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147)화 (147/167)

147.

결국, 나와 은월은 정자에 단둘이 앉아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 청아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그래서 뭐가 다행인데?”

나는 최대한 말을 돌리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만, 은월 앞에선 도돌이표였다.

은월은 일부러 이러는 걸까.

왜 항상 곤란한 질문을 하는 거야!

나는 그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은월, 대체 왜 포기를 몰라?”

“네가 숨기니까.”

그가 또 한 번 눈을 휘며 웃었다. 그에 나는 그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백령의 궁엔 왜 온 거야?”

“그러게, 왜 왔을까.”

“응?”

은월의 예쁜 회색빛 눈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나도 잘 모르겠단 말이지.”

“뭐가?”

은월이 시선을 연못으로 돌렸다. 나는 편하게 그의 옆태를 감상하며 그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이내 그가 다시 나를 바라보더니, 귓속말하듯 나의 귀에 입을 가까이한 채로 속삭였다.

“우리 아리 님이 무엇이 다행이라고 말한 건지 모르겠다고.”

귓가에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무엇보다 부드럽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의 속삭임에 화들짝 놀란 나는 곧바로 그에게서 멀어졌다.

“은월!”

그의 말에 볼을 잔뜩 부풀리고 그를 쏘아보자, 그가 실소를 터트리며 웃었다.

“왜?”

정작 왜냐고 물으니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저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싸부우우!”

그때, 저 멀리서 총총총 뛰어오는 이가 있었다. 포로 시작해서 포로 끝나는 녀석.

포포가 등장했으니, 옆에 있는 하인에게 다과를 내오라 한 후, 달려오는 포포를 바라보았다.

포포는 달려오다 돌부리에 걸려 철퍼덕, 하고 넘어졌지만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뛰기 시작했고 근엄한 표정으로 정자에 도착했다.

아마 놀림 받을 바엔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한 모양이다.

“헤헤, 싸부 보고 싶었어.”

포포가 은월 옆에서 복슬복슬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는 그 모습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저 요망한 여우 같으니라고.

“근데 아리 얼굴은 왜 저렇게 빨……. 으악.”

포포가 눈치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한 말을 하려 하자, 나는 그의 꼬리를 잡으며 저지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포포가 날 돌아보며 째려보자, 나는 그의 입에 다과를 한 움큼 넣었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표정을 풀고 입안에 있는 과자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입안에 있는 과자를 모두 목구멍으로 넘긴 포포가 이상한 눈을 하고 나와 은월을 번갈아 보았다.

왜 이래, 얘?

“근데 어제 아리랑 싸부랑 뭐 했어?”

“그냥 우연히 만난 거야. 관심 꺼, 포포.”

“하지만, 세상에 우연은 없댔어!”

그리 말하며 포포는 다시금 이상한 표정을 짓고는 ‘수상해, 수상해.’라며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포포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물론 내가 청화관에 간 건 우연이 아니지만…….

은월도…… 우연이 아니었을까?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회색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은월에게 물어볼 게 있었지.

“나 은월한테 묻고 싶은 거 있었어.”

“뭔데?”

은월이 턱을 괴며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사화……. 그렇게 감옥에 넣어도 되는 거야?”

“응? 뭐, 괜찮겠지. 미호의 궁에 있는 게 좀 신경 쓰이지만,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미호가.”

너무나도 태연한 은월의 대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금 신국이 난리가 났는데! ‘괜찮겠지’가 뭐야!

“그, 그……. 그래도 북쪽 땅의 주인인데, 아직 확실한 증거가 나온 것도 아니고.”

그에 일순간 은월의 미소가 사라졌다.

“지금 널 위협했을지 모를 사화를 걱정하는 거야?”

그의 물음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 잘못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아니, 그런데 내가 사화를 걱정할 리가 없잖아.

그저 북쪽 땅의 주인을 그렇게 함부로 증거 없이 감옥에 넣으면 나중에 사화가 은월한테 보복할까 걱정된 것일 뿐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걱정하는 건 은월인데!”

나는 인상을 쓰며 그에게 반박하며 소리쳤다. ‘왜 그렇게 말해!’라는 말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소리가 컸어.

잠시간 정자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포포가 자신의 크고 붉은 눈을 깜빡거리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 갈래.”

작게 중얼거린 후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월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에 나는 떠나지 못하고 내 손목을 잡은 은월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내 그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걱정하는 건 나라며.”

“…….”

“그런데 어디 가려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더욱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네.”

그가 내 손목을 놓고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누가 나 걱정한다고 하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가 일어서 있는 날 올려다보았다. 그의 예쁜 회색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네게 들으니 기분이 좋아, 아리야.”

