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두루마리?
그것은 지도였다. 밑에 쓰인 글자를 보니 이 지도는 설산의 지도인 것 같았다.
“이걸 왜…….”
“자타는 지금 설산 조사를 돕고 있어. 아마 동쪽 땅에 돌아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거야. 그 지도도 자타가 그린 거고.”
……자타, 은근 다재다능하구나.
자타라면 확실히 정보를 전달하는 속도도 빠르고, 조사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으니 조사를 돕는 것도 이해가 갔다.
“동쪽 땅의 신수를 맘대로 데려가는 버릇 좀 고쳐라, 미호.”
백령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의 말에는 짜증이 묻어 나왔다. 그에 미호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미안, 까먹었어.”
나와 백령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백령의 반응을 보니, 그 또한 자타의 부재를 방금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백령. 넌 설산 조사에 안 가?”
미호가 백령을 향해 물었다. 그에 백령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질문을 무시했다.
“흐응. 아리가 걱정돼서 안 가는 거구나?”
그에 무언가를 적고 있던 백령이 붓을 놓고 미호를 노려보았다. 서늘한 백령의 눈초리에도 미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호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난 가볼게.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미호가 백령의 집무실을 나가기 전, 고개를 돌려 백령과 나를 바라보았다.
“백령, 아리를 잘 부탁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라. 네가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테니.”
그에 미호가 실소를 터트리곤 밖으로 나갔다. 미호가 나가자 백령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호 말이야…….”
“그냥 노망난 여우다. 신경 쓰지 마라, 아리야.”
으, 응…….
백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자타는 왜 찾는 것이냐?”
나래가 사라졌다는 말을 해야 하나……?
잠시간 고민을 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아, 나래한테 서한이 왔는데…… 거기에 자타한테 보여주라는 내용이 있어서.”
“중요한 내용인가.”
“으, 응. 그런 것 같아.”
백령은 더 이상 그에 관해 묻지 않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백령, 근데 정말로 내가 걱정돼서 설산에 안 가는 거야?”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하는 것이냐.”
백령이 뜬금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나는 괜찮으니까 가도 된다고…….”
백령이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고 날 바라보았다.
“내가 널 두고 어찌 가겠느냐.”
“으, 응?”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널 지키는 것이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나는, 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형님, 저 또한 아리를 열심히 지키겠습니다!”
눈치 없는 포포가 붉은 눈을 반짝이며 옆에서 알짱거렸다.
바보 여우, 저리 가!
***
“미호의 피가 요긴하게 쓰였나 보네.”
가휘가 미호의 피가 담긴 병을 보며 사화에게 물었다. 그러자, 사화가 차를 마시던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덕분에요. 제게 한 약속은 지켜야 할 겁니다. 신수의 ‘계약’은 절대적이란 거. 잊지 않으시길.”
이내 가휘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바라는 건 백령의 죽음이 아니니까.”
‘백령을 내 손으로 못 죽인다는 건 아쉽지만. 뭐, 어쩔 수 없지.’
가휘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내, 상상되는 미래에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모든 걸 알게 된 이 여자 반응은 얼마나 재밌을까.’
사화는 그런 그의 미소에 딱히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사화의 고상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에 일어서려던 가휘가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당신의 ‘주인’이라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렇게 나오면 재미없다니까.”
가휘의 말에 사화는 답을 듣기를 포기했다. 전에도 물었지만, 답은 언제나 같았으니까.
“그렇다면, 제가 당신들을 도와주기 전, 누가 당신을 도와준 겁니까?”
사화의 물음에 가휘가 코웃음을 흘렸다.
“그런 건 왜 궁금한데?”
“어차피 같은 배를 탄 몸인데, 알아봤자 나쁠 거 없지 않겠습니까?”
사화의 도도한 말투에 가휘가 실소를 터트렸다.
“어째서 같을 거로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네.”
알 수 없는 가휘의 대답에 사화가 고운 얼굴을 찌푸리며 가휘를 바라보았다.
“같은 배가 아니니까, 관심 꺼.”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의문이 가득했지만, 가휘는 끝내 그녀에게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멍청한 여자.’
가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가휘의 가슴속에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모든 걸 돌릴 날이.”
가휘는 자신의 염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