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은월의 말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목을 천천히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빛 눈이 오늘따라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보네.”
은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쏟아지는 빗물 소리와 어우러져 그의 목소리가 더욱 달콤하게 들렸다.
왜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디 아파?”
은월이 내 머리에 손을 짚었다. 달아오른 얼굴에 은월의 차가운 손이 닿자 기분이 좋았지만, 여전히 그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안 아파.”
나의 대답에 은월이 손을 내렸다.
“그래도 이마가 뜨거운데.”
“원래 그런 거야.”
은월은 여전히 미심쩍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내가 멀쩡해 보이자, 의심을 거두었다.
……비를 맞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도망쳐야겠어.
그렇게 마음먹은 나는, 곧바로 실행에 옮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만 갈게. 늦은 밤에 실례했어.”
그에 은월이 나의 손목을 잡았다.
“비가 저렇게 내리는데, 어딜 가.”
“저 정도 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때였다. 하늘에서 ‘쿠르르.’하면서 더욱더 빗줄기가 거세졌다.
……하늘은 언제나 내 편이 아닌 것 같아.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 은월.”
그렇게 내가 다시 자리에 앉자, 은월이 실소를 터트렸다. 나는 부끄러움에 탁자에 고개를 묻었다.
고개를 묻고 은월이 안 보이자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그대로 입을 열었다.
“은월, 뭐 하고 지냈어?”
“우리가 그런 안부 물을 정도로 오랜만에 보는 건 아닌데.”
그건 맞지. 하지만 왜인지 길게 느껴졌단 말이야.
남쪽 땅에서 헤어졌던 시간보다, 요 며칠 못 본 게 더 길게 느껴졌다.
“나야 뻔하지 뭐. 아리, 넌 어떻게 지냈는데?”
“그런 안부 물을 정도로 오랜만에 보는 거 아니라며.”
내가 삐진 투로 말을 하자, 은월의 달콤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말 안 해줄 거야?”
“……할 거야.”
이, 이 치사한 호랑이 녀석.
은월에겐 당해낼 수가 없다. 다 알면서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그런데 목 안 아파?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은월이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지만, 나는 반대로 고개를 돌리며 단호하게 답했다.
“이대로 얘기할 거야.”
그에 은월이 못 당해내겠다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소리마저 내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미호와 있었던 일, 백령과 있었던 일, 영아가 방문했던 일 모두 은월에게 말했다.
그러자 들려오는 대답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잠은.”
“응?”
“잠은 잤어?”
잤을 리가. 어떻게 잠이 오겠어.
미호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는데…… 어?
그러고 보니, 나 청화관에 온 후로 미호에 관한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왜, 왜지?
이유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은월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그제야 나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나…… 은월을 좋아하는 걸까?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닐 거야. 그냥 은월이 반가워서 은월의 생각으로 가득 찬 걸 거야.
그렇게 나를 이해시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고개를 들 때도 되지 않았어?”
은월이 탁자에 딱 붙어 있는 내 머리를 매만지며 부드럽게 물었다.
“생각해볼게.”
“대체 생각을 언제까지 하실 겁니까?”
나는 은월의 대답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우리 둘 사이엔 적막감이 감돌았고, 빗소리를 가만히 듣던 나는 어느새 눈이 스르르 감겨버렸다.
***
은월과 아리가 만나기 몇 시간 전의 청화관.
“은월 님.”
청화관 안, 그곳엔 은월과 산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 홍화관이 무너지면서, 산이 청화관 소속으로, 청아는 일단 바랑의 궁 소속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기에 은월은 편하면서도 불편한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일을 하고 있었다.
“은. 월. 님.”
아무리 불러도 은월이 대답을 하지 않자, 산이 한 글자 한 글자 끊어서 그를 불렀다. 그제야 은월은 산을 돌아보았다.
“왜.”
“왜라니요, 회의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계속 일만 하고 계시잖습니까.”
무심한 은월의 표정에 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내둘렀다.
산은 그런 은월의 마음을 바꾸고자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리 님을 만난 지도 꽤 되지 않았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가서 청아나 도와.”
자신의 예상과 상반된 은월의 대답에 산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일을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하느라 옆에 두루마리가 가득 쌓인 은월과는 반대로, 산의 옆엔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한마디로, 쫓겨나도 산은 할 말이 없다.
