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반쪽.’
반으로 갈라진 마음 하나는 검게, 다른 하나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나는 내 손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다른 이의 손에 있었다.
저건…… 대체.
“아리야!”
누군가의 외침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리야, 무슨 잠을 그렇게 자?”
포포가 나를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백령의 집무실이었다.
또 꿈이야?
나는 쏟아져 오는 잠을 꾹 참으며 눈을 비볐다.
“백령은?”
“형님은 아직 안 오셨어. 그… 무서운 신수도.”
“응? 무서운 신수?”
포포가 말하는 무서운 신수가 누구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그 거북이 누님 말이야.”
“아. 영아를 말하는 거구나.”
포포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영아를 무서워했었지, 참.
“네가 자면서 횡설수설하길래 깨운 거야.”
“횡설수설?”
포포가 끄덕거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귀를 바짝 세웠다.
때마침 백령과 영아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리 님, 많이 기다리셨죠?”
영아가 들고 온 탕약을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영아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영아가 만든 약은 먹을 만해.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백령 님, 아리 님.”
영아가 백령과 내게 정중히 인사를 한 후 서화원으로 돌아갔다. 집무실에는 나와 백령, 그리고 포포만이 남아 있었다.
영아가 돌아가자, 경직되어 있던 포포가 가볍게 몸을 풀더니, 탁자에 놓인 다과를 맛있게 먹었다.
“헤헤.”
으휴, 저 여우를 누가 말려.
다과를 먹는 포포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는데, 포포가 내게 한 입 베어 문 다과 하나를 내밀었다.
“아리야, 먹어.”
“됐어.”
이 여우가, 먹던 걸 주면 어쩌자는 거야!
포포가 걱정이 가득 담긴 눈망울로 날 올려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났다.
“요즘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래? 무슨 고민 있어? 맨날 한숨 쉬고 밥도 잘 안 먹고……. 내가 주는 다과도 그래서 안 먹는 거야?”
포포의 귀와 꼬리가 축 늘어졌다. 나는 그런 포포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 네가 하는 짓 보고 한숨 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밥은 내 몫까지 네가 맨날 뺏어 먹고. 네가 주는 다과는 먹던 거라서 안 먹는 거잖아!
이 여우가 갑자기 왜 이래?
누가 들으면 오해할 법한 이야기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리야.”
아니나 다를까, 백령의 시선이 곧바로 내게 꽂혔다. 걱정이 가득 담긴 푸른 눈은 덤이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 포포는 정작 나와 백령의 대화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혹, 미호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그게…….”
백령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호와 별채에서 있었던 일을 백령에게 털어놨다.
“미호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군.”
이야기를 들은 백령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무시해라.”
무, 무시?
아니, 백령, 미호가 울었다니까.
미호를 이해했다는 말과는 달리 매정한 그의 당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미호는 그저 시호에게 못 해준 걸 네게 하는 것일 뿐이다.”
“어?”
문득, 별채에서 미호가 눈물을 흘리며 내게 하던 말이 떠올랐다.
‘아니야, 아리야. 그래서가 아니야…….’
미호는…….
“미호는 냉정한 여우다, 아리야. 판단이 빠르고 담담한 신수지. 그러니, 그날 이미 널 시호로 보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백령이 말하는 ‘그날’은 내가 미호에게 난 시호가 아니라고 당당히 말하던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시호에게 못 해준 걸…… 내게 하는 거라고?
“시호에게 어떤 일을 못 해줬는데?”
“감정.”
백령의 짧고 간결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감정?
백령은 이 이상 내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지만,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짐작이 갔다.
“미호가 널 시호로 보는 건 잘못이지만, 네게 정을 붙이는 것까지 잘못은 아니지.”
백령의 아름다운 푸른 눈에 서기가 어렸다. 이내 그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 미호는 지금도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테니.”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왜인지 마지막 백령의 말에 슬픈 감정이 묻어나왔다.
“백령.”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야.”
백령은 언제나 그렇듯, 구태여 묻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아니, 어쩌면……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
밤이 되자 온종일 쏟아지던 빗방울이 가늘어지고, 이젠 폭우가 아닌 가랑비 정도의 비가 내렸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구름 뒤에 숨어 달이 보이지 않았다.
백령에게 미호에 대한 해답을 얻었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보고 싶다.
내 마음을 유일하게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안식처 같은 존재.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여우 모습의 포포에게 이불을 덮어준 나는,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였다. 마음이 가는 대로.
그런데, 어느 순간 눈앞에 은월이 보였다.