그의 말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의 눈을 더 이상 마주치지 못할 것 같은 나는, 정자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요즘 은월만 만나면 이상하다니까, 정말로!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예상대로 재판이 다가올수록 은월은 바쁜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런 그에 안도하면서도 이상하게 섭섭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날 지그시 바라보는 포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요즘?”

“뭐, 뭐가!”

“다과 훔쳐 먹은 다람쥐한테 보내는 눈빛을 요 며칠 내내 나한테 보내고 있잖아.”

나의 말에 포포의 귀와 꼬리가 바짝 섰다.

“내, 내가 언제!”

“포포, 솔직히 말해. 너 뭐 있지?”

“흥, 아니야, 바보야.”

살면서 느껴본 바로, 바보한테 바보라는 소리 듣는 것만큼 억울한 게 없다.

포포, 오늘 다과는 없을 줄 알아라.

“아, 그러고 보니 싸부가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어.”

“뭐?”

며칠 만에 듣는 은월 이야기에 나는 포포에게 귀를 기울이며 집중했다.

“재판을 기대해, 아리야. 네가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안 생기게 할 테니까.”

포포가 최대한 은월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지만, 포포는 포포였다.

“……라고 전해 달랬어!”

포포가 자랑스럽다는 듯 허리에 주먹을 쥐고 붉은 눈을 반짝였다.

“언제?”

“정자에 셋이 있다가 너 가버린 날.”

포포가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하며 웃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이제라도 말했으니 됐잖아!”

그건 맞아. 오늘 다과 줄게.

포포에게 맛있는 다과를 잔뜩 안겨준 채로 나는 내 방에서 나와 백령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리 님.”

“응?”

백령의 집무실로 들어가려던 날 불러세운 자는 다름 아닌 자타였다. 자타는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서신입니다.”

“누가 보낸 건데?”

“나래 님이요.”

“나래?”

나는 예상치 못한 발신인에 당황하며 서신을 받았다. 믿기지 않는 나는 몇 번이고 발신인을 확인해 보았지만, 이것은 나래의 것이 맞았다.

나래에게서 온 서신이라니, 상당히 의외였다.

“찝찝하시면 태우셔도 됩니다. 대신 태워드릴까요?”

자타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태우는 건 좀…….

“아리 님, 그런 거 열어 보면 부정 탄다고요!”

어느새 옆에 온 건지, 자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극구 반대했다.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잠시간 고민하던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신을 읽기로 했다.

그냥 평범한 내용인데?

“어떤 내용인가요?”

“그게……. 지극히 평범한 내용. 특별한 거라면 물어볼 게 있어서 만나자는 내용인데.”

“절대 안 됩니다.”

자하가 고개를 저으며 당부했다. 나 또한 자하와 마찬가지로 나래의 요구에 응해줄 생각이 없었다.

“근데 자타는?”

“아, 아직 전달할 서신들이 남았다고 날아갔어요.”

대체 왜 아무런 소리도 없이 날아가는 거야…….

“자, 자타는 왜요? 옆에 아리 님의 호위인 제가 있는데!”

아, 맞다. 자하 내 호위였지. 까먹고 있었어.

자하가 본인의 위치가 위태롭다고 생각한 건지, 불안에 떨리는 눈으로 날 응시했다.

“아니야, 서신 밑에 자타에게 이 서신을 보여주며 그간 내가 정말 미안했다고 전해달라고 적혀 있어서.”

“아, 그런 건가요? 하지만 자타는…….”

자타는 나래에 관한 기억이 좋지 않지. 역시 안 보여주는 게 나으려나…….

일단 나중에 자타를 만나면 그때 생각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자타 의견이 중요한 거니까.

“아 맞다, 아리 님 내일 호위도 제가 하기로 했어요!”

“응? 내일?”

“잊고 계셨어요?”

응? 뭐가?

나는 눈을 깜빡이며 자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하가 입을 떡 벌렸다.

“내일 사화 님의 재판이잖아요!”

“뭐?”

벌써 그렇게 됐다고?

요즘 머릿속이 복잡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로 전력을 보강할 생각인가 보더라고요. 아무래도 흑기가 슬슬 움직일 때가 됐으니까요.”

자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아리 님은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아셨죠?”

아니, 미안한데 나는 백령 옆에 착 붙어 있을래.

그렇게 나는 이번 재판에서 누구 옆에 붙어 있어야 좋을지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사화의 재판……. 만약 흑기 세력이 정말로 사화와 내통한 거라면, 사화가 죽게 내버려 둘 리 없어.

그러니, 내일이 되면 모든 게 밝혀질 것이다.

나는 그리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