‘그것만은 피해야지…….’
은월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일을 하던 도중,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에 산이 하던 일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웬 폭우……?”
은월이 쏟아지는 빗줄기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신국에서 갑작스러운 폭우는 좋지 않은 징조인데.’
산의 눈길이 슬그머니 은월에게로 향했다.
“지금 아리 님 걱정하시는 거 맞죠?”
쓸데없는 산의 물음에 은월은 대답할 가치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아리 님을 뵈러 가셔도 은월 님에게 충성을 바치는 저는, 모르는 척해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산은 벌써 일을 마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산.”
은월이 눈을 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 어째서인지 산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청화관에서 당장 나가.”
“잘못했습니다, 은월 님.”
산은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은월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일에 몰두했다.
‘백령이 있으니, 괜찮겠지.’
지금 아리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고, 은월은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느새 폭우가 가랑비로 바뀌고, 일이 거의 마무리 되어 갔다.
“산.”
은월이 몇 시간 만에 그의 이름을 부르자, 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은월을 바라보았다.
“네, 네? 은월 님.”
산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며 불안에 찬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나, 은월은 그저 산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산은 은월에게 두루마리를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금하면 풀어봐도 상관없어. 밖으로 새어 나가지만 않는다면.”
그 말은 즉, 밖으로 새어 나가면 산의 목숨은 위태로울 것이라는 뜻이었다.
산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두루마리를 펼쳐 보았다.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은 산의 눈동자가 커졌다. 산은 너무 놀라 얼떨떨한 표정으로 은월을 바라보았다.
“진심입니까, 은월 님? 이건 파장이 좀 클 텐데요. 사전에 공지라도 하시는 게…….”
“시간 없어. 미호한테 가서 바로 승인받아.”
단호한 은월의 말에 산은 더 이상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는 두루마리를 자신의 소매에 넣었다.
“알겠습니다, 은월 님.”
일을 마친 은월이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군.’
이번 일을 시행하는 데에 필요한 준비가 너무 많았다. 은월이 상당히 빨리 끝낸 편이지만, 그래도 그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리를 보러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은월은 적적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은 은월이 나간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가랑비를 맞으며 은월은 자신도 모르게 백령의 궁으로 향하다 청화관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만 돌아가야겠군.’
그렇게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자신의 눈에 아리의 모습이 담겼다.
‘일을 너무 많이 했나 보군.’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 치부하던 도중,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쁜 목소리가 은월의 귓가에 들려왔다.
“은월……?”
“아리, 네가 왜 여기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폭우가 쏟아졌다. 그렇기에 은월은 아리에게로 다가갔다.
방에 혼자 남아 있던 산은 이제 슬슬 몸을 움직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은월의 자취를 따라갔다.
‘은월 님, 저기서 뭐 하시는…….’
산은 가던 길을 멈추고 멀리서 몰래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리 님이잖아……?’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산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방해꾼은 조용히 일이나 하러 가겠습니다.’
산은 아리와 은월이 오기 전에 재빠르게 방으로 돌아가 대충 정리를 한 후, 비에 젖을 두 사람을 위해 잘 보이는 곳에 수건을 한 장을 올려두었다.
“가랑비니까 한 장이면 충분하겠지.”
그러니까, 수건을 한 장만 둔 것은 산의 소행이었다.
***
“……아리야?”
여전히 탁자에 엎드려서 고개를 들지 않는 아리를 보며 은월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불러도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은월은 아리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 아플 텐데.”
은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곤히 자는 아리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밖을 보니 아직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니, 은월은 아리를 백령의 궁에 데려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은월이 아리를 자신의 침실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요즘 잠을 뒤척이던 아리였기에, 조금도 깨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은월은 새근새근 자는 아리를 보며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정에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아리가 사랑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월은 아리와 마찬가지로 그 감정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은워얼…….”
아리가 잠꼬대로 은월의 이름을 부르자,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아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리의 다음 말에 잠시간 은월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쁜 놈.”
“나 나쁜 놈이야?”
은월이 이내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리며 아리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 침실을 나왔다.
은월이 오늘따라 실소를 터트리는 일이 많았는데, 그건 모두 아리의 저런 귀여운 행동 때문이었다.
“미치겠네.”
침실에서 나온 은월은 복잡해진 머릿속 탓에 탁자에 앉아 낮게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