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저 별채에 미호가 있을 줄 몰랐어. 미호는 회의가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 버리거든.”
이랑이 함께 걸으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미호는 아마 나를 만나기 위해 바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미호와 어떻게 해야 할까.
“아리야?”
내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자 이랑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생각을 떨치고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으, 응? 아. 이랑, 그런데 넌 동쪽 땅으로 안 돌아가?”
나의 물음에 이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돌아가야지. 지금은 그냥 알아볼 게 있어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뿐이야.”
“알아볼 거?”
고개를 기울이고 그에게 묻자, 그가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덕분에 우리 사이에는 짧은 적막감이 흘렀지만, 적막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익숙한 얼굴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랑, 너 이 녀석. 어디 갔었냐?”
바랑이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이랑을 바라보았다. 그에 이랑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좀. 아무리 지금 동쪽 땅에서 지낸다지만 삼촌 궁을 허락받고 돌아다닐 이유도 없고.”
“뭐, 그건 맞지만……. 아리도 같이 있었네?”
“관심 꺼, 삼촌.”
바랑의 눈길이 내게로 향하자, 이랑이 바랑에게 경고하듯 매섭게 말했다.
이 둘……. 확실히 전과 분위기가 달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바랑은 여전히 특유의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두 눈이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이랑의 말에 크게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이랑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바랑을 응시하고 있었다.
“동쪽 땅에 간 뒤로, 연락도 없던 녀석이 너무하네.”
그리 말하며 바랑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그 웃음이 왠지 모르게 슬프게 느껴졌다.
“다음에 봐, 삼촌.”
그에 이랑은 마음이 조금 약해진 건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바랑에게 인사했다.
이후 이랑은 내 손목을 잡고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랑.”
계속해서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랑!”
“응?”
서너 번은 그의 이름을 불렀건만, 처음 들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이랑이 우뚝 멈춰 섰다.
“이쪽 맞아?”
이곳은 암만 봐도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다. 이곳은…… 아주 예전에, 이랑이 내게 수호석을 준 그 정원이니까.
이랑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며 여기가 어디인지 깨달았다.
“아. 미안해. 정신이 없어서 그만…….”
“괜찮아. 온 김에 쉬었다 가자.”
이랑에게 할 말도 있고.
정원에는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석상 맞은편에 가서 앉자, 이랑이 옆자리를 채웠다.
먼저 입을 연 건 이랑이었다.
“나는, 여기 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여.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널 여기로 끌고 왔나 봐. 미안해.”
나는 그런 이랑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이랑, 바랑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지?”
나의 물음에 이랑이 잠시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석상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다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다기보다는…….”
이랑의 태도에 나는 전부터 의심하던 것이 하나 있었다. 바랑이 흑기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
사화가 흑기와 내통한 것이 기정사실이 되었지만, 바랑 또한 흑기와 내통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바랑이 흑기와 손을 잡는 건 상상이 안 가는 일이긴 하지만…….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이랑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삼촌은 아니야, 아리야.”
“응?”
“나중에…… 나중에 네게 꼭 말해줄게. 모든 걸.”
그 말을 내뱉는 이랑이 황금빛 눈동자는, 굉장히 슬퍼 보였다.
“그런데, 아리가 나 걱정해주는 거야?”
이랑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티끌 하나 없는 이랑의 미소는, 참 예뻤다.
그래서였을까.
“맞아. 걱정하는 거.”
“응?”
이랑의 황금빛 눈동자가 커졌다.
“걱정하는 거 맞아, 이랑.”
평소에 내가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을 내뱉자, 이랑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랑이 소매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고, 내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아리야……. 그렇게 들어오면…….”
“응?”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들어가긴 뭘 들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이랑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미 내 표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이랑은 귀와 꼬리가 바짝 솟아오른 채로 이미 세상 다 가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이 귀에 걸려 있었으니까.
……좋단다.
***
중앙 회의에서 궁으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미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산책이나 할까…….
방에서 빈둥거리며 다과를 먹는 포포를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
“아리야, 오늘 좀 음산하지 않아?”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를 보며 포포가 낮게 읊조렸다. 최근에 이렇게까지 비가 쏟아졌던 적이 없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햇빛이 강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일단 백령한테 가야겠어.”