환각인가 싶어 눈을 비벼보았다.
어? 환각이 아닌데?
마침 이쪽을 바라보던 은월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예쁜 회색빛 눈이 커졌다.
“은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은월 또한 나의 등장에 의문이 가득한 것 같았다.
“아리, 네가 왜 지금 여기에…….”
응?
그제야 깨달았다.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곳이 청화관 앞이라는 것을.
그때, 추적추적 내리던 가랑비가 갑자기 아까와 같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멍하니 서 있는 내게 은월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그가 걸치고 있던 도포를 벗어 내리는 비를 막아주었다.
“감기 걸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은월의 도포를 뒤집어쓴 채로 그의 소맷자락을 잡고 청화관으로 들어갔다.
청화관 안으로 들어온 나는 옷에 묻은 빗방울들을 털어냈다. 그래도 은월의 도포 덕분에 그리 많이 젖지는 않았다.
대신 은월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지만…….
그의 밤하늘 같은 머리칼이 더욱 짙어졌다.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여기, 수건.”
은월이 수건 한 장을 내게 던졌다.
아니, 나는 닦을 곳도 없는데…… 은월, 네가 더 급해.
하는 수 없이 나는 까치발을 들어 은월의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주었다. 그에 은월이 놀란 듯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괜히 나섰다.
그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도무지 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은월, 그렇게 바라보면…….”
내가 낮게 읊조리자, 은월이 잘 안 들리는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왜 그래?”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당황한 나는 그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조심해, 아리야.”
그런 내 허리를 부드럽게 잡은 은월이 날 지탱해주었다. 그의 앞에서 넘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이제 그는 익숙해진 듯했다.
그런데, 왜 난 익숙해지지 않는 걸까.
평소였다면 은월의 시선을 회피했겠지만, 왜인지 분한 마음에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엇 때문인지 은월이 눈을 곱게 휘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난 못해.”
결국, 다시 눈을 돌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반칙이야, 반칙이라고.
나는 애써 몸을 움직여 은월과 떨어졌다. 수건은 은월의 머리 위에 걸어둔 채로.
“이제 네가 닦아.”
새침하게 그에게 말하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나도 안다. 은월은 나보고 닦아달라고 한 적이 없다는 걸.
하지만 얼굴이 달아오른 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고 보는 중이었다.
대충 물기를 털어낸 은월이 탁자에 앉았다. 나도 그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그래서, 이런 늦은 시간에 청화관에 온 이유가 뭐야?”
나도 모르는 새에 청화관 앞으로 왔다고 하면 이상하겠지?
이건 내가 봐도 너무 이상한데…….
나는 일부러 은월의 대답을 회피하며 탁자에 놓인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어? 일하고 있었어, 은월? 이 밤까지?”
“할 일이 좀 남아 있어서. 그래서 청화관에는 왜…….”
황급히 은월의 말을 가로챘다.
“으, 은월. 서쪽 땅 회의 마치자마자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갔던 거야? 바로 나가던데.”
이 정도면 은월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결국, 나의 승리였다. 은월은 더 이상 묻는 걸 포기한 거 같았으니.
“……비천한테.”
“비천? 왜?”
비천한테 갔다고?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비천과 은월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그런데…… 왜 굳이 비천한테.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럴 일이 있어서. 네 덕 좀 봤어.”
“응? 내 덕?”
영문을 모르는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에게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전혀 딴판이었다.
“뱀이 귀찮게 굴면 말해.”
“응? 뱀? 무슨 뱀?”
“글쎄……. 무슨 뱀일까. 뱀은 다 정신에 이상이 있긴 한데.”
은월이 턱을 괴며 딴청을 피웠다. 알 수 없는 말들에 답답한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은월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은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아리 님께서 이 야밤에 청화관에 온 연유가 무엇이기에 자꾸 말을 돌리실까?”
포기한 거…… 아니었어?
은월의 아름다운 회색빛 눈동자가 다시금 나를 향했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그에게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사, 산책이야. 달이나 볼까 해서…….”
“비가 내리고 있는데 무슨 달?”
……그러게. 비가 내리고 있는데 무슨 달일까.
“그……. 아, 아무튼, 은월, 너는 왜 청화관 앞에 있었는데?”
“글쎄…….”
나의 물음에 은월이 잠시간 생각에 빠졌다. 이내 생각을 마친 그가 다시 한번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며 곱게 웃었다.
“나도 산책이지 않을까?”
은월이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니까 나 좀 봐, 아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