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을 하는 게 어때?”
밖으로 나온 비천을 기다리고 있던 건 다름 아닌 은월이었다. 은월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로 비천을 바라보았다.
“은월, 당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닙니다만……. 그것보다 은월, 당신은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습니까?”
비천은 아리가 임시로 홍화관을 짓자는 의견을 표할 때를 떠올렸다. 다른 신수들과 달리 은월은 그다지 놀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비천의 물음에 은월이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휘며 웃었다. 비천은 그 모습에 상당히 약이 올랐다.
“내가 널 도와줄 이유가 없으니까.”
“어련하시겠습니까.”
비천이 이젠 익숙해졌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보다, 당신이 날 기다린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용건이 뭡니까?”
비천은 홍화관 문제로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했기에, 은월과 그리 긴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은월 또한 피차일반이었다.
“이곳은 보는 눈이 많으니,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지.”
그에 비천은 그가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은월과 비천은 보는 눈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은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와 흑기 사이엔, 무슨 접촉이 있었던 거지?”
은월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비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 흑기와 아무런 연관도 없습니다, 은월.”
훤히 보이는 거짓말에 은월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도 비천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무엇 때문에 내게 이러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잘못 짚었습니다.”
비천의 거짓말에 은월이 눈을 휘며 웃었다. 그에 비천이 오히려 흠칫하며 긴장했다.
“지금이라도 말하는 게 네 신상에 좋을 텐데.”
은월의 한마디에 비천이 크게 동요했다. 그만큼 은월에게는 사법관으로서의 위압감이 있었고, 제아무리 비천이라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사화의 궁을 뒤지면, 너와 관련된 자료 하나쯤은 나올 텐데. 그러기 전에 네 입으로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
은월의 미소는 너무나 예뻤지만, 그가 하는 말은 무엇보다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비천은, 기나긴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말하죠. 하지만 제 증언은 그리 도움이 되진 않을 겁니다.”
“알고 있어.”
은월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모습이 비천은 너무나도 싫었지만, 애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난 흑기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그저, 사화가 이번 한 번만 도와준다면, 내게 그만큼의 보상을 약조했죠.”
“보상?”
은월의 물음에 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화가 교육자가 되고, 신국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다면, 내게 떨어지는 보상이 무엇이겠습니까, 은월?”
“홍화관의 권력 보충인가. 사화를 홍화관 밑으로 두려 했군.”
은월의 추리에 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 난 점점 줄어드는 홍화관의 입지에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사화가 그 틈을 파고든 거죠.”
비천이 해주는 말은 은월이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던 일이었다. 은월이 비천에게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화의 뒤에 흑기가 있었다는 거겠군. 넌 그걸 어떻게 알았지?”
사화가 흑기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비천이 알게 된 계기.
은월이 원하는 정보는 바로 이것이었다.
“저와 사화가 거래할 때쯤, 북쪽 땅의 자금이, 새어나가고 있었죠.”
“자금이?”
“사화가 북쪽 땅을 통치한 이래, 북쪽 땅은 단 한 번도 자금 관련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전 이상함을 느꼈었죠.”
‘북쪽 땅의 자금이 새어나갔다라…….’
은월은 비천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내게 알리지 않았지? 자금이 새어나간 건 엄연히 범법 행위인데.”
그렇게 밥 먹듯이 자금 관리를 못 하는 서쪽 땅에서 자금 문제가 발생할 때도 항상 청화관에 알리던 비천이었기에, 은월은 제게 알리지 않은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부족한 자금은 사화가 금방 채웠으니까요.”
“금방 채웠다고? 사화가 금방 채울 수 있는 단위가 아닐 텐데.”
“예, 그것이 나도 의문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뒤늦게 모든 걸 알았죠.”
비천의 흑색 눈과 은월의 회색 눈이 마주쳤다. 비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은월의 일을 방해한 것이 흑초라는 것을요. 그런데, 그 흑초는 이미 오래전에 재배가 금지되었잖습니까.”
“……흑초의 출처가 흑기라는 말이군. 그것을 유통하도록 도운 것은 사화고.”
은월의 말에 비천이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천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빈 자금을 금방 채울 수 있었던 거죠.”
비천이 이내 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사화 뒤에 벌레들이 득실거린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녀와 손을 잡지 않았을 텐데.”