나와 포포는 서둘러 백령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쏟아지는 빗물을 맞으며 백령의 집무실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리야.’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너무 아파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포포는 그런 날 보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아리야?”
“뭔가 이상해…….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어떻게든 백령의 집무실로 가야 해.
애써 정신력으로 버티며 백령의 집무실로 가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아리야.”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백령?”
“형님!”
백령이 내게로 다가오자, 지끈거렸던 머리가 한결 나아졌다. 빗속에서도 그의 푸른 눈동자만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백령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왔다. 백령은 아까부터 무언가가 걸린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백령, 왜 그래?”
그를 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분명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가본 것인데, 그곳에 네가 있을 줄이야…….”
백령이 석연찮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이내 그의 푸른 눈이 날 응시했다.
“그런데, 왜 빗속에서 그리 멈춰 있었던 것이냐.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아, 그게……. 머리가 갑자기 너무 아파서.”
“아팠다고?”
백령의 인상이 굳어졌다. 나는 괜히 걱정을 끼칠까 싶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수습했다.
“지금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까만 그랬어.”
하지만 여전히 백령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타를 불러와라.”
백령이 집무실 앞을 지키는 하인에게 명했다. 그러자, 자타가 금방 백령의 앞에 도착했다.
“부르셨습니까, 백령 님.”
“영아를 불러와라.”
“……예?”
아니, 백령, 나 지금 괜찮다니까! 영아를 이 빗속에 부를 작정이야?
자타는 잠시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백령의 명을 수긍하듯 고개를 숙이고 어디론가 향했다.
……영아, 미안해.
“걱정하지 마라, 아리야. 이런 날씨는 오히려 영아가 좋아하는 날씨이니.”
아, 맞다. 영아는 거북이였지, 참.
“오히려 서화원에 틀어박혀 있는 본인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을 테니.”
백령의 말에 나는 안심하며 영아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타가 영아를 데리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영아가 정중히 나와 백령에게 인사를 건넸다.
“동쪽 땅의 주인이신 백령 님과, 작은 주인이신 아리 님을 뵙습니다.”
영아는 오늘따라 인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런 날에 불러주시다니, 역시 너무 기쁘군요.”
그런…… 거야?
내 상식으론 이해가 가지 않지만…… 영아는 거북이니까. 그럴 수 있지.
“그래서, 절 부르신 연유는 무엇입니까? 뭐, 뻔할 뻔 자지만…….”
영아가 날 보며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아리 님,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아까 빗속에서 머리가 너무 아팠었어…….”
“제가 진찰해보도록 하죠.”
영아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자신의 신력으로 내 몸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아무 이상 없네요.”
“지금은 괜찮아.”
괜찮다는 내 말에도 영아는 몇 번이나 내 몸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여전히 아무 이상이 없자, 그제야 영아는 내 손목을 놓았다.
아무 이상 없다는 영아의 말에도 백령은 안심이 되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탕약을 지어줬으면 한다, 영아.”
“예, 물론이죠, 백령 님. 그런데…… 아리 님의 몸 상태에 관해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영아가 인상을 쓰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게 뭐지?”
“신력이 조금……어지럽혀져 있습니다. 그것만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만.”
무언가를 생각하던 영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일단은 탕약을 올리도록 하죠. 신력을 원상태로 돌려줄 탕약을 올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영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탕약을 만들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백령이 그런 영아의 뒤를 따랐다.
“넌 여기 있거라.”
백령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기다렸다.
***
“영아, 아까 하려던 말이 뭐지?”
자신을 따라 나온 백령을 기다렸다는 듯이 영아가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누군가가 아리 님의 신력을 어지럽힌 것처럼…… 이상했습니다.”
“누군가가?”
“네, 하지만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제가 착각한 것인가 싶어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영아는 여전히 자신의 착각인지, 정말 이상했던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영아는 자신의 실력을 믿어 보기로 했다.
“백령 님, 당분간 아리 님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감이 좋지 않습니다.”
영아의 말에 백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예로부터, 예고 없이 내리는 비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였죠.”
영아가 여전히 퍼붓는 비를 보며 낮게 읊조렸다.
“이 비가…… 아리 님과 연관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영아가 그리 말하며 백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백령은 쏟아지는 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가…… 어지럽혔다라.’
백령은 그렇게 한참을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