비천의 목소리에서 혐오감이 드러났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은월을 바라보았다.
“사화를 구속할 목적이라면, 그쪽을 중점으로 파고드는 게 좋을 겁니다.”
“웬일로 술술 말하는군.”
이례 없는 비천의 적극적인 태도에 은월이 비아냥대자, 비천이 인상을 구겼다.
“은월.”
“그럼 난 이만.”
은월은 더 이상 비천과 할 말이 없기에,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순식간에 혼자 남겨진 비천이 구겼던 인상을 풀며 은월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아리에게 진 빚은 갚았으니, 뭐 그걸로 됐습니다.”
비천 또한 얼마 안 가, 무언가를 떨쳐내듯 자리를 떠났다.
***
아직 회의장에 앉아 있는 내게, 마루가 다가왔다. 일전의 일 때문인지, 백령의 눈치를 살피며 나와 백령에게 인사를 한 마루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아리 님, 미호 님께서 잠깐 뵙자고 하십니다.”
“미호가?”
나는 고개를 돌려 백령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백령이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마루가 정중히 나를 미호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었다. 그곳은 바랑의 궁에 있는 호화로운 별채였다.
바랑의 궁에, 이런 별채가 있었구나…….
난 새삼 감탄하며 별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왔구나, 아리야.”
안으로 들어서자, 미호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미호.”
“자리에 앉아. 출출하진 않아? 원하는 건 뭐든지 갖다 줄게. 말만 해.”
“아니야, 난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
미호의 호의에 정중히 거절하자, 그녀는 아쉽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차는 마실 거지? 나 혼자 마시기엔 너무 적적해서.”
그녀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내게 물었다. 그에 나는 더 이상 미호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녀가 따라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널 보자고 한 건…….”
“알고 있어. 내가 걱정됐던 거지?”
미호를 보며 묻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응, 귀찮게 해서 미안해. 흑기는 도망가고, 무너져 내리던 홍화관에 너도 함께 있었다는 보고를 듣고 걱정이 돼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그렇게 말하는 미호의 눈은 정말 며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퀭했다.
그런 미호의 모습을 보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미호가 더 이상…… 나 때문에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호.”
“응?”
“걱정은 고맙지만, 더 이상 그러지 않았으면 해.”
“아리야…….”
미호의 말끝에 슬픔이 묻어 나왔지만,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미호, 내 곁엔 백령이 있고, 자하가 있고, 그리고…… 은월이 있어.”
그녀의 자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 보면 그녀에게는 잔인한 말일 수도 있지만, 이대로 미호를 두었다간 병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말해야만 했다.
“나에 대한 집념을 버려, 미호.”
미호가 내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가 단순히 내게 시호의 모습을 바라는 것이라면, 나는 미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젠 그녀도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런데도 잘 고쳐지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렇기에, 난 그녀에게 계속해서 말해주어야 한다.
“난 시호가…….”
“아니야, 아리야. 그래서가 아니야.”
황급히 반박하는 미호의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황급히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미안해, 아리야. 못난 모습을 보였네. 이만 돌아가 줄래? 지금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 그래.”
미호가 웃으며 그리 말했지만, 그녀의 눈에선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부탁을 따라 별채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호…….”
미호가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그제야 뒤늦게 그녀에게 한 말을 후회했다.
나는…….
“아리야?”
그때,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이랑?”
그는 이랑이었다. 이랑이 별채 앞에 있는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이랑이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곧바로 풀렸다.
“아리 님, 바래다 드리겠…… 이랑 님.”
이어 별채에서 나오는 마루의 모습을 보고 상황을 이해한 이랑이 나의 손목을 잡았다.
“이, 이랑?”
갑자기 잡힌 손목에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루, 아리는 내가 바래다줄게.”
“하지만, 이랑 님.”
“걱정하지 말고 미호 곁을 지켜. 요즘 미호 안색이 안 좋은 것 같던데.”
“……알았습니다. 그리 전달하도록 하죠.”
“아리는 내가 책임지고 잘 바래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루가 이랑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하며 별채 안으로 들어가자, 이랑이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날 바라보았다.
“가자, 아리야.”
이랑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날 보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치미는 미호 생각에 나는 이랑